김선희(32)씨에게 중요한 건 ‘왜, 왜, 왜’다. “어렸을 때도 드라마를 보면 재미없어했다. 대신 물음표를 갖고 들어가는 플롯을 선호했다.” 끊임없이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에 이끌린 것도 그런 기질 때문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그의 궁금증 애호 성향을 잘 보여주는 시나리오다. 살인사건 용의자의 신원을 밝혀야 하는 형사만 등장하는 게 아니다. 용의자로 지목된 남편의 신원을 감추려는 아내가 나오고, 체포된 용의자를 돕기 위한 정체 모를 사람들도 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은 점점 ‘그들은 왜 법에 저항하는가’라는 의문으로 번져간다. 김선희씨는 다양한 글쓰기 경험을 갖고 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전부터 방송사의 교양 다큐멘터리 구성작가로 일했다. 서울예대 극작과에 뒤늦게 입학해 ‘무대 언어’ 작법을 배우기도 했다. 시나리오를 본격적으로 쓴 건 3, 4년 전부터. 방송사의 드라마 공모에 몇 차례 응했던 그는 “소재의 한계를 느껴”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름없는 작가의 설움을 다시는 당하지 않기 위해”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에 응했다는 김선희씨는 “꾸준히 글을 써 한국의 미야베 미유키가 되고 싶다”고 했다.
-실마리가 궁금하다.
=사라진 형을 찾는 동생의 이야기를 먼저 썼다. 1990년대 초가 배경이었다. 명문대 나와서 좋은 직장 다니던 형이 알고 보니 운동권 지하조직과 정권의 이중스파이였다는 설정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이야기를 대략 풀고 나니 거의 <아이리스> 수준이 됐다. 감당할 수 없는 규모가 되면서 접었다. 대신 신원을 바꿔치기해서 살아가는 인물의 사연만 가져와 15년 동안 법에 저항했던 남자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살인 용의자인 남자는 공소시효 만료 6일을 남겨두고 붙잡힌다. 처음엔 최 형사와 용의자의 두뇌싸움이 주가 되는 이야기로 착각했다. 용의자의 아내인 서우라는 인물이 독특한데.
=극중 서우는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여자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유일한 삶의 목표다. 그랬던 여자가 과거 사건을 뒤쫓게 되고, 남편이 살인사건의 용의자이지만 동시에 희생자임을 깨닫게 된다. 약자인 여성을 내세웠을 때 보는 이들이 더 안타까워할 것 같았다. 나 또한 사회적 약자이기도 하고.
-요즘 스릴러가 쏟아져 나온다. 한 투자사 관계자는 극중 주인공들이 공권력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사적 복수를 행하는 게 전과 다른 특징이라고 하더라. <당신은 누구십니까>도 넓게 보면 사적 복수극이다.
=법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법원에 다시 들어가려 할까. <당신은 누구십니까>의 인물들은 법에 저항하는 인물들이다. 아마도 사적 복수물이 많이 나오는 건 기존의 범인을 쫓는 형사 스릴러물의 선악 구조를 탈피하고 싶어서일 것 같다. 선악 구조를 들이대선 인간의 욕망을 제한해서 묘사할 수밖에 없다.
-제목의 ‘당신’은 그런 점에서 남편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우리일 수도 있고 국가일 수도 있겠다.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 등을 좋아한다. 미유키가 항상 자신의 스승으로 삼았던 마쓰모토 세이초도 좋아하고. 일본에는 사회파 추리물이 많은데, 한국에는 별로 없다. 장르문학의 전통 자체가 전무하다. 아직까지도 한국에선 스토리 중심의 서사에 편견이 있는 것 같다. 웃을지 모르겠지만 나의 최종 목표는 한국의 미야베 미유키가 되는 거다. (웃음)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교양다큐 프로그램을 만들 때의 경험도 큰 도움이 됐나.
=23살 때였나. 참여연대 박원순 변호사를 인터뷰하는데 내가 좋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 했다. 그 말이 오래 가슴에 남았다. 부족한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뭐지 곱씹었던 것 같다. 글로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마음이 조금 생겼던 것도 같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살인의 추억>이나 <추격자>처럼 사회적인 맥락을 놓치 않는 스릴러를 쓰려고 애썼다.
-당신의 정체를 밝혀나가는 과정이 복잡하다.
=장치들이 많다. 사실 시나리오 쓰면서 끼워맞추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영화화는 시나리오 수정을 전제한다. 작가로서 고치기 싫은 건 뭔가.
=서우와 용의자를 돕는 의문의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에 대한 묘사는 변형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음 작품도 미스터리 스릴러인가.
=아니. 16부작 로맨틱코미디를 하나 써서 방송사 공모에 넣어뒀다. 남자 보모 이야기다. 아직 시작을 못했지만 이기적인 30대 골드미스의 친구 찾기 이야기도 구상 중이다.
시놉시스
서우와 영택은 금실 좋기로 소문난 부부다. 5년째 함께 사는 부부는 주말마다 봉사활동을 하며 행려자들을 도울 정도로 착한 심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들 부부에게 사고가 발생한다. 뒤늦은 결혼식을 앞두고 남편 영택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서우는 실종 신고를 하러 경찰서에 들르는데, 마침 한 무리의 형사들이 남편 영택의 사진을 보고 15년 전 살인사건 용의자로 수배 중인 이형석과 인상착의가 비슷하다고 말한다. 한편, 자신의 형을 살해한 용의자를 뒤쫓아왔던 최 형사는 인근 경찰서의 제보를 듣고 서우를 미행하고 드디어 이형석을 체포한다. 하지만 이형석은 자신이 전영택이라고 주장한다. 최 형사는 과거 살인현장의 지문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확인하려 들지만, 체포된 남자는 손에 지문이 하나도 없다. 공소시효 만료까지는 6일, 최 형사는 남자가 이형석임을 증명해야 한다. 혼란스럽기는 서우 또한 마찬가지다. 서우는 신원기록 조회 결과 남편이 다른 여자와 이전에 결혼했음을 알게 된다. 남편의 전처는 심지어 영택과의 결혼생활이 끔찍했다며 하루도 맞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말한다. 결혼을 미뤄왔던 남편을 의심하게 된 서우는 자신과 행복한 가정을 꿈꿨던 남자가 두 얼굴의 살인자였을지 모른다는 추측에까지 이른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인가. 이형석인가, 전영택인가. 형의 복수를 위해, 가정을 지키기 위해 최 형사와 서우의 추격전이 시작되는 사이 남자의 정체를 숨기려는 일련의 무리도 행동을 개시한다.
시나리오 발췌
17. 경기 경찰서, 강력반/낮
박 형사 앞에 마주 앉은 서우, 얼마나 울었나, 두눈이 시뻘겋다.
사진을 들고는 고개를 갸웃하는 박 형사, 옆모습이라 찜찜한 표정이다.
도저히 안되겠는지, 일어나 한쪽으로 간다.한쪽에선 교통사고 뺑소니 때문에 몽타주 요원이 와 있는 상태.
등에 ‘과학수사’라 써진 옷을 입고, 열심히 마우스를 놀려대는 요원들.박 형사 어때? 잘돼가?
요원 (모니터만 바라보며) 이 동네는 뭔 뺑소니가 이리 터진데?
박 형사 (남편 사진을 내밀며) 있지, 요거 얼굴을
(천천히 고개를 앞으로 돌리며) 이렇게 못 돌리나?
요원(기막힌) 이게 무슨 입체 스리디개싸발도 아니고… 말만 하면 다 되는 줄 아나.박 형사의 말을 무시하고, 하던 일이나 계속하는 요원들. 잡은 두손을 가슴에 대고 간절히 기도하는 서우의 모습, 말 그대로 애절함 그 자체다.
그 모습을 보던 요원, 연정이 통했는지 “에이, 씨팔!” 하면서도 사진을 달라고 손을 내민다.
박 형사 어이, 아줌마! 봐봐. 맞아요?
후다닥 달려가 컴퓨터 화면을 보는 서우.
맞다! 남편의 얼굴이다!
그새 밝아지는 서우의 얼굴.서우 네, 맞아요. 우리 신랑이 맞아요!
너무도 고마운 마음에 “고맙습니다!”를 연방 외치는데, 그 바람에 뭔일인가 싶어 이쪽으로 다가와 컴퓨터 화면을 보는 몇몇 형사들. 그런데, 서우와 달리 그곳에 모인 형사들 표정이 묘하게 굳는다. 서로 긴장되는 시선을 주고받더니 누가 먼저랄 새도 없이, 한쪽 벽면에 시선이 모인다.
서우, 그들의 시선 따라가보면, 벽에 붙어 있는 ‘살인용의자수배전단지-이형석’!(1신에 나온) 연필로 그려진 앳된 얼굴과 나이를 가늠해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놓은 사진. 특징없는 평범한 얼굴이라 지금 남편 사진과는 다른 듯, 닮은 듯, 딱히 어떻게 말할 수 없는데….
서우 내 남편은 정영택이에요! 이형석이 아니라 정영택이라고요!
석연치 않은 표정의 박 형사,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로 돌아온다.
박 형사 신원조회…(해도 되죠)?
끄덕이는 서우.
정영택 이름으로 신원조회를 해본다.박 형사 우리도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요. 어디서 음주 적발이나 되면 집에 가라는 귀가 명령 정도지. 일단 전 부인하고 확실히 끝냈는지부터 알아보시고(하는데)
서우 (당황스런) 네? 전부인… 이라뇨?
박 형사 엥? 몰랐어요? 아줌마 남편 정영택이래매? 결혼했었구먼, 뭐.
서우 (너무도 어이없는) 결혼… 이라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