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유령들만 사는 세계 [2]
2010-06-24
글 : 장병원 (영화평론가)

삶의 조건으로서 유령성

엄밀한 공간 디자인과 시각적 스타일을 통해 로만 폴란스키가 다루려는 것은 표면적인 진실이 아니라 캐릭터가 느끼는 심리적 진실이다. <유령작가>의 모든 사건은 주인공의 백일몽처럼 보일 정도로 그의 심리에 달라붙어 있다. 랭을 저격하는 퇴역 군인은 문득 유령작가가 머무는 모텔에서 말을 걸고, 황량한 섬에서 만난 노인은 뜬금없이 주인공의 의심을 확신시켜주는 의미심장한 목격담을 전한다. 믿을 수 없는 타인들 혹은 낯선 이들에 대한 불안은 신경증을 자극하며, 환각과 실재 사이에서 인물들을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그 또한 스스로 실제의 모습을 감추어야만 하는 대필작가는 가면 너머 숨겨진 진짜 얼굴을 찾아내려 하지만, 진실을 찾아내는 순간 그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다.

첫 장면에서의 개성적인 등장 이후 유령작가의 존재감은 점차 옅어진다. 전 대필작가 맥아라의 유령인 동시에 대필의 대상이 되는 인물인 애덤 랭의 유령인 그가 진실을 향해 접근해갈수록 이 사내는 점점 정체성을 잃어간다. 애초에 기이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던 주인공은 한편으로 점점 맥아라와 닮아가는 동시에, 그의 고객인 랭의 아내와 잠자리를 함으로써 랭의 자리를 대신하더니 랭이 외부로부터 받는 위협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기에 이른다. 종국에는 랭을 암살하는 퇴역 대령이 모텔에서 주인공에게 드러내는 적대감을 상기해보라. 맥아라와 랭 사이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그의 영역은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흩날리는 맥아라의 회고록 초고만 보여주는 마지막 살해장면에서 방점을 찍는다.

<유령작가>의 이야기 구조는 주인공의 위치를 어떻게 상정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읽힐 수 있다. 혹자는 ‘거짓’과 ‘연기’는 정치의 속성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령작가>는 정치적 음모를 다룬 스릴러와는 거리가 멀다. 주인공은 이 거대한 정치적 연극의 의도된 희생양인가, 아니면 맥아라와 랭의 죽음 사이에 끼어든 실체없는 유령인가. 로만 폴란스키에 따르자면 낯설고 이질적인 외부 세계와의 대면은 그 강도가 증폭되는 순간, 미지에 대한 공포로 언제든 바뀔 수 있다. 그 삐딱하지만 무자비한 심리적 폭력, 정치적인 허무주의와 예리한 시각적 형식으로 돌아간 폴란스키는 흔히 ‘그로테스크’라 불리는 미학의 고양된 차원을 이 영화에서 보여준다.

로만 폴란스키의 그로테스크를 기묘함이나 외설스러움과 구별하는 것은 그것이 묘사 수준의 극단에 그치지 않고 존재의 본질에 대한 적확한 표현에 도달할 때다. 진짜가 사라진 이들에게 남은 거짓의 삶, 연기에 의해서만 존재를 확인하는 연약한 인간에 대한 이 보고서는 폴란스키의 최근작 중 단연 돋보이는 시각적 성취를 이룬다. 돌이킬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어갈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버나드 허먼풍의 음악이 아니더라도 칼끝을 딛고 선 아이덴티티의 위기를 전경화하는 폴란스키의 능란한 어희는 히치콕의 명성이 부럽지 않을 정도다. 그러므로 피할 수 없는 세계의 부조리와 대화하는 장치, <유령작가>에서 인물들이 놓여 있는 연기하는 삶의 유령성은 차라리 그들을 둘러싼 삶의 객관적 조건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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