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선한 아버지의 빈자리는 어떻게 되는가 [1]
2010-08-12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강우석의 <이끼>, 그 시작과 끝에 숨은 것은

강우석의 <이끼>가 원작(윤태호의 <이끼>)의 비교대상이 되리라는 건 누구나 예견한 일이다. 개봉 이후,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영화에 대한 논쟁도 대부분 이와 관련된다. 영화가 원작을 얼마나 충실히 재현했는가, 얼마나 넘어섰는가, 어떻게 다르며 그 차이는 납득할 만한가에 대한 의견들이 분분하다. 원작을 이미 본 관객이나, 영화를 먼저 본 관객 모두 강우석의 <이끼>를 말할 때, 원작의 존재를 유달리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원작과 비교하는 게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일단 영화가 원작이 이룬 성취와 인기를 이미 등에 업고 시작한 이상, 이런 분위기는 얼마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한편의 영화가 원작의 영향력, 원작의 첨부 없이 혼자 힘으로 서 있지 못한다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보일 때다.

강우석의 야심이 숨은 곳

나는 영화를 먼저 보고 나서 원작을 읽었다. 영화 내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상황의 전환과 인물의 선택이 원작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해소된 게 사실이다. 그렇게 한동안 영화와 원작을 오가면서 궁금증을 풀어가다 문득, 머릿속에서 강우석의 <이끼>와 윤태호의 <이끼>가 자연스럽게 하나의 큰 그림으로 통합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느새 내게 <이끼>는 그저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강우석의 <이끼>와 윤태호의 <이끼>는 아무리 내용적 뿌리가 같다고 해도, 엄밀히 말한다면, 서로 다른 작품이 아닌가. 우리는 너무 쉽게 둘을 겹쳐두고 있지는 않은가. 물론 사람들이 영화 <이끼>를 말하면서 자꾸 웹툰 <이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건 영화 자신이 자초한 결함이다. 하지만 관객으로서 우리가 영화의 구멍 앞에서 원작으로 돌아가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구멍을 메울 내용을 찾아 상상하고 기껏해야 결국은 원작을 반복하는 일 외에는 없다. 그것이 영화 <이끼>가 원작에 비해 서사적으로 허술하다고 말하는 근거가 될 수는 있지만, 여기에 비평적으로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강우석의 <이끼>를 분석하는 이 자리에서만큼은 될 수 있는 한 영화 자체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다. 하지만 영화 <이끼>(아래 <이끼>는 강우석의 <이끼>를 의미한다)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원작과의 두드러진 차이를 언급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유목형과 천용덕이 만나 마을을 만들게 된 계기, 즉 이 마을의 기원이 원작에서는 가장 중요했고, 독자는 그 비밀을 찾아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이끼>는 그 부분을 영화의 맨 앞으로 끌어온다. 마을의 기원을 처음부터 공개한다. 자, 기원을 궁금해하지 말고 이제부터 다른 것을 보아라! 무엇을? 또 하나 <이끼>가 시도한 변화는 아예 새로운 설정을 넣은 것이다. (여기서부터 스포일러가 종종 등장하니, 영화를 안 본 분들은 주의할 것.) 영지(유선) 캐릭터의 변화, 무엇보다 영지의 시선으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영화 전체를 거꾸로 다시 읽게 만드는, 원작에는 없던 반전. 이건 영화적으로 무거운 결단이다. 우선 강우석은 이야기의 배치를 바꾼 선택에 대해 “러닝타임에 대한 걱정” 때문이라고 일축했고, 영지의 변화와 엔딩에 대해서는 더 큰 의미를 두었다(“엔딩을 설정하고 앞부분을 다 뒤집었다. …영지의 엔딩에 대한 반응은 관객과 나의 싸움이기도 하다.” <씨네21> 761호). 좀 이상한 건 관객이나 평자 대부분이 이런 변화를 인지하고는 있지만 그저 표면적인 영화적 장치로만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것 같다는 인상을 풍기는 점이다. 강우석의 설명 역시 뭔가 충분하지 않다. 내 생각에 이 두 지점, 영화의 시작과 끝은 <이끼>의 실험이다. 혹은 강우석의 야심이다. 그걸 보는 게 가장 중요하다.

천용덕이 없이는 유목형도 없다

<이끼>에 대한 우리의 물음은 대체로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먼저 유해국이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궁금증은 우리의 질문이기도 했다. 유목형을 죽인 자는 누구인가? 기도원의 집단 살해자는 누구인가? 그 다음 좀더 고차원적인 질문. 그렇다면 유목형과 천용덕은 누구인가. 그들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 인간인가. 표면적으로 이 물음들이 영화를 지탱하고 있는 건 맞다. 하지만 이 물음을 중심으로 영화로 들어갈 때, 우리는 영화가 스릴러로서 다소 허점이 많다는 결론에 이른다. 혹은 인물들과 상황을 이분법적 구도에서 무언가의 상징으로 규정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그런 시도가 틀리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건 강우석의 <이끼>를 보는 게 아니라 그저 <이끼>를 보는 것에 가깝다. 위에서 언급한 이 영화의 시작을 다시 생각해보자. 영화는 이미 시작부터 이 공동체의 기원을 털어놓았다. 유목형과 천용덕을 공동체를 세운 두 ‘아버지’라고 본다면, 도입부에 이미 이 아버지들의 성품과 기질, 그들의 전사, 둘의 만남과 마을을 건설한 계기 등이 압축적으로 들어가 있다. 강우석의 의도가 어떠하든지 여기에는 어떤 영화적 요구가 있어 보인다. 기원은 이미 밝혀졌다, 그러면 이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아버지의 비밀은 없다, 혹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면 이제 누구를 보아야 하는가. 이를테면 유목형과 천용덕이 어떤 인간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유해국과 이영지가 혹은 천성만, 하성규, 김덕천이 두 ‘아버지’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믿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기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꾸만 돌아오는 기원, 혹은 돌아오는 기원에 대한 대답과 싸움이 더 중요하다.

강우석이 무게를 두었다고 밝힌 인물 이영지에서 시작해보자. 영화를 보며 좀 이상하다 느낀 장면이 있다. 점점 쓸모없는 노인이 되어가는 유목형과 달리 부와 권력을 거머쥔 천용덕은 성인이 된 영지가 유목형에게만 마음을 주는 것이 못내 불편하다. 그는 유목형을 살려두는 대가로 영지에게 잠자리를 요구하며 그녀가 누구 편인지 묻는다. 영지는 유목형과 천용덕, 이 두 ‘아버지’를 이렇게 구분한다. “유 선생님은 구원자이시죠. 당신은 복수를 해주었고.” 이 장면은 유목형-이영지-천용덕이 등장하는 지난 두 장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영화의 도입부에 유목형이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마을에서 쫓겨난 영지의 복수를 천 형사에게 부탁한 것을 기억한다. 천 형사는 유목형의 부탁대로 영지를 폭행한 남자들을 죽지 않을 정도로 구타한다. 영지는 그걸 지켜보는데, 그 표정에 두려움이 가득하다. 두개의 질문. 정황상, 유목형이 감옥에 오기 전에 이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그때 왜 그는 스스로 행하지 않았나? 혹은 그가 감옥에 있지 않았다면, 언젠가 직접 영지의 복수를 감행했을까? 행동하지 않는 구원자 ‘아버지’. 영지는 두 ‘아버지’를 구별하며, 구원과 복수에 차이를 두었지만, 적어도 영지의 삶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복수가 없이 구원은 없었다. 그녀에게 천용덕이 없는 유목형은 없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복수를 감행하는 천용덕을 바라보는 어린 영지의 두려운 표정을 기억하는가. 영지는 선악의 기준으로든 신과 인간의 기준으로든 유목형과 천용덕을 분리하려고 애쓴다. 유목형은 선한 아버지의 자리에 있고, 영지는 그걸 붙들기 위해 천용덕에게 몸까지 내준다. 또 하나의 장면. 영지가 천용덕의 요구를 들어주기 직전, 가게 밖에서 유목형과 영지는 시선을 교환한다. 그때 유목형은 천용덕이 영지에게 무슨 짓을 할지 감지했겠지만,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영지가 천용덕에게 유 선생을 구원자라고 일컬을 때는 유목형의 그 무력한 응시를 받은 뒤다. 무력한 구원자. 더이상 유목형이 자신의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를 구원자라고 부르며 천용덕의 요구를 수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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