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의 인디라마]
[김영진의 인디라마] 우리에게 눈물을 허했더라면
2010-09-09
글 : 김영진 (영화평론가)
박력있고 감동적이지만 센티멘털리즘이 부족한 <탈주>
<탈주>

이송희일의 두 번째 장편연출작 <탈주>는 근래 어떤 한국영화보다 분노의 수위가 높다. 분노 게이지가 처음부터 높게 설정된데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게이지는 더욱 올라간다. 이렇게 기진하게 만들 만큼 달려나가는 영화도 흔치 않을 것이다. 세 군인이 탈영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영화이니 만큼 시작부터 감정적 비등점이 높은 것은 당연하지만 그 이후의 탈주 행각을 좇으면서 감독 이송희일은 주인공들에게 거의 한번도 휴식의 순간을 주지 않는 것 같다. 영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아주 잠시 연인들의 꿈같은 휴식을 슬쩍 보여주지만 그건 파국을 앞두고 일종의 활시위를 뒤로 당기는 장치와 같다. 영화를 보는 관객도 주인공들의 심리적, 육체적 피로에 전염되어 거의 탈진할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영화를 대하는 정서적 반응이 이렇게 된 것은 당연하다. 탈영한 군인들이 쫓기는 과정에서 그들은 어떤 공식적인 장소에도 들러 쉬지 못한다. 그들은 인적이 없는 폐가나 철거건물, 길가, 숲 등을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을 뿐이다. 군과 경찰이 쫓고 있는 가운데 이는 현실적으로 개연성있는 설정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쉬지 않고 달리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특이한 것은 탈주영화이면서 서브플롯으로 주인공 중 한명인 일병 강재훈과 그의 연인 소영의 드러나지 않는 러브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다. 한때 대형마트에서 함께 일했던 사이인 이들이 연인 사이인지 어떤지 처음에는 잘 알 수 없다. 재훈이 소영을 누나라고 부르고 가급적 자신의 인생에 개입시키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재훈의 탈주 여정에 끼어든 소영은 재훈과 함께 나온 탈영병인 박민재 상병과 셋이서 끝까지 여정을 함께하려 한다.

소영은 관객이 이들 남자주인공에 동화되도록 안내하는 매개자 역할이기도 하다. 신경이 잔뜩 곤두서서 말끝마다 욕을 내뱉는 민재와 중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의 처지에 절망해 안으로 잔뜩 움츠러든 채 절망을 양식 삼고 있는 재훈에게 당장 우리가 공감을 표할 도리는 없기 때문이다. 처음엔 셋이 탈영했지만 그중 한 사람이 죽은 이후부터 남은 두 군인 젊은이에게 어떤 연대의 싹이 틀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들은 다 각자의 사정으로 다급하다. 재훈은 어머니가 곧 죽게 생겼지만 의가사 제대를 해주지 않다 탈영한 처지이고 민재는 군 상관으로부터 성추행을 지속적으로 당한 끝에 탈영했다. 이들의 피해의식은 남을 보듬을 여유가 없다. 소영은 그런 그들의 짜증스럽고 절박한 탈주 여정을 함께하면서 이들에게 거의 유일한 정신적 여유를 불어넣어준다. 가족만이 해줄 수 있을 듯한 충고, 그만두고 자수하자는 따위의 말이 그녀에게서 나올 때 재훈과 민재는 아마 누나나 육친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들이 탈주를 포기하지 않는 가운데 살인과 절도를 저지르면서 그들의 범죄 항목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돌이킬 수 없는 삶이 되는 것이다.

감독은 이들의 삶에 어떤 다른 감정을 개입시킬 의도가 아예 없었던 것 같다. 끝까지 질주하는 절망이라는 컨셉으로 끝까지 밀어붙인다. 이 영화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보게 되는 장면은 그들이 달리는 것, 차를 모는 것, 오토바이를 모는 것 등으로 추적자들에게 쫓기는 모습이다. 그들이 멈춤을 강요받았을 때 그들은 총으로 대들거나 아니면 멀거니 서 있는다. 그들이 멀거니 서 있게 되는 장면이 몇 차례 반복되는데 그때마다 우리에게 어떤 감정적 비등점을 짧지만 압축적으로 제공하는 순간이 있다. 이를테면, 경찰에 쫓기던 중 민재가 수풀 속에서 넘어지고 경찰이 달려오자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가만히 있을 때의 짧은 정적 같은 것이다. 또는 고향에 간 재훈이 어머니의 상가를 발견하고 무엇에 홀린 듯이 그쪽으로 걸어가다가 경찰과 군에 포위당했을 때 유령처럼 서 있는 장면이 주는, 흔히 맥이 탁 풀렸다라고 할 때의 그 무력감이 전이되는 순간의 느낌 같은 것이 기억에 남는다.

달림과 멈춤의 강렬한 리듬감

달림과 멈춤으로 구조화된 이 영화에서의 리듬감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는 듯한 고립감의 폐소공포증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강조한다. 두 남자와 한 여자의 탈출기로 축약되는 단순한 내러티브에서 달아나고 멈추는 과정의 반복적인 리듬은 미친 듯이 되풀이된다. 이것이 극적 굴곡이 약할 수밖에 없는 내러티브에서 격렬하게 치고 들어오는 유일한 감정의 고저상태를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그 앙상한 감정의 고저장단이 되풀이될수록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세상의 루저에 대한 우리의 무력감도 증가된다. 재훈과 민재는 분노하는 것밖에 다른 수단이 없었다고, 감독은 시각적 스토리텔링으로 강조한다. 그 분노는 동전의 양면이나 일란성 쌍둥이처럼 절망과 겹친 것이고 절망을 분노로밖에 형상화할 수 없는 그들의 처지에 관객인 우리도 갇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감독의 이런 선택을 존중한다. 일단 분노의 게이지를 충분히 올린 이상 그 극점을 화면으로 체험하게 해주겠다는 그 기개도 존중한다.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감정적 상실감을 맛보면서 이 시대를 함께 사는 그 지독한 공기를 다시 한번 확인한 것에 대해 끝이 없는 수렁에 빠진 듯한 마음을 갖는다. 동시에 영화 속의 운동감을 재현하느라 공을 들인 화면에서 알 수 있듯이, 독립영화로서는 적지 않은 자본이 들었을 이 영화의 대중적 균형감각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후회하지 않아>에서 멜로드라마의 화법으로 동성애의 깊은 지점을 파고 들어간 그 절묘한 균형감각과 비슷한 것을 말이다. 멜로드라마로 후비고 들어가지만 누구나 추상적으로만 대하는 동성애의 섹슈얼리티를 정면으로 들이대면서 우리로 하여금 외면할 수 없게 만든 이중적 겹침과 비슷한 것이 <탈주>에는 없다.

숨고를 프레임의 부재가 아쉬워

그게 꼭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취향문제가 아니라 이 영화에 센티멘털리즘이 지금 상태보다는 약간 더, 아주 조금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등장인물들의 감정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들이 점점 더 삶의 막다른 구석으로 몰리는 만큼 더 절실해지는 생의 감각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 더 있는 것이 개연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의 풍경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며 등장인물의 심상에로까지 밀고 들어오지 못한다. 배경으로서의 풍경만이 영화에서 보일 때 나는 이 영화가 근본적으로 모진 태도를 보이는 것 같지만 다소 경직된 것은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들었다. 꼭 더 많은 화면 배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풍경 속에서 사람들이 움직이고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것이 무척 인물 중심적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씩, 아주 조금씩이라도 우리가 숨을 고를 수 있는 프레임 배치와 연결이 있었더라면 더 긴 호흡으로 등장인물들의 비극을 다양한 감정의 주름을 잡으며 따라갈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무리한 지적이고 결례일 수도 있다. 이송희일 감독은 대신 영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밤장면의 공기를 통해 등장인물들의 심상을 시각화했다. 이처럼 많은 밤장면을 우직하게 밀어붙인 영화도 오랜만이며 그것이 일관성있게 시각적 패턴으로 배치된 영화로서 <탈주>는 감독이 생각하는 미학적 계산에 걸맞은 완성도를 이루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성취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힘들수록,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나 그 현실에 무심한 사람들까지도 슬쩍 동하게 할 수 있는 고리는 영화에 만들어두어야 한다고 본다. 대중적 타협이 아니라 인간적 결과물로서 이렇게까지 보여주는데도 동의하지 않겠느냐는 묘사적 방법론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할 것이다. 이송희일 감독의 연출력은 기개가 넘치며 앞으로도 더 좋은 영화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예감을 주지만 분노를 웃으면서, 또는 울면서 표현하기에는 직선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 영화는 끈질기게 질주하는 감성을 보여주지만 결국은 관객을 울게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사실 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며 울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 단호하게 끝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무척 슬프지만 그저 막막한 장면을 보면서 우리에게는 눈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이 박력있고 감동적인 영화에 대한 유일한 불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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