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 반경에 들어온 사람들을 몽땅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제 뜻대로 움직이는 초능력의 남자(강동원)가 있다. 세상이 온통 나 아니면 나의 복제품일 뿐인 이 남자에게, 나와 남을 분별해줄 이름 따위 없어도 그만이다. 아니, 실은 이름이 있다 한들 불러줄 이도 없다. 애초 낳아준 부모마저 두려워하여 없애버리려 했던 생명이다. 뭇 사람들은 초능력의 꼭두각시가 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므로, 초능력자는 애정은 고사하고 증오라는 감정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바스락! 그가 정지시킨 세상 구석에서, 누군가 꼼지락거리는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들린다. 초능력자의 힘이 통하지 않는 이 예외적 인간 규남(고수)은 그에게 시선을 되돌려주고 그를 외쳐 부른다. 절대고독의 성벽에 금이 가고 투쟁이 시작된다.
한쌍의 의인화된 관념 같은 존재
그러니까, 이건 다시 두 남자 이야기다. 남성 투톱은 한국 대중영화에서 제일 빈번히 마주치게 되는 인물 구도다. 그러나 <초능력자>가 설정한 두 인물의 관계는 특이하다. 초인과 규남은 직접 상대방을 겨냥하는 원수도, <영웅본색>적 의리로 맺어진 짝도 아니다. 영화가 반환점을 돌면 쫓고 쫓기는 입장마저 뒤엉킨다. 오히려 초능력자와 규남은 상대로 말미암아 비로소 자기 존재의 의미가 명확해지는 보완의 관계를 형성한다. 영화에서 초능력자가 규남을 향해 내뱉는 탄식이 이러하다. “넌, 내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텐데….” <초능력자>의 2인은 특정한 캐릭터에 고정된 개인이라기보다, 주어진 상황에 따라 상대적 위치를 바꾸는 한쌍의 의인화된 관념처럼 보인다. 주류사회의 아웃사이더라는 점에서 초능력자와 규남은 동류지만, 때에 따라서는 우중(愚衆)을 등에 업은 독재자 대(對) 무모한 투사의 그림을 만들고, 때로는 만나지 않으면 좋았을 비운의 ‘커플’로 마주서기도 한다.
<달콤한 인생> <괴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연출부를 거쳐 <초능력자>로 장편 데뷔한 김민석 감독은 “두 인물을 합쳤을 때 한 사람 같으면 영화 속의 싸움이 세상 속에서 혼자서 발버둥치는 느낌을 주지 않을까 생각했어요.”라고 소개한다. 물론 영화사상 버디무비가 적지 않았으니 이런 감독의 변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단, 자아를 분열하거나 복제해놓은 다음 그것과의 싸움을 통해 진짜 내가 누군지 자문하는 형식의 이야기는 김민석 감독에게 처음이 아니다. 그만큼 집착하는 주제란 의미다. 감독의 2004년 단편 <올드보이의 추억>은 현재를 방문한 과거의 자신에게 살해당하고 영원한 도돌이표를 사는 사내의 이야기였다. 에드가 앨런 포의 단편 <윌리엄 윌슨>을 연상시키는 이 이야기는 <초능력자>에서 확장 반복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추가된 결정적 변수는 SF적 요소다. 한데 <초능력자>는 초능력을 소극적이고 정적인 방식으로 구사한다. 일단 주인공의 초능력이 오직 다른 인간을 통해서만 발현되는 탓에 물리적으로 인력을 넘어서는 파괴력은 보여줄 수 없고, 둘째로는 초능력자가 살아가는 태도 자체가 방어적이다. 생활비가 떨어지면 필요한 돈만 전당포와 대부업체에서 훔쳐 살아가던 그는 규남이 도전해오자 장애물을 제거하겠다는 목적으로 비로소 ‘무리’하기 시작한다.
능동적인 욕망을 동기로 초능력을 행사하지 않는 강동원의 캐릭터는 거꾸로 왜 계속 살아가기로 했는지가 궁금한 인물이기도 하다. 김민석 감독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비범한 능력 때문에 부모마저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아이니까, 그럴수록 자기를 더 사랑하고 끈질기게 버텼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욕심이 없는 건, 벼락부자가 돈치레를 하지 날 때부터 부자인 사람은 도리어 안 그러지 않을까? 같은 이치로 태어날 때부터 초능력이 있는 사람과 갑자기 생긴 사람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원래 가진 능력인 만큼 수선스런 욕심도 없을 것 같았다. 한국의 보통 사람들이 사소한 규칙은 지켜가며 살 듯 그냥 쓸데없이 군중을 정지시켜놓고 새치기로 영화표를 산다거나 하는 일은 안 할 것 같았다.” 더불어 눈길이 가는 부분은, 초능력자가 어느 순간부터는 타인을 힘을 쓰는 수족으로 부리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는 말과 감정까지 대행시킨다는 점이다. 처연한 복화술사인 셈이다.
규남의 각별한 재능은 곧 초능력자의 결핍
한편 그의 대극적인 규남은 처음에는 그지없이 평범해 보이나 초능력자와 맞서기로 시작한 순간부터 잠재력을 점점 강하게 발현하기 시작한다. “규남은 욕심이 거의 없어서 항상 현재 상태를 기뻐하고 만족하는 유형이죠. 순수하면서도 뭔가를 초월한 인물, 넘어가는 인간이죠. 그런 성격을 신체적 특징으로 바꿔놓은 속성이, 상처를 빨리 회복하는 특별한 재생능력이나 빠르게 달리는 능력이죠.” 감독의 설명이다. 규남은 터키인 알과 아프리카에서 온 버바를 ‘형제’라고 부르고 알과 버바는 “우리 같은 놈들”이란 말로 삼총사를 자칭한다. 즉 국적보다는 계급이 중요하다(물론 여기서 알과 버바가 온전한 타자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한국인화된 캐릭터라는 점은 간과해선 안될 중요한 지점이다). 나아가 규남은 생면부지의 남을 돕는 데에도 주저하지 않는다. 초능력자와 규남은 둘 다 서로로 인해 진화하지만 그 폭은 규남이 훨씬 크다. 심지어 김민석 감독은 초능력자에게 홀려 좀비처럼 움직이는 군중을 비집고 규남이 간신히 빠져나오는 지하철 플랫폼 장면을, 산도를 막 벗어나는 신생아의 모습처럼 찍고 싶었다고 말한다.
영화의 시나리오에서 초인은 초능력자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하지만 구상 단계에서 김민석 감독이 영감을 받았다는 니체의 개념 초인(超人 U(위에 ''표시)bermensh)을,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여러 경계를 초월하는 인간으로 해석한다면, 규남이야말로 초인이다. “규남과 섞이는 친구들은 다 독특해요. 흑인 버바, 아랍인 알, 혼혈인 영숙 등등. 그들은 한국사회에 평범하게 섞일 법한 사람들은 아닌데 영화에서 한데 어우러져요. 그들 모두가 한때를 같이 보내는 전당포 사무실 이름은 ‘유토피아’잖아요. 사실 각기 다른 인종의 캐릭터를 통해 인류를 표현하려는 의도도 있었어요. 규남은 친구를 사귈 때 사회적인 구분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 종류의 사람이에요.” 규남의 각별한 재능은 곧 초능력자의 결핍이다. 그는 군중에 간절히 섞이고 싶어하지만 섞일 수 없다. 영화 도입부 수족관에서 정어리떼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도, 금방이라도 대기 속으로 스며들 것 같은 엷은 회색 옷차림도 세상에 녹아들고 싶은 열망의 표현이다. 초능력자는 거처로 삼는 호텔 방에 틀어박혀 서울 거리 모형 안에 본인의 피겨를 만들어 넣는다. 인형은 그가 현실에서는 결코 입지 않을 밝은 빨강색 옷을 입고 한손을 들어 세상에 쾌활한 인사를 보낸다. 섞일 수 있는 규남은 사람을 살리려 하고 섞일 수 없는 초능력자는 죽이기를 서슴지 않는다. 표면적으로 이 두 방향의 힘은 척력인 양 보이지만 비범한 힘을 가진 두 인물은 서로 다른 이유에서 어떤 사물에, 혹은 누군가에 기대는 이미지를 보여주며, 그것은 영화에서 꽤 인상적인 순간을 만든다. “둘은 모두 특별한 인물이지만 결함을 부여해서 기대게 하고 싶었어요. 사람이 사람에 의지하고 기대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거든요. 우리는 물이 가득 찬 잔 같아서 조금만 기울어져도 물이 쏟아질까봐 누구한테 잘 못 기대잖아요.”
불완전한 틈새에서 당신이 보게 될 것은
<초능력자>는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품은 캐릭터를 창조했지만 그들을 영화적으로 움직이는 연출 방식은 결코 능란하지 못하다. 머물러야 할 장면을 서둘러 마무리짓는가 하면 긴박감을 조성해야 할 고비에는 발이 무겁다. 서스펜스와 액션의 긴장을 조성하는 손끝도 투박하다. 확실한 동기를 부여하고 캐릭터를 세공해야 할 지점에서 초점이 흐릿해지고 서사가 도약해야 할 순간에 둔감하다. <초능력자>는 스타의 팬덤과 결합해 불완전한 틈새를 관객이 상상과 감흥으로 메워가며 보는 영화가 될 공산이 크다. 그럼에도 <초능력자>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것은 고독하게 웅크린 초인과 집요하게 매달리는 규남이 당신 안의 두 얼굴이기 때문이다. 나는 개별적이고 유일무이한 존재이며 얼마쯤 외롭다고 믿는 당신, 그래서 세상을 완강히 밀쳐내는가 하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악착같이 사랑하기도 하는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