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나도 당연히, 다른 그 누군가처럼, 내 귀를 의심했다. 곡사가 CJ의 투자를 받는다고? 그렇게 큰 규모의 상업 장편영화를 찍는다고? 아이돌 함은정이 출연한다고? 게다가 아이돌에 대한 호러라고? 가장 먼저 머리를 스쳐간 건 이 요소들이 가장 안 좋은 방식으로 결합했을 때의 아주 전형적인 그림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온갖 종류의 편견이 작용한다. 아이돌, 자본, 한철 장사로서의 호러, 무엇보다 이들과 충돌하는 ‘곡사’의 상징성. 약간의 삐딱한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게다가 이건 장편이다. 아무리 곡사의 영혼이 거침없다 해도 제약과 한계가 뚜렷해 보이는 상황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하지만 시스템에 대한 무력한 타협이 아니라면 이 어울리지 않은 조합은 그동안 우리가 보지 못했던 매혹적인 괴물의 출현을 가능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나는 결국 걱정보다는 기대를 택하기로 했다. <고갈>과 <방독피>를 지나 무엇이, 어떤 호기심이 쌍둥이 감독들을 지금 이 자리로 불러왔을까.
곡사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상이한 영화는 옴니버스 인권영화 <세 번째 시선>에 수록된 단편 <Bomb! Bomb! Bomb!>이다. 곡사의 작품 중에서는 그나마 상업영화에 속하지만, 엄밀히 말해, 인권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상업’이라는 말보다는 곡사의 표현대로 “정규 극영화”로 구별되는 편이 더 어울린다. 6개월 전, 독립영화감독들의 인터뷰집을 만들기 위해 김곡과 인터뷰를 하던 중, 그는 곡사의 작업방식을 세 종류로 나눠 설명했다. 맞춰놓은 그림대로 작업하는 경우, 이미지의 배열을 예상하는 지도의 역할로서 시나리오를 쓰는 경우, 완전히 이미지로만 지도를 그리는 경우. 하지만 그는 이 세 방식이 완전히 분리될 수 있다고 여기거나 여기에 어떤 위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이 세 방식 사이에 명확한 경계를 긋고 하나의 가치를 절대화하며 나머지를 게토화하는 영화계의 편견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했다. 어쨌든 그때 그는 첫 번째 경우를 따르는 <Bomb! Bomb! Bomb!>에 이어, 곧 촬영에 들어갈 상업장편이 곡사의 두 번째 정규 극영화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 영화의 제목이 바로 <화이트>다. 촬영현장 방문을 앞두고 받아본 <화이트>의 두툼한 콘티북은 한치의 즉흥성도 차단하겠다는 듯, 무척 꼼꼼하게 계산되어 있었다.
우선 <화이트>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걸그룹 ‘핑크돌즈’는 네명의 여성 멤버 은주(함은정), 신지(메이다니), 제니(진세연), 아랑(최아라)으로 이루어져 있다. 멤버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은주는 백댄서 출신으로 동생들에게 사사건건 왕따를 당한다. 다른 그룹에 비해 실력도, 인기도 뒤처진 핑크돌즈. 더 내려갈 곳이 없던 이들이 심기일전하기 위해 새로운 연습실로 옮기고, 그곳에서 우연히 ‘화이트’라는 라벨이 붙은 주인 없는 비디오 테이프를 발견한다. 낡은 테이프에 녹음된 노래와 안무를 변주해 신곡을 발표한 핑크돌즈는 예상치 못한 인기를 얻고, 멤버간의 메인 경쟁도 뜨거워진다. 그러나 이때부터 ‘화이트’의 저주가 시작된다. 핑크돌즈의 멤버들이 하나씩 불분명한 이유로 사고를 당하거나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가자, 결국 은주 홀로 활동하게 된다. 자신에게도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라고 예감한 은주는 ‘화이트’에 얽힌 비밀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이런 뼈대만 놓고 보면, 왠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이돌이 출연한 영화는 많았어도, 혹은 <꽃미남 연쇄테러사건>류의 팬픽무비는 본 적 있어도, 아이돌의 세계를, 그것도 환상을 거둬낸 호러로 다룬 영화는 없었다. 이 이야기가 낯설지 않다면, 그건 우리가 아이돌 세계의 환상뿐만 아니라, 그 세계의 추악한 이면 또한 소비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촬영장으로 향하는 길에, 나는 처음으로 아이돌과 곡사의 만남이 의외의 조합이 아니라, 어쩌면 언젠가 한번쯤은 만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조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곡사는 분명 이 시대 자본의 한가운데에 던져진 아이돌의 운명에서 껍데기만으로 이 세상을 견뎌내는, 자신들이 줄곧 다뤄온 짐승들, 혹은 마리오네트들의 면면을 보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