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7일, <화이트>의 촬영지는 광나루역 부근의 공연장, 악스 코리아. 8월5일에 크랭크인해서 어느덧 촬영은 38회차에 접어들었다. 내가 방문한 날은 <화이트> 후반의 클라이맥스가 담긴 신을 찍은 지 4일째 되는 날이다. 콘티상으로 컷이 무려 124개나 되는 이 신은 솔로로 인기를 얻은 은주가 ‘화이트’로 마침내 1위에 오르고, 급속도로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는 장면이다. 은주와 백댄서들의 화려한 공연과 관중의 열광적인 환호뿐만 아니라 화이트의 스펙터클한 저주의 폭발이 모두 담겨야 한다. 통제해야 할 상황도, 지도할 사람들도, 의외의 변수도 배로 늘어난 위험하고 고달픈 신이다. 공연장에 들어서자 마침 무대 아래에서 보조출연자들이 리허설을 하고 있고 인파 틈으로 하얀 가발을 쓴 은정의 가녀린 실루엣이 보인다. 예상보다 차분한 분위기다. 보조출연자들 바로 옆에서 조감독과 함께 김선이 세심하게 연기 지도를 하고 있다. 김곡은 무대 저 멀리서 모니터를 통해 상황을 관찰하다가 틈틈이 무대쪽으로 내려와 김선과 의견을 교환한다. 김선이 연기, 분장 등 배우와 관련된 일들을 맡아 카메라 앞과 뒤를 오간다면, 김곡은 촬영, 미술, 조명 등 카메라와 관계된 일들을 담당하며 뒤에서 전체를 보고 있다. 확실한 분업체제는 어쨌든 효율적으로 보였다. 실제로 김곡과 김선 사이에 오케이 컷이 다른 경우가 종종 눈에 띄었으나 실망스럽게도(!) 의견의 조율은 고요하고 쉽게 이루어졌다.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동안 몇 차례 둘 사이에 의견 대립으로 인한 싸움이 있었고, 김곡 역시 “의견이 안 맞을 때는 현장에서 욕을 해요. 서로 힐난하는 거지요. 그래서 의견이 안 맞을 상황은 일부러, 미리 피하려고 해요”라고 말하지만, 이들이 다년간의 공동작업을 통해 그 상황을 넘기고, 다시 어깨동무를 하고 나타나는 법 또한 누구보다 잘 터득하고 있음은 의심할 나위 없다.
이날 촬영의 핵심은 다른 무엇보다도 방청석의 반응을 극대화하는 일이었다. 때마침 중·고등학교 중간고사 기간이어서 방청석을 메울 보조출연자들이 도착하는 속도가 더디다. 무대 위에서 조감독이 이층 방청석에 앉은 200여명의 보조출연자들을 향해 그들이 지금 맞닥뜨린 상황이 어떤 건지 말로 설명하면서 반응을 이끌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조감독의 “자, 화이트!”라는 외침에 맞춰 피켓과 풍선을 든 방청객이 쿵쾅거리는 사운드에 맞춰 들썩인다. LED 전문 디자이너가 공들여 설치한 조명이 어두운 객석 위를 번쩍번쩍 비추는데, 화려하면서도 불길한 기운이 감돈다. 연출부보다 미술팀이 먼저 꾸려진 이 영화에서 팬시한 반짝임과 어두움의 대비는 아이돌과 공포의 접목을 시각화하기 위해 다른 무엇보다도 영화적으로 공들인 요소다. 곡사 역시, 아이돌에 대한 이들의 관심을 의아해하는 내게 이런 답 메일을 보내왔다. “아이돌은 반짝인다. 곡사는 언제나 반짝임을 사랑해왔다. 반짝이는 것에는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아이돌의 반짝임은 화려함과 비천함, 상승과 하강, 공중부양과 추락을 모두 가지고 있다. 대중은 사실 전자뿐만 아니라 후자도 즐긴다.” 세상의 모든 반짝이는 것들의 슬픈 운명. 여러 대의 모니터로 카메라의 위치와 보조출연자들의 표정을 살피던 김곡이 느끼한 DJ의 음성으로 관중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하지만 얼마 뒤, 열광이 공포로 바뀐 상황을 상상하며 전혀 다른 반응을 끌어내야 하는 보조출연자들은 아무래도 어색한지, 웃음을 참지 못해서 몇 차례의 NG가 거듭되었다. 각 카메라의 몇 번째 컷을 쓸 것인지, 전날 촬영분과의 노출, CG 소스가 맞는지, 감독과 스탭 사이에서 즉각적인 확인이 이어진다. 고작 두어 시간 지켜봤을 뿐인데도 온몸에서 기가 다 빠져나간 것 같다. 촬영장을 막 나서려는데, 두엔터테인먼트의 최두영 대표가 전날 촬영분의 현장 편집본을 살짝 보여주었다. 무대 위에 주저앉은 은주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무언가를 돌아보고 있는데, 그 분위기가 무섭다기보다는 부서지는 유리처럼 어딘지 처연해서 연민을 불러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