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따뜻해졌던 날씨가 다시 추워지니 적응하기 어렵다. 체감되는 한기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건 마음속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다. 최고은씨의 싸늘한 죽음이 자아내고 있는 이 냉습한 기운은 영화계를 넘어 한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듯하다. 그의 유언이 되고 만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라는 쪽지의 문구는 북풍한설처럼 자꾸만 마음속 문을 열고 들어와 돌개바람을 일으킨다.
최고은씨의 죽음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논의에 앞서 우리가 취할 태도는 일단 젊디젊은 한 예술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리라. ‘포스트 최고은’에 관한 논의는 그가 생전에 겪었을 고통을 떠올리며 그 영혼의 위안을 기원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만들었던 단편영화 <격정 소나타>를 보거나 그의 이름을 몇번씩 되뇌는 것도 좋을 터. 그 죽음의 근원을 따지지 말자는 말이나 그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외려 더 독하게 마음먹어야 한다는 소리다.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이 격한 추위와 슬픔을 시간이 지난 뒤에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절대로.
스산한 마음을 잠시 접고 생각해보면 최고은씨의 죽음은 예고된 바나 다름없다. 한국 영화계는 흥청망청의 2000년대 초·중반을 지나보낸 뒤 2007년, 2008년부터 자본 위기를 겪기 시작했다. 영화자본의 힘은 이전보다 강해진 정도가 아니라 거의 절대권력이 됐으며 현장은 자본의 ‘효율화’ 요구에 따라 쪼그라들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게 스탭, 그중에서도 영화계에 들어온 지 오래 되지 않은 스탭들이었다. 이들은 ‘지금은 상황이 어려우니까 조금만 참아달라’는 요구에 따라 말도 안되는 조건임에도 영화현장에 몸을 내던졌다. 아니 내던지고 있다. 영화산업노조를 중심으로 한 스탭들의 처우개선을 위한 노력 또한 이 축소 일변도의 거센 논리 속에서 묵살돼왔다. 자본의 그런 가혹한 논리를 한국영화계 공멸의 위기라는 상황에서 나온 임시방편으로 간주한다 해도 지금 이 시점부터는 영화계의 악화된 환경을 ‘정상화’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돼야 한다. 물론 소수 자본이 영화계 전반을 독점하고 있는 현재와 같은 구조에선 쉽지 않겠지만, 이를 더이상 미룰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자명하다.
곧 영화계 시스템 개선, 실업부조제 등 사회복지망 확충 같은 논의가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 논의가 확대 발전되는 것을 원치 않는 쪽이 있다는 게 드러날 것이다. 당분간은 최고은씨의 죽음이라는 충격파를 고려해 침묵하겠지만 영화계 환경 개선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된다면 이들은 강력하게 저항할 것이다. 최고은씨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면서 독한 마음을 먹어야 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P.S. 주말에는 한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주변 사람들을 챙겨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