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스터스 컷을 만들어보고 싶다”
지난 95년부터 <반지의 제왕>의 영화화를 위해 동분서주했던 감독 피터 잭슨이 이제 3부작의 촬영을 모두 마치고, 그 1부의 뚜껑을 열었다.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의 개봉에 즈음해 뉴질랜드를 시작으로, 유럽 미주지역 투어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피터 잭슨과 서면으로나마 짧은 만남을 가졌다. 이 인터뷰는 <씨네21>과의 서면 인터뷰, <팡고리아>와의 인터뷰 기사를 종합 정리한 것이다.
-당신은 원래 <반지의 제왕>의 팬이었다고 하던데, 처음 책을 읽은 것은 언제였나. <반지의 제왕>이 처음 당신에게 주었던 느낌이나 감동은 무엇인가.
=18살에 처음 원작소설을 읽은 뒤로, 나는 그 책을 항상 내 방 가까이 간직해뒀다. 그건 현실인 동시에 환상이었고, 그 자체로 완벽한 하나의 세계였다. 처음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 책을 펼칠 때마다 난 늘 흥분이 된다. 하지만 이걸 영화로 만들 수 있으리라고는, 그것도 내가 직접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반지의 제왕>은 출간된 지 50년이 넘는 작품이다.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으로 남은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연하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반지의 제왕>은 고전으로 읽힐 것이다. 내가 영원히 팬으로 남는 것처럼,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의 우리 후손들도 이 책을 읽고 나서 밤새 잠 못 이루며 방안을 서성거릴 거다. 그것이 이 책의 절대적인 힘이다.
-<반지의 제왕>을 영화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된 것인가. 프로덕션에 착수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하는데.
=내 소망은 판타지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킹콩>이나 <신밧드의 모험> 같은 영화를 보고 자랐고, 그런 괴물들이 나오는 판타지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프라이트너>를 만들면서, 각종 CG를 동원해봤고, 이제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곧장 <반지의 제왕>의 판권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판타지영화로 만들기에 더없이 완벽한 소설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반지의 제왕>의 애니메이션판인 78년작 <반지>를 제작한 사울 자엔츠가 판권을 갖고 있었는데, 미라맥스의 하비 와인스타인이 그와 친밀한 관계라서, 설득과 협상 끝에 판권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미라맥스는 3부를 동시에 제작하자는 나의 아이디어에 반대했고, 결국 3부작 제작을 흔쾌히 지지한 뉴라인과 함께 일하게 된 것이다.
-제작발표 당시, <반지의 제왕>과 어울리는 감독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이 프로젝트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면, 어떤 측면에선가.
=내가 특수효과를 좋아하고 테크놀로지에 익숙한 사람이라는 점일 것이다. 판타지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감독이 특수효과에 겁먹지 않고 덤벼들 수 있다는 것. 그것으로 프리프로덕션의 상당부분이 커버됐다. 또한 <피블스> 시절부터 나와 함께 일한 리처드 테일러와 그의 팀 웨타가 특수효과를 전담한다는 데 대한 믿음과 자신감도 있었다.
-<반지의 제왕>에 대해 영국의 <가디언>은 ‘완벽한 장르영화’라는 표현을 썼다. ‘장르영화’라는 것에 동의하는가.
=그건 평론가의 일이다. 나는 <반지의 제왕>을 만들었을 뿐이다.
-원작에 아주 충실하다. 당신의 선택인가. 아니면 톨킨 마니아들을 위한 타협인가.
=원작과의 비교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했지만, 모두들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에 유난히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 같다.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곤 하는데, 그들 대부분이 원작과 다른 부분을 찾아내려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해 실망한 듯한 눈치다. 난 내가 생각하는 <반지의 제왕>을 만들었다. 내 기준에서, 내 안목으로. 나는 디테일들에 나름의 표현을 했다. 결과적으로 원작에 충실한 작품이 나온 것을 보면, 내 안에 원작소설이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가보다.
-<반지의 제왕>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이 있다면.
=모르겠다. 문득 떠오르는 것은 오크들의 전투장면. 그건 정말 대단한 작업이었다.
-<반지의 제왕>의 어떤 부분이 ‘피터 잭슨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영화에 당신의 전작들과 통하는 어떤 일관된 특징 같은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건 잘 모르겠다. 난 스스로에 대한 분석과 판단에 서툴다. 다만 영화를 만들면서도 스타일에 대해서는 크게 의식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그때 어떻게 찍고 편집하고 연기 지시를 할지에 대해 생각할 뿐이다. 일관성에 대해 고민한 적은 없지만, 돌아보면 어떤 공통된 취향과 감수성이 드러나는 것 같다. 전작들이 겹쳐 떠오르는 그런 정도. 작품을 만들 때마다 전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는 없지 않은가. <반지의 제왕> 역시 다른 작품을 봤을 때처럼, 내가 만든 영화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언젠가 내가 만든 영화가 낯설어지면, 그 영화는 피터 잭슨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반지의 제왕>은 어려운 작품이다. 궁극적인 테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려웠나? 절대권력, 소년의 성장, 이런 거 아닐까? 테마는 영화 만들기 전부터 영화를 만든 지금까지, 생각할 때마다 바뀐다. 그래서 이 작품이 지난 50년간 꾸준히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반지의 제왕>을 연출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이 있었다면.
=가장 큰 어려움은 50년 넘게 사랑받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읽힐 위대한 소설을 ‘내가’ 영화로 만든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항상 그것을 생각하며 신중을 기했다. 그래서 3편을 동시에 만들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큰 영화를, 그것도 3편을 동시에 연출한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처럼 느껴진다. 어떤 면에서 효율적이고 또 비효율적이던가.
=3편을 동시에 만든다는 건 정말 멋진 결정이었다. 난 그 수많은 스탭들과 끝까지 함께하길 원했다. 만약 1편만 만들 계획이었다면, 우린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3부작을 동시에 제작하는 시도에는 일장일단이 있었던 것 같다. 캐릭터와 에피소드를 넉넉하고 풍성하게 펼쳐 넣을 수 있는 반면, 세편의 시나리오를 동시에 쓰고, 세배의 브레인스토밍과 세배의 노동을 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촬영은 순탄했지만, 무척 고된 시간들이었다. 그 기나긴 마라톤에서 우리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치지 말아야 했다. 감독의 입장에선 좋은 점도 있었다. 대개의 영화작업이 10주나 15주 찍는 게 보통이지만, 우린 최고 15개월까지 같이 일했기 때문에 서로를 잘 알게 됐고, 커뮤니케이션이 잘됐다. 촬영이 없을 때도 같이 어울려다니는 등 좋은 친구 사이가 됐다.
-전작의 표현 수위에 비추어 이번 영화는 무난한 편인데, 디렉터스컷을 만들 계획은 없나.
=스튜디오에서 허락한다면, 디렉터스컷을 만들어보고 싶다. 처음부터 PG13등급을 목표로 만들었기 때문에 특별히 잔혹한 장면은 없지만, 편집중에 잘려나간 전쟁신을 추가하고 싶다.
-할리우드에서 다시 뉴질랜드로 돌아왔는데, 계속 뉴질랜드에서 영화를 만들 것인가.
=물론이다. 하지만 영화는 어디에서도 만들 수 있는 거 아닌가.
-당신의 공포영화는 늘 코미디이기도 했다. 공포 안에 웃음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가.
=웃음과 공포는 형제와 같다. 일상을 돌아보라. 우리 삶에 웃음과 공포가 없었던 적이 있는가? 오늘 공포에 휩싸였다 치자. 내일 그 공포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거다.
-<킹콩>의 제작 포기는 정말 아쉬운 일이다.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킹콩>은 내가 어린 시절 열광한 최고의 영화였다. 지금도 그 영화의 장면, 대사가 눈에 선하다. 이 프로젝트는 열정적으로 시작됐지만 현실화는 쉽지 않았다. 제작이 안 된 이유는 간단히 말하기 어렵다. 킹콩이 아직 수줍음이 많아서가 아닐까. <킹콩>은 본래 <고질라> <마이티 죠 영>과 나란히 공개될 예정이었는데, 비슷한 괴수영화끼리 겨룬다는 데 대해 유니버설사가 부담을 느낀 듯했고, 곧 제작을 철회했다. 제작을 하게 될지 아닐지는 판권을 갖고 있는 그들이 결정할 일이다. <반지의 제왕>이 흥행에 성공하면, 누군가가 다시 검토해주지 않을까. <킹콩>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이고, 특별한 인연이 느껴지는 프로젝트다. 손질이 필요하긴 하지만, 써놓은 시나리오도 맘에 들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에 대한 오마주를 바칠 기회를 기대하는 것이다.
-<반지의 제왕> 3부작을 마무리한 뒤의 계획은.
=어떤 프로젝트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다음 작품의 아이디어가 많이 떠오르는 편인데, 지금도 몇 가지 아이템이 있다. <천상의 피조물들>의 기둥 줄거리에 실화를 덧붙인 스토리를 생각중이다. 판타지물을 오래 붙들고 있다보니, 현실의 이야기가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스플래터영화, 좀비영화, 게릴라식 프로덕션을 경험하고 싶다. 혼자 힘으로 제작비를 마련하고 주말 동안 후딱 촬영할 수 있는 그런 영화들. 스튜디오는 개입하면 할수록 만족할 줄을 모른다. 모두가 초긴장상태에서 간섭하고 또 간섭한다. 거대 예산에 특수효과가 듬뿍 쳐진 블록버스터영화의 감독으로 남고 싶진 않다. 친구 몇몇과 며칠 동안 만드는 작은 영화에서도, 나는 똑같은 기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