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피터 잭슨의 영화세계 [1]
2002-01-03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너는 웃지, 내 손바닥은 아직도 피로 끈적거려

뉴질랜드는 영화불모지가 아니다.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지만, 최초의 유성영화와 컬러영화는 뉴질랜드에서 탄생했다는 주장도 있다. 뉴질랜드 출신의 피터 잭슨이 95년 만든 다큐멘터리 <포가튼 실버>는 뉴질랜드영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콜린 매켄지의 업적을 재평가하고 있다. <포가튼 실버>에서 밝혀지는 매켄지의 업적은 한둘이 아니다. 유성영화와 컬러영화의 시작은 물론 전성기의 할리우드를 능가하는 거대한 세트장을 세웠고, 몰래카메라 기법을 발견했는가 하면, 매켄지의 친구는 라이트 형제보다도 빨리 비행기를 공중에 띄웠다고 한다. 그게 정말일까?

물론 사실이 아니다. <포가튼 실버>는 가짜 다큐멘터리(fake documentary)다. 가짜 밴드의 기록을 담은 것처럼 위장한 로브 라이너의 <이것이 스파이널 탭이다>처럼, 콜린 매켄지라는 가상 인물의 업적을 희극적으로 조작한 영화다. 그러니까 <포가튼 실버>는 역사적 사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냥 우스갯소리일 뿐이다. 전혀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하지만 <포가튼 실버>를 보고 있으면, 피터 잭슨의 영화가 무엇인지는 단번에 감이 온다. 풍자와 농담, 새로운 세계의 창조, 만화적인 과장과 왜곡 등등.

어쩌면 그건, 피터 잭슨이 하필 할로윈에 태어난 때문일지도 모른다. 피터 잭슨은 1961년 뉴질랜드 웰링턴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작은 해안 마을(<고무인간의 최후>의 무대가 되는 바로 그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수퍼 8mm 카메라를 사온 8살 때부터, 피터 잭슨은 카메라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보통 사람들처럼 가족의 일상이라든가, 멋있는 풍경 같은 것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하지만 피터 잭슨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스톱모션으로 움직이는 인형과 괴물들이 싸우는 <썬더버드>와 레이 해리하우젠의 <신밧드의 대모험>이나 <이아손과 아르고호의 모험> 같은 ‘이상한’ 영화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찍기로 결심한 피터 잭슨은 마당에 구멍을 파고, 인형을 이용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활용한 단편영화들을 만들었다. 그중 한편의 제목은 <드워프 패트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에 매혹된 피터 잭슨은 단순히 카메라를 잡고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과 벌어지는 사건을 찍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특수효과’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셀룰로이드 필름에 펀치로 구멍을 뚫어 총알이 실제로 발사되어 관통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레이 해리하우젠 스타일로, 도시를 파괴하는 괴물이 등장하는 단편을 지역 단편영화 콘테스트에 출품하기도 했지만, 안타깝게 우승은 하지 못했다.

<피블스>의 국제적 성공, 마침내 좀비영화로

웰링턴의 <이브닝 포스트> 신문사에 취직한 피터 잭슨은 감독이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당장 영화사에 취직하거나 할리우드로 가는 대신, 독립영화를 만들었다. 피터 잭슨의 데뷔작인 <고무인간의 최후>(1987)는 제작, 감독, 주연, 각본, 편집, 분장. 특수효과 등 혼자서 거의 모든 것을 담당한 ‘자주 영화’였다(라텍스로 만든 괴물은 피터 잭슨이 자신의 집에 있는 오븐으로 직접 만들었고, 그 때문에 식구들은 요리를 못해 소시지로 식사를 때우기도 했다고 한다). 당연히 저예산이었고, 친구들과 지역주민들이 대거 출연했다. 영화의 3/4 정도가 완성되었을 때 피터 잭슨은 뉴질랜드 필름커미션으로 갔다.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면서 기금을 요청했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뉴질랜드 필름커미션은 이후 피터 잭슨의 훌륭한 후원자가 된다. 4년에 걸쳐 완성된 <고무인간의 최후>는 칸영화제로 향하여 비평가와 관객의 호평을 받은 뒤 세계영화제를 순회하게 된다. 친구들 사이에서 농담처럼 시작된 영화가, 컬트의 고전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고무인간의 최후>는 외계에서 온 괴물과 싸우는 영웅 데릭의 싸움을 그리고 있다. 바닷가의 휑한 마을에서, 비적비적대는 괴물과 싸우는 데릭의 모습은 실소를 자아낸다. 아무리 봐도 지구를 지키는 ‘영웅’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피터 잭슨의 잔혹한 유머와 도발적인 특수효과는 <고무인간의 최후>를 즐거운 코미디로 끌어간다. 그건 로베르토 로드리게즈의 영화에서 받는 느낌과 비슷하다. 자신의 ‘펄프’ 감각을 그대로 영상으로 옮겨내는 독특한 화법이 그들의 영화에는 존재한다. 정돈되지 않았지만 생기가 돌고, 자극적이지만 유쾌한 그들만의 박력이 강렬하게 느껴진다. 한편의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다방면의 기술을 직접 익힌다는 점도 비슷하다. <고무인간의 최후>에서 거의 전 분야에 통달했던 피터 잭슨은 <피블스>에서는 인형 제작과 일부 촬영을 직접 했고, <데드 얼라이브>에서는 시각효과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담당했다. 할리우드에 가서는 로버트 저메키스의 <콘택트>의 시각효과 일부를 맡기도 했다.

<고무인간의 최후>로 명성을 얻은 피터 잭슨은 시나리오 작가인 프랜시스 월시를 만나고, 계속 공동작업을 하는 것은 물론 가정까지 함께 꾸리게 된다. 다음 작품은 샘 레이미의 <이블 데드>와 스튜어트 고든의 <좀비오>를 본 이후로 언제나 꿈에 그리고 있던 좀비영화였다. 일본과 스페인에서 투자자를 구하고, 뉴질랜드 필름커미션에서 제작비 일부를 지원받기는 했지만 여전히 제작비가 부족했다. 그래서 좀비영화를 미뤄두고, 다른 시나리오를 썼다. 엉망진창의 ‘퍼핏 쇼’인 <피블스>(1989). ‘인형들이 나와서 익살을 부리고, 춤과 노래를 선보이다가 백스테이지로 돌아가면 어떻게 될까? 그들도 인간과 똑같은 짓을 하지는 않을까?’ 마약과 도박과 섹스를 하고, 서로의 약점을 캐며 음모를 꾸미고, 때로는 살인도 저지르고. <피블스>는 인형극으로 만들어진 엄청나게 잔인하고, 엽기적인 코미디영화다. ‘하드고어’의 진수를, 인형을 통해서 보여준다. <피블스> 역시 해외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고, 피터 잭슨은 마침내 좀비영화의 제작비 마련에 성공한다.

<데드 얼라이브>(1992)의 원제는 <브레인데드>. 그런데 미국에서는 이미 <브레인 데드>라는 제목으로 나온 비디오영화가 있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데드 얼라이브>라는 제목으로 개봉하게 되었다. 좀비영화의 대표작인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집안으로 들어오려는 좀비들과 맞서 싸우는 사투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데드 얼라이브>는 반대다. 이상한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는 원숭이에게 물린 어머니는 좀비가 된다. 좀비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지만, 오히려 문제는 점점 더 커진다. 막으면 막을수록 문제는 커지고, 이웃에 알리지 않기 위해서 모든 걸 틀어막을수록 구멍은 커진다. 이것 역시 좀비영화의 전형적인 주제의 하나다. 자신이 사랑하는 누군가가 좀비가 될 위험에 처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좀비가 될 것이라고는 절대 믿지 않는다. 좀비가 되어도 절대 자신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두에게 그런 위험을 철저하게 감춘다. 그 결과로 모두 위험에 처한다. 피터 잭슨은 좀비영화의 전형적인 주제에 히치콕의 <사이코>를 절묘하게 뒤섞으며 <데드 얼라이브>를 스플래터영화의 절정으로 밀어붙인다. 괴상한 원숭이에게 물린 손을 자르고, 머리를 절단하는 섬뜩하면서도 유쾌한 오프닝에 이어, 어머니가 좀비로 변해가며 저지르는 갖가지 구역질나는 사건들은 90년대의 유행인 화장실 유머의 전조곡이었다. <데드 얼라이브>의 클라이맥스인 잔디깎이로 수십명의 좀비를 갈아버려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광경은, 공포영화만이 아니라 코미디영화사에도 남을 명장면.

<천상의 피조물들>의 판타지, 반지 시리즈로 이어지다

<데드 얼라이브>가 미국에 선보인 뒤 피터 잭슨은 <나이트메어> 속편의 시나리오를 써보라는 제의를 받는다. 반색한 피터 잭슨은 당장 작업에 착수하여, 스스로도 만족스러운 시나리오를 들고 뉴라인 영화사에 찾아갔지만 이미 그들은 다른 시나리오로 제작에 들어간 뒤였다. 실망한 피터 잭슨은 50년대 뉴질랜드를 떠들썩하게 했던 소녀들의 모친 살인사건을 영화로 만든다. 영국에서 전학온 줄리엣은 글쓰기에 재능이 있는 소녀 폴린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성장배경이나 성격은 전혀 다르지만, 두 소녀는 누구도 끼어들 수 없게 가까워진다. 하지만 가정에서는 그들이 동성애에 빠졌다고 생각하여 떼어놓으려고 한다. <헤븐리 크리쳐스>(1994)는 피터 잭슨의 재능이 단지 기발함에서만 연유한 것이 아님을 입증한 영화다. <헤븐리 크리쳐스>는 멜로와 판타지, 공포영화, 사회극, 심리 드라마 등이 유려하게 얽혀 있다. 모든 캐릭터는 감정의 변화가 순식간에 느껴지도록 섬세하게 그려지면서, 발작적으로 분출하는 순간적인 광기의 번득임도 놓치지 않는다.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져 있었을 때 받은 상처를 감추기 위한 의식적인 도발과 당당함을 표현하는 줄리엣의, 현실에서의 날선 줄타기를 표현하는 케이트 윈슬럿의 연기는 눈이 부시다.

<헤븐리 크리쳐스>는 피터 잭슨의 영화 중에서, ‘사실’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질적이다. 하지만 <헤븐리 크리쳐스>에서 실제의 사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폴린과 줄리엣이 나눈 ‘상상’이다. 폴린과 줄리엣은 전형적인 ‘드래곤 앤 던전’의 이야기를 이용하여, 가상의 왕국을 건설하고 왕과 왕비, 살인마가 된 아들 등 다양한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결핵 때문에 줄리엣이 병원에 들어가 편지를 나눌 때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창조해낸 캐릭터를 활용하여 가상의 ‘연서’를 교환한다. 그들에게 ‘상상’은 현실 이상으로 중요하다. 그 상상이 단지 이야기와 글로만 끝나는 것도 아니다. 줄리엣은 캐릭터를 일일이 찰흙인형으로 만들고, 바닷가에 가서는 모래로 성을 짓는다. 그리고 꿈속에서, 그들의 ‘판타지’는 완성된다. 성 안의 찰흙인형들은 축제를 벌이고, 섹스를 하고, 살인을 저지른다. 폴린과 줄리엣의 현실에서의 꿈은, 그들이 만든 이야기를 할리우드에 가서 영화로 만드는 것이다. 그 꿈은 이미, 그들의 상상 속에서는 이루어지고 있다. 그들은 영화로 만들어지기 원하는 것을 모두, 자신의 꿈속에서 실현시킨다. 그리고 피터 잭슨은 그 ‘꿈’을 영화 속에서 직접 표현한다. 그들이 꿈꾸던 것을. 그들이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들의 꿈에 사로잡혀 저지른 현실의 추악한 사건들까지 모두 보여준다. 그런데 그 경계가 모호하다. 피터 잭슨을 <반지의 제왕>의 감독으로 간택되게 한 환상 속 장면은 너무나 사실적으로 보이고, 줄리엣과 폴린이 그들의 부모와 대립하는 장면은 과장되고 일그러져 있다. 피터 잭슨의 영화에서 현실과 상상은 등돌리지 않고, 서로 손을 맞잡고 있다. 피터 잭슨의 영화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판타지’다.

자유, 예술가를 현실로 돌려놓다

가짜 다큐멘터리 <포가튼 실버>(1995)를 찍은 뒤 피터 잭슨은 자신의 미국 에이전트인 로버트 저메키스의 제작으로 <프라이트너>(1996)를 찍는다. 유쾌한 유령들이 등장하는 피터 잭슨 스타일의 코믹 공포영화였지만, 눈에 띄는 점은 없었다. 그뒤 피터 잭슨이 준비한 영화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의 하나인 1933년에 만들어진 <킹콩>의 리메이크. 하지만 <고질라>와 <마이티 죠 영>의 실패로 기획 자체가 무산되고 만다. 그러나 전화위복이라고 할까. 오랜 세월 톨킨의 팬이기도 했던 피터 잭슨은 <반지의 제왕>의 감독을 맡게 되었다. 돈보다는 ‘예술적 자유’를 택하겠다며 뉴질랜드로 돌아온 피터 잭슨은, 마침 자연 그대로의 웅혼한 자연을 가지고 있는 뉴질랜드의 풍토에 어울리는 작품을, 그것도 ‘걸작’을 만난 것이다.

<반지의 제왕>은 피터 잭슨의 전작들처럼, 잦은 웃음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프로도 일행이 모리아에 갔다가, 실수로 우물 속에 시체가 굴러떨어지는 장면 정도가 잠깐 웃음을 자아낼 정도다. 그러나 그 장면에서도 그리 크게 웃을 수는 없다. 그 사소한 실수 하나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헤븐리 크리쳐스>의 폴린과 줄리엣이 그랬듯이, 그 무지와 경솔함은 참담한 종말로 맺어진다. 그런 점에서 <반지의 제왕>은 지극히 현실적인 판타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잔인함과 모순을 깊이 체득하고 있는, 가상의 세계. 그런 가상의 세계를 다루는 재능으로서는, 피터 잭슨을 능가할 만한 감독은 많지 않다. <반지의 제왕>은 피터 잭슨에게 딱 맞는 ‘반지’다. 그러나 <반지의 제왕> 3부작이 끝난 뒤, 피터 잭슨은 다시 코미디로 돌아올 것이다. 피터 잭슨은 ‘자신의 모든 영화는 코미디’라고 말해왔다(<반지의 제왕> 이전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코미디를 만들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앞으로 만들 코미디에서도 피냄새가 진하게 울렁일 것이란 사실은 확고하다. “<헬레이저> 3부작은 아주 좋은 영화고 잘 만들었다. 그러나 너무 심각하다. 내가 <헬레이저>를 만들었다면, 나는 핀헤드를 벽에 처박아버리고, 모든 핀을 박아 평평하게 만들었을 거다…. 나는 거의 모든 상황에서 반사적으로 조크와 개그를 생각한다.” 누가 뭐래도 피터 잭슨은 자신이 코미디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그는 웃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피범벅이 된 공포영화로 그려내고 있다. 웃어버리지만, 여전히 손바닥에는 끈적거리는 핏자국이 남아 있는 영화들을. 할리우드에서 만든 <프라이트너>에 없었던 것은, 바로 그 ‘끈적거림’이었다. 피터 잭슨은 뉴질랜드로 정말 잘 돌아갔다. 예술가를 현실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은 역시 돈이 아니라, ‘예술적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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