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라서 인터뷰를 할 수 있는 반면 기자이기에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종류의 인터뷰가 있다. 16년간 매주 영화잡지를 만들며 배우를 만났으나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고 이제야 고백하련다. 김지하 시인의 시구를 막무가내로 인용하자면 “밤새워 물어뜯어도 닿지 않는 마지막 살의 그리움”이라고나 할까? 우상인 동시에 무당인, 지긋지긋하게 예민한 동시에 폭력적으로 대담한 이 희귀한 ‘종족’에게, 특별한 예술가들에게 우리는 번번이 이족의 언어로 눈치없이 말을 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능하다면 아바타의 몸이라도 빌려입고 배우들의 나라에 잠입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고육지책을 냈다. 우리가 배우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직업상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배우에게 기자가 되어달라고 매달려보자. 조심스레 인터뷰어의 자리에 청한 배우 가운데 고현정이 “오케이!”를 외쳤다. 그녀가 제일 먼저 만나고 싶어 한 배우는 이미연이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이미연은 예정된 다른 스케줄을 앞으로 잡아당겨 봄날 하루 저녁을 여유롭게 비웠다.
아파서 잊히지 않는 대사가 있다. 이재용 감독의 1998년작 <정사>에서 이정재는 극중 서른여덟살의 이미숙과 헤어지며 쓸쓸히 말했다. “가엾은 사람. 이젠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줄 이도 없을 텐데.” 그 뒤로 세상도, 나이에 관한 우리의 감각도 많이 달라졌다. 극중 이미숙의 나이를 이미 넘은 이미연과 고현정에게 인용한 대사보다 당치 않은 연민은 없을 것이다. 1971년생 여자들의 은근한 자부심인 그녀들은 여전히 대중에겐 사랑의 여신이며 연출자들의 뮤즈다. 로맨스 장르에서 나이든 남성 스타와 젊은 여성 스타의 짝짓기는 질긴 관습이지만, 이미연과 고현정의 멜로드라마를 상상할 때 파트너의 자리에는 자연스럽게 연하 남자배우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녀들의 자태가 여전히 맑고 생기 넘쳐서만은 아니다. 그보다 시간이 그녀들을 남자의 사랑뿐 아니라 존경까지 차지해버리는 강하고 넉넉한 여인으로 숙성시켰기 때문이다. 고현정과 이미연은 처음부터 그들과 함께였던 사랑스러움을 간직한 채,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의리와 명예까지 대변하는 배우가 되었다.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같은 해 입학해 친구가 된 이미연과 고현정은 아주 일찍 사랑을 믿어 스물다섯 이른 나이에 뛰어들 듯 결혼했고 생의 한 장(章)을 넘긴 뒤 다시 독신이 되었다. <선덕여왕> 시작 무렵 이후 처음 만난다는 두 사람은 인터뷰 자리에서 불현듯 오래된 추억의 조각들을 캐내고 서로의 현재를 확인하고 아직 오지 않은 일에 대한 상상을 주고받았다. 바로 1분 뒤를 모르는 상황을 즐기는 배우 고현정은 스타카토로 질문을 던졌고, “나는 배우다”라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속삭이며 예비하는 배우 이미연은 레가토로 받았다. 옆에 있는 서로를 확인하듯 “미연아”, “현정아” 하는 호명이 유난히도 자주 말꼬리에 따라붙었다. 내리는 어둠과 함께 둘은 점점 더 다가앉았다. 평생 그랬듯 시간은 그날 밤에도 두 여자의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