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화현장은 내겐 행복이지만 절실한 장소야 (2)
2011-04-27
글 : 김혜리
글 : 신두영
사진 : 오계옥
배우 고현정, 배우 이미연에게 묻다


연기할 때 부자연스러운 화장은 굉장히 싫어

고현정_가만. 너의 멜로영화를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네.

이미연_멜로 하고 싶어. 그런데 이제 내가 멜로드라마를 하려면 벗는 연기를 한다거나 대중이 보기에 좀 새로운 면모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이 될 때도 있어. 그런데 난 노출 연기 자체가 편하진 않아. 사실 지난 작품을 다시 보면 난 약간 후회가 될 정도로 메이크업이나 의상에 설정이 없어. 연기할 때 속눈썹 붙이거나 부자연스럽게 진한 입술화장을 하는 걸 굉장히 싫어하거든. 처음에는 이번에는 달리 가보자고 설정했다가도, 좋은 연기가 있고 그 다음에 헤어, 의상, 메이크업이 있는 거라는 생각에 결국은 또 편안한 스타일로 가게 돼. 이렇게 입으면 아주 예쁘다는 걸 알아도 화보촬영도 아닌데 동작이 불편해서 연기에 거슬리는 걸 못 참는 거지. 그런 내가 과연 노출연기가 편할 수 있을까? 배우로서 부족한 면일 수도 있지. 아무튼 최근에 접해본 시나리오는 멜로드라마보다 주로 아이가 얽혀 있는, 아이를 잃어버리거나 죽거나 폭력에 희생되고 거기 대응하는 이야기들이 많았어. 잘 와닿지가 않았어. 공백이 길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도 물론 있어. 나이란 얼굴이든 뒤태든 목소리든 무엇으로나 표현되게 마련이고, 연륜으로 보태지는 것도 있지만 지금 못하면 영영 못하는 역할이 있는 거니까. 특히 영화는 내가 이 작품을 거절한 다음에 더 괜찮은 작품이 올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어.

고현정_질문이 항상 부정적이어서 미안한데 어떤 배우가 한심하다고 생각해? 에너지를 못 주는 밋밋한 배우?

이미연_현정아, 나는 솔직하려고 한 한마디가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부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아.

고현정_그럼 고쳐 물을게. 널 싫다는 사람들은 뭐가 싫다고 말하니?

이미연_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잖아. 그런 점에서 난 모니터링에 게으른 배우인지도 모르겠다.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는 걸 아니까 10명 중에 10명이 나를 다 지지하는 것보다 10명 중에 3명이 강하게 응원해주는 게 내겐 중요해. 너더러 싫다는 사람들의 이유는 뭔데?

고현정_늙었는데 주책 그만 부리라거나 이혼했으면 조용히 숨어살 것이지 왜 저러냐고 하지. <알까기> 같은 프로그램 한번 나가고 나면…. (좌중 폭소)

이미연_그런데 비난의 초점이 동전이 딱 뒤집히는 꼭짓점 같은 거라서, 솔직해서 좋다는 사람이 있는 반면 같은 면인데 한번만 꺾이면 “기가 세 보인다”가 되는 거잖아. 반박하라고? 그러고 싶진 않아. 분명히 기는 세야지 연기를 하는 것 같아. 굳이 네가 아까 한 질문에 답하자면 집중 못하는 배우가 별로인 것 같아. 우리 시대가 연기 외에 많은 것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시대라는 걸 인정하지만 그래도 기본을 무시하고 패션이나 트렌드 좇기에 급급하다거나 다른 외적인 목표 때문에 이 영화나 드라마를 선택했다는 게 눈에 보일 때 애석하지.

고현정_그런 면에서 나는 몇점이야?

이미연_아니 그렇게 몇 작품 안 하지 않으셨어요? (좌중 폭소) <선덕여왕>을 다 보진 못했지만 내가 너(미실) 죽을 때 문자 보냈을 거야. 기본적으로 너는 마음을 담아내는 배우야. 반면 <대물>은 첫회인가를 재미있게 본 다음 마지막회를 봤는데 대국민 연설 장면에서 100% 마음을 못 담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넌 연기를 왜 하는 것 같니?

고현정_밥만 먹고 놀 수는 없잖아.

이미연_얘는 말은 꼭 이렇게 해요!

고현정_진짜야 미연아. 그럼 뭘 하겠어, 내가? 만날 놀아? 난 일 안 하면 놀 사람도 없어.

이미연_한 분야에서 이렇게 이름을 날릴 수 있는 네가 다른 일을 하자면 왜 못하겠니? 난 진짜 달리 할 줄 아는 일이 없어. 혜수 언니는 그림 그리신다 하고 누구는 사진 잘 찍는데 나는 다른 재능이 아무것도 없는 거야. 잘하는 건 집안 청소 정도?

고현정_그런데 우리가 어려서는 술 마시는 건 우리랑 상관없는 문화인 줄 알고 살았잖아? 넌 술을 마시니까 무지 ‘여자’가 되더라? 누구든 기대서 다 털어놓아야 할 것처럼 감싸주고.

이미연_남자들이 있으면 내가 또 안 그래. 방어적이 돼. 영화 하는 여자 동료, 선배들한테는 애교를 부리는데 남자감독님을 만나면 (굵은 목소리로) “아, 반갑습니다” 하고 전혀 여성성을 발산하지 않고 응대하게 돼. 일찍부터 일하다보니 남자동료들이 나를 여자로 인식하는 게 싫었나봐. 그런데 내가 만약 여성감독이라면 똑같은 조건의 남자배우 둘이 있을 때 남자로서 매력을 발휘하면 그쪽이 더 좋을 것도 같거든? 사실 연기자는 점수로 딱 매길 수 없잖아. 남녀가 이성으로서의 매력에 끌리는 건 당연한 건데 그걸 억지로 많이 거부한 거지.

고현정_나는 남자가 좋은데. 여기서 너랑 내가 큰 차이가 있다. 넌 조금만 여자다워도 그렇게 보니까 방어를 해야 하는 거고 나는 “아아앙” 하고 애교를 부려야 겨우 편하게 보니까 언제나 돌아이가 될 뿐이고. (좌중 폭소)

쉴 때는 감성을 쉽게 자극받는 상태로 만들어놓으려해

고현정_이혼하고 나서 연기폭이 넓어지는 여배우가 많다고 이야기하는 기자도 있는데, 나는 결혼생활 때나 이혼을 했다고 그 감정이 연기에 직접 도움이 되는 건 아닌 것 같아. 엄마가 돼봤다고 아기를 안을 때 특별히 달라지진 않았어. 이상하게 연기할 때는 스무살 그때 기분이 되더라고. 다만, 결혼도 했고 애도 낳아본 처지이니 예전에는 약간 못해도 되고 어설퍼도 괜찮았던 연기를 사람들이 용납해주지 않을 것 같은 거지. 그래서 실제로 나는 크게 안 변했어도 괜히 능수능란한 척하면서 연기하면 “이젠 좀 하네”라는 반응이 올 때도 있었고. 태도의 변화도 연기력으로 봐주시는 거지.

이미연_그래? 나는 굉장히 다를 것 같은데? 경험한 걸 표현하는 거랑 못한 걸 표현하는 건 차이가 나지 않을까? 예컨대 남자와 잠자리를 가져보지 않은 배우가 베드신을 연기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경우는 다르지 않겠어?

고현정_근데 이런 거야. 우리가 사실 아직까지는 극중에서 남자를 많이 만나는 캐릭터로 분하는 경우는 드물잖아. 말하자면 처녀 같은, 누가 항상 옷고름을 끌러주는 역할이랄까. 그래서 미숙했던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거지. 베드신은 안 해봤지만 만약 현재의 내가 그런 장면을 찍는데 현장에서 쭈뼛거린다면 모두 어이없어하겠지? 그런 걸 고려해서 일부러 담담한 태도를 취할 거라는 말이야. 경험을 해봐서가 아니라.

이미연_나는 결혼했으니까, 이혼했으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질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스물세살에 결혼 발표하고 스물다섯살에 결혼을 했잖아. 청춘물을 해야 할 시기에 청춘물을 못했고 결혼 이후에는 <넘버.3>나 <주노명 베이커리>나 대부분 유부녀 역을 했어. 결혼하면 여배우의 극중 나이가 점프하는 시대였어. 그러다가 오히려 혼자가 되고 나서 <인디안 썸머> <중독>에서 싱글 여성으로 나온 거야. 순서가 바뀐 거지. 어떻게 보면 네가 복귀했을 때 일하는 환경이 더 좋았다고도 할 수 있어.

고현정_너는 참 잘 울지. 자기 일이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많이 울잖아.

이미연_나는 연기를 하지 않는 시간 동안 앞으로 좋은 작품 만날 걸 대비해서 감성을 쉽게 자극받는 상태로 만들어놓고 싶어 하는 면이 있어. 정말 지치면 뭘 봐도 눈물이 안 나고 감동도 없고 누군가가 슬픈 얘기를 해도 “음, 난 더 안 좋은 일 있었는데” 생각하거든? (웃음) 그런 상태를 벗어나려고 애써. 안 그러면 어느 순간 좋은 작품이 와도 못할까봐서.

고현정_왜 그렇게 항상 연기자로 살아?

이미연_아직 마침표를 찍을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난 정말 좋은 배우로 남고 싶고 내 마음에 자신있게 남길 좋은 영화를 하고 싶어서 계속 기다리고 기다려. 이러다 결국 못 만나고 멈출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날까지는 스스로 나를 다치기 쉬운 애로 만들고 있는 것 같아. 작품이 불만스럽게 끝나면 너무 무서워. 하늘만 파래도 감사하던 마음이 온데간데없고 음악도 다 시끄럽기만 해. 혼자 힘으로 해결 안되는 그런 상황에서는 그래도 내가 최선을 다한 부분에 대해 잘했다고 쓰다듬어주고 그래도 이걸 얻지 않냐고 환기시켜주는 주변 사람들 때문에 일어나. (글썽)

고현정_그런 사람들이 무지 많은 거 알지?

이미연_많진 않지. 아무튼 누군가에게 계속 사랑받고 바로 사랑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배우로서 중요하다고 생각해. 넌 눈물이 없니, 뭐? 마찬가지지.

고현정_난 돈 줘야 울어. (좌중 폭소)

이미연_네가 마음으로는 더 울고 있을 수 있겠지, 현정아. (도리질치는 고현정) 난 네가 연기하기 힘들어도 분명 행복한 부분이 있어서 이 일을 한다고 생각해. 그걸 네가 인정하고 거기에 대해 이야기했으면 좋겠어. 달리 할 일이 뭐가 있겠냐고 그래서 연기한다고 대범하게 말하다가, 잘 모르는 사람들한테 책임감없는 배우로 오해받지 말았으면 좋겠어.

고현정_(응석 피우는 말투로) 배우가 꼭 책임감있어야 해? 공무원도 아니잖아. 촬영시간에 제대로 나가고 연기를 잘하는 것 말고 다른 책임을 져야 해?

이미연_설명하자면, 난 배우라는 이름을 갖기 위해 정말 노력했던 것 같거든. 결혼 뒤에 주말연속극 주부 역할도 많이 들어왔지만 다 사양하고 영화의 조연을 하면서 기다렸어. 난 조연상도 세번 탔어. 그래서 배우라는 타이틀을 얻고 나로 인해 한 영화가 만들어지고 스크린에 내 이름이 제일 먼저 나가는 것만한 책임감은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맏딸인 네가, 내가 아는 현정이가 어떻게 네 영화에 책임을 안 지겠니?

아기를 낳고 키워보는 경험은 해보고 싶어

고현정_우는 연기할 때 무슨 생각해? 넌 눈망울이 그대로인 채 갑자기 투둑하잖아.

이미연_‘투둑’하는 신이 많은 작품을 해서 그래. 실은 ‘투둑’ 안 하고 멈추는, 참는 연기를 하고 싶은데 항상 여배우들한테서는 감정의 결과물을 뚜렷이 보길 바라는 감독님들이 있어. 사실 난 진짜 슬프면 눈이 빨개져서 목에 핏대가 서는데, 어쨌든 바스트숏 들어가면 투둑하길 원하실 때가 많아. 눈물을 안 흘린 테이크가 나한테는 진짜인데 어차피 나한테는 권한이 없으니까.

고현정_웃긴 질문인데 나한테서 뺏고 싶은 건 없니?

이미연_그런 건 없고 아기를 낳고 키워보는 경험은 해보고 싶어. “엄마” 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 나랑 똑같은 딸이면 좋겠어. 조금 욱할 때는 있지만 부모님한테 대체로 잘하는 딸이거든.

고현정_어떤 때 욱해?

이미연_연기를 안 해본 사람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잖아. 추워요, 더워요, 그냥 표현하는 게 아니라 그걸 위해 감정을 끌어냈다 늘였다 줄였다 하는 과정이 있는데 그게 너무 힘들다고 했을 때 “그래도 해내야지” 식으로 대답하시면 속상해.

고현정_그럴 때 가족이나 연인을 제외하고 누가 제일 너를 이해해주면 좋겠어?

이미연_당연히 매니저지. 감독은 현장에서 나를 잘 이끌어주길 바라는 상대고, 힘든 부분을 이해받고 싶은 건 매니저야. 일하면서 같이 가는 사람이 내 상태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어?

고현정_매니저를 굉장히 챙겨준다고 들었어.

이미연_멋지게 큰 걸 해주진 못하고 그냥 조금씩 꾸준히. 나보다 어린 사람들인데 나를 챙기고 이해하기가 얼마나 버겁겠어? 그런데도 굉장히 노력해줘. 내가 원래 누굴 챙겨주는 걸 좋아하는 편이야. 예전 매니저가 손톱 뜯는 버릇이 있었는데 촬영장에서 그놈 손톱 정리해주곤 했어. 내가 그만큼 성숙한 인간인지는 몰라도 누군가를 돌보고 뭔가를 가꾸어주는 일이 좋아.

고현정_이야기하다보니 생각났다! 대학 시절에 네가 호암아트홀에서 연극을 해서 우리가 보러간 적이 있었어.

이미연_<파우스트>의 그레첸 역이었지.

고현정_같은 길을 뒤따라가고 있는 입장이었는데 그날 네 연극을 보고 연기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나도 배우를 하면 저런 굉장한 무대에 서야 하는데 도저히 감당 못하게 무시무시해 보였거든. 그래서 엔터테이너쪽으로 방향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어.

이미연_네가 왜 못하니? 연극해도 잘할 거야.

고현정_내 졸업공연을 못 봐서 그래. <갈매기>의 마샤를 했는데, 처음 마샤가 등장해서 호롱불을 켜야 했어. 막은 올랐는데 스탭이 호롱만 놓고 불을 안 갖다놓은 거야. 그래서 망설이다 앞줄에 앉은 관객한테 “성냥 좀 주세요” 해서 호롱불을 켰어. (좌중 폭소) 그러니까 난 배우의 애드리브가 아니라 엔터테이너의 애드리브쪽으로 머리가 도는 거지. 배우라면 불이 안 밝혀졌어도 켜졌다고 상상하고 연기로 표현해야지, 어떻게 엄연한 무대와 관객 사이 경계를 터버리니? 이후로 연극은 못하겠어.

이미연_나는 순발력이 없어서 반대로 토크쇼 같은 건 못하겠어. 제의를 받으면 무지하게 자료 받고 다 읽어본 연후에 “이건 내가 아직 준비가 안된 것 같아” 하고 접는 거야. (웃음)

고현정_반면 내 애드리브는 너무 위험하고. 감성 대비 공부가 부족해서 사고를 치는 거야.

이미연_너한테는 감성과 집중력을 포함해 많은 장점이 있지만 제일 부러운 건 좋은 의미에서 배우가 갖추어야 할 포커페이스야. 난 그게 안돼. 매니저가 뭘 잘못해서 방금 화를 냈다면 연기에 묻어나기 때문에 조금 사이를 뒀다가 촬영해야 해. 그런데 현정이 넌 그런 전환이 돼. 굉장히 머리가 좋은 배우야.

고현정_지금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때보다 더 해맑은 것 같지 않니?

이미연_(웃음) 내게 사람을 이미지화하는 습관이 있나봐. 그래서 때로는 네가 술 마시는 게 싫고 세게 이야기하는 것도 싫다? 원래부터 넌 솔직한 사람이었지만 혼자가 된 뒤에 세상에 강하게 보이고 싶어서 “나한테 괜찮냐고 묻지 마요. 난 괜찮으니까”라는 식으로 저러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해. 그 안에도 어떤 약함이 들어 있는 거잖아. 내가 알고 있는 너의 원래 아름다움이 너무 크다 보니까 그 상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인지도 몰라.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쿨하게 꼭 안 그래도 되잖니.

고현정_진심으로 와닿는 말이야. 굉장한 순간이다. 우리 약속해서 만나도 그냥 추억담 나누고 헤어지는 게 다였는데. 진짜 행복하다. 미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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