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유준상] 무정함에 숨은 진심
2011-05-09
글 : 김용언
사진 : 오계옥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유준상

“무정한 느낌이 좋았다.” 유준상이 이렇게 독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서 그가 맡은 캐릭터 근덕은 ‘의사 사모님’ 누나 인희(배종옥)와 포장마차 운영으로 살림을 꾸려나가는 바지런한 아내 선애(서영희)에게 패악을 부리며 돈을 뜯어낸다. 이 남자는 여자들이 울고 불고 노여워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으며 도박과 술값으로 그 돈을 아낌없이 탕진한다. “<태양은 가득히>라는 드라마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검사로 악역을 해본 적이 있는데, 그때와는 또 달랐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근덕의 비중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툭 건드리는 느낌이 있었다. 누나한테 정말 아무 감정없이 막 내지르는 그런 연기를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영화가 중반을 넘어 관객의 흐느낌이 처음으로 곳곳에서 들리기 시작할 때, 그건 바로 무정한 근덕이 때문이다. 껌을 짝짝 씹으며 선애에게 시비를 걸던 근덕은 누나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고, 그의 입가는 잠시 동안 경직되어 있다가 생각났다는 듯 다시 껌을 씹느라 우물우물한다. 그 잠깐의 경직된 순간이야말로 근덕이 느끼는 충격의 강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흘러가는 일상의 무심함을 한번에 결집해 보여준다. 그 아무렇지 않은 제스처가 관객에겐 더할 수 없는 슬픔으로 다가온다. “그냥 입안에 껌이 있다는 걸 불현듯 느끼고 다시 씹기 시작했다. (웃음) 의도되진 않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의도일 수 있는… 일상은 그렇게 껌을 씹는 것처럼 계속 흘러간다는 것, 근덕이가 잠시 멍해 있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걸 그렇게 표현할 수 있었다. 사실 편집실에선 근덕이가 껌 씹는 걸 멈출 때 그 숏을 끊었다고 했는데, 민규동 감독님이 ‘껌을 다시 씹는 장면까지 보여줘야 한다’며 바꿨다고 들었다.” 우연인 듯 의도인 듯 슬그머니 끼어들어간 본능적인 연기가, 배우와 감독 양쪽 모두에게 캐치된 멋진 디테일이었다.

유준상은 이 영화가 두 가지 점에서 ‘치유’와도 같았다고 설명한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찍기 전까지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공식석상에서 하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 그는 자신의 경험을 타인과 나누고 싶어졌다고 했다. “돌아가신 분들이 항상 내 옆에 있어주고 지켜봐준다는 판타지를 가지고 살았다. 내 마음속에선 아버지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이 가장 컸다. 이 영화를 통해 내 생각이 맞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게 너무 좋았다.” 두 번째로는 “딴생각하지 않게, 사심을 비우고 연기할 수 있게 해준 영화”라는 점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만 감고 맨 얼굴로 촬영장에 출근했다. 그리고 현장에서 건네주는 옷을 입자마자 바로 근덕이가 되어버렸다고 했다. 말이 쉽지, 남의 삶을 예민하게 살아내야만 하는 배우들에게 그런 상황이 쉽게 오는 게 아니다. “이번 작품이 전체적으로 그랬다. 뭘 특별히 해야지, 얻어가야지 이런 게 아니라 정말 편안하게 덤덤한 심정으로 자연스럽게 임할 수 있었다. 다음 작품을 촬영하면서 어느 순간 그때 상황을 돌이켜보니 놀랍더라. 홍상수 감독님 영화 작업할 때도 비슷했는데, 이렇게 별다른 사심이 빠지고 나면 목표가 어느 순간 더 또렷해진다. 그는 이번 영화가 ‘그러지 마’라고 탁 잡아주는 그런 작품이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현재 정지훈, 신세경과 함께 출연하는 <레드 머플러>의 촬영이 한창이고, 조만간 홍상수 감독과 함께 <북촌방향>으로 칸국제영화제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그리고 틈틈이 신작 드라마와 영화 대본을 검토하고 있다. “한국영화계에서 제일 바쁜 사람 같다”라며 농담 삼아 건넸더니 대번에 “아니다. 일년 내내 쉬는 날 많다. 나 이렇게 내버려둘 거냐고 만날 매니저한테 투정부린다”라고 받아쳤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스스로를 재촉하는 이 배우, 시간이 지날수록 더 자주, 훨씬 다른 모습으로 만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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