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세 미키오(1905~69) 감독과 작업했던 사람들은 그가 구상하는 화면에 대해 짐작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의 영화 15편에 출연한 여배우 다카미네 히데코는 한번도 연기 지도를 받은 적이 없어서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촬영현장에서는 이런 혼란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완성된 영화들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서 이음매가 전혀 표시나지 않는다. 야마네 사다오의 말처럼 자신의 기교조차 지워버릴 기교를 지니고 있는 나루세의 영화는 지극히 사실적이고 잔잔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태도의 문제일 뿐, 그의 멜로드라마는 어떤 작품보다도 격정적이며 우리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든다. 특히 나약함과 강인함, 정숙함과 정념을 동시에 지닌 아이러니한 그의 여성 주인공들은 오로지 나루세만의 인장이다. 동시대에 활동한 오즈 야스지로가 아버지와 딸로 대표되는 남녀 주인공에게 에너지를 분배했다면 나루세는 그가 사랑한 문제적 여성 인물들에 집중한다.
1930년 <찬바라 부부>를 시작으로 1960년대까지 총89편이 기록된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본령은 멜로드라마다. 이번 회고전에는 총 12편의 멜로드라마가 상영되는데 <아내여 장미처럼>(1935)을 제외하고 모두 50, 60년대 대표작으로 구성되었다. 이번 상영작은 크게 세 부류로 구분된다. 우선 가족 멜로드라마 성격의 <아내여 장미처럼> <엄마> <산의 소리> 등이 있고, 두 번째는 화류계에 종사하는 여성주인공의 애환을 그린 <흐르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방랑기>가 있으며, 마지막은 남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 <부운> <흐트러진 구름>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몰락해가는 게이샤 집의 풍경을 담담하게 그려낸 <흐르다>에는 나루세 영화의 히로인이 총출동한다. <흐르다>와 긴자의 바를 배경으로 한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의 주인공은 성격이 비슷한 여성들이다. 화류계 여성이지만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 하는 이들은 그런 성격 때문에 경제적으로 압박을 받고 있다. 두 영화에 모두 등장하는 주판과 가계부, 전표가 클로즈업된 숏은 이들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뭇 남성들의 추앙을 받지만 정작 내 남자는 없는 이들이 사랑에 빠지면 돌아오는 것은 몰락과 환멸밖에 없다. 원칙과 자존심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이들이 처한 환경은 근원적으로 거기에 배치된다. 모순을 껴안고 타협하지 않는 나루세의 여자들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을 진다. 바가 있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는 발걸음이 무거워도 이들은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간다. 상대적으로 남자들은 이기적이고 비겁하다. 옛정에 기대 공짜로 놀아보려 하거나 떠나기 직전에야 사랑을 고백할 용기를 내는 남자들이지만 나루세는 그들까지도 측은하게 바라본다. 여자들은 남자를 비난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단련시킬 다짐을 한다.
<아내여 장미처럼>은 딸의 시선으로 두집 살림을 하는 아버지를 바라본다. 딸은 아버지를 되찾기 위해 집을 나서지만 아버지가 이룬 또 다른 가족은 그녀의 마음을 흔들리게 한다. 해외에서 더욱 호평받은 <엄마>에서 딸은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를 연민을 갖고 바라본다. <번개>와 <오누이>는 가족 구성원간의 갈등을 그리고 있으며, <부운>과 <방랑기>는 하야시 후미코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들로 다카미네 히데코의 열연이 돋보인다. 나루세 영화 중 가장 드라마틱한 <부운>은 유부남과 처녀의 비극적 사랑을, <방랑기>는 사랑을 따라 화류계를 떠난 여성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담고 있다. 스기무라 하루코의 유일한 주연작 <만국>은 게이샤를 은퇴한 여주인공의 삶을 보여주는데 <흐르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와 일맥상통하는 비애감이 존재한다. 하라 세스코가 주연인 <산의 소리>는 외도를 하는 남편을 묵인하는 젊은 아내와 그런 며느리를 바라보는 시아버지의 섬세한 감정 교류가 돋보이는 독특한 영화다. <흐트러지다> <흐트러진 구름>은 미망인이 주인공인 영화인데 유작 <흐트러진 구름>(1967)은 남편을 죽인 장본인을 사랑한다는 내용이 더글러스 서크의 <마음의 등불>(1954)을 떠올리게 한다. 나루세 미키오 회고전은 7월15일부터 24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개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