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전쟁은 미친 짓이다
2011-07-26
글 : 강병진
6·25의 상처를 리얼리티로 풀어낸 장훈의 <고지전>

한국전쟁만큼 말 많은 소재가 또 있을까. 영웅주의로 그리면 반공으로, 영웅주의를 지우면 좌파로, 이도 저도 아니면 역사에 대한 회피로 비난받는다. 장훈 감독의 <고지전> 또한 이러한 형편에서 자유롭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7월11일 공개된 <고지전>은 한국전쟁의 성격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감정의 소비없이 전쟁의 본질을 집요하게 파헤친 작품으로 등장했다. <고지전>의 영화적인 흥미와 전쟁영화로서의 성취를 살펴보았고. 세 번째 작품을 끝낸 뒤 숨 고르기 중인 장훈 감독을 만났다.

총에 맞은 병사가 새처럼 파닥거린다. 아직 17살의 앳된 소년이다. 미성의 노래로 동료 병사들을 위로해 귀여움을 받던 그다. 하지만 전우라 부름직한 그들은 소년의 시체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전진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약 2년6개월 뒤인 1953년 1월, <고지전>의 이야기는 병사들이 이미 전쟁의 생과 사에 지독히 길들여진 때부터 시작한다. 북한과 유엔이 주도한 휴전협상은 2년이 넘도록 지도상의 1cm를 놓고 난항 중이고, 최전방의 남북한 병사들은 그 1cm를 넓히고자 여전히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전선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아예 전쟁을 잊은 듯 보인다. 영화의 첫 장면, 서울의 시장바닥에서는 전쟁이 남기고 간 각종 물건들이 놓여 있고, 거리의 학생들은 전방용사들의 속도 모른 채 ‘북진통일’을 외치고 있다.

따뜻한 햇살이 비추는 서울과 달리 동부전선으로 향하는 길에는 세찬 눈발이 날린다. 방첩대 중위인 강은표(신하균)는 동부전선의 악어중대에서 벌어진 의문의 살인사건을 수사하러 가는 길이다. 전사자로 알려진 중대장이 사실은 아군의 총에 맞아 죽은 것으로 밝혀졌고 또한 악어중대를 통해 발송된 인민군의 편지가 발견되면서 부대 내에 적과 내통하는 자가 의심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죽은 줄 알았던 친구 수혁(고수)이 악어중대에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강은표의 눈에 비친 악어중대는 후방의 전투부대와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병사들은 추위와 싸우느라 인민군복을 덧입는 걸 마다하지 않고, 이 부대를 통솔하고 있는 이는 이제 갓 스무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중대장이다. 심지어 정신을 잃은 한 부대원은 오래전에 죽은 전우의 이름을 부르짖어 나머지 병사들의 표정을 얼려버린다. 이곳에서 2년 사이 중위로 진급한 수혁마저 과거 유약한 학도병 시절이 연상되지 않을 정도로 변해버렸다. 게다가 이들은 고지 벙커 속에서 인민군이 남긴 편지를 읽고, 그들이 준 술을 마시고 있다. 그런데 군율과 지휘체계가 무너진 듯한 이 부대가 막상 작전에서는 대범하고 능수능란하다. 이들의 면면에서 전사자들의 영혼들로 집결된 유령부대의 전설을 연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어차피 현재 그들은 세상의 기억에서 지워진 부대다.

역사의 빈 구멍을 상상력으로

<고지전>의 영화적인 흥미는 이 악어중대의 실체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곧 역사의 빈 구멍을 상상력으로 채우는 흥미다. 1950년 6월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1953년 7월27일까지 약 3년간 치러졌다. <고지전>은 전쟁이 끝나기 전, 마지막 7개월여의 시간을 담은 영화다. 1951년 6월 전선교착 뒤 약 2년2개월 동안 최전방 부대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고지전>이 이러한 의문을 통해 한국전쟁이 지닌 성격을 나름의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건 기존의 한국 전쟁영화들과 비교할 때 눈에 띄는 특징이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전쟁이란 재난을 통해 형제의 멜로드라마를 그렸고, <웰컴 투 동막골>은 판타지에 가까운 우화를 대입했다. <포화속으로> 또한 한국전쟁이 지닌 특수한 성격은 언급되지 않은 채 어린 군인들의 희생정신만 강조했다. 하지만 휴전협상기간의 전쟁이라는 특징은 영화 속의 고지 전투에도 뚜렷한 캐릭터를 새겨놓는다.

악어중대의 전쟁터인 애록고지는 주인이 하루에도 몇번씩 바뀌는 곳이다. 그런 전투가 2년여 동안 셀 수 없이 벌어졌고, 셀 수 없는 사람이 죽어나갔다. 반복되는 전투 속에서 병사들은 전쟁의 달인이 되어갔고, 전우의 죽음에 무감각해졌을 것이다. 공을 세울 기회가 많은 만큼 진급의 속도도 빨라졌을 것이며 생존본능에 길들여진 그들은 적군의 옷이라도 입어 추위를 견뎌야 했을 것이다. 술과 담배, 편지와 사진을 통한 남북한 병사들의 교감 또한 고지전투의 특수성에 기반한 설정이다. 물론 <고지전>의 시나리오를 쓴 박상연 작가의 소설 <DMZ>, 그리고 이를 영화화한 <공동경비구역 JSA>와도 연결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가래침이 오가던 판문점 경계선, 그리고 그들을 이어주던 ‘돌아오지 않는 다리’와 남북한 병사들이 수없이 자리를 바꾸는 <고지전>의 고지는 사실상 다름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지전>은 오히려 박상연 작가가 공동집필한 <선덕여왕> 등의 드라마와 통하는 부분이 더 많아 보인다. 자세히 기록되지 않은 몇줄의 역사에 인물과 감정을 확장시키는 방식으로 쓰여진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인물을 극한 상황으로 내몰아 선악의 구분을 무화하는 설정이 그렇다.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숨길 수밖에 없는) 악어중대의 진짜 실체 또한 그의 드라마 속 인물들이 겪어온 죄의식과 관계가 깊다. 악어중대원들이 공유하는 건 전우애가 아닌 모르핀에 중독되면서까지 잊으려 한 기억이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저질렀던 이들의 죄는 <고지전>이 바라보는 전쟁의 본질이다. “우리는 빨갱이와 싸우는 게 아니라 전쟁과 싸우는 거야.” 예상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들의 악몽은 반전(反戰)영화로서 전쟁의 아픔을 드러내기에 모자람이 없는 지옥도다.

스타일이 다르다?

이데올로기 대신 철저히 본성만을 따르는 <고지전> 속 전장의 온도가 뜨거울 리 없을 것이다. 눈물을 자아내는 희생의 숭고함이나 승리의 기쁨 혹은 패배의 절망도 없다. 그저 살고 싶은 악어중대원들은 휴전소식이 들릴 때까지 애록고지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장훈 감독이 묘사한 전쟁의 풍경 또한 낭만에 젖어들 사소한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왜 또 전쟁영화를 만들어야 하냐는 질문에 리얼리티를 답으로 찾았다”고 한 장훈 감독은 <고지전>의 전쟁터에서 기존의 전쟁영화들이 활용한 스타일을 지워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이후 전쟁영화의 기본옵션이 된 모노톤의 색감은 매우 선명한 땅의 황토빛과 하늘의 색깔로 대체됐다. 장거리 사격을 뽐내는 저격수가 등장하지만 그의 신출귀몰한 능력은 쾌감이 아닌 공포의 대상이다. 전쟁영화의 또 다른 옵션인 들고찍기 또한 <고지전>에서는 전쟁터의 혼란스러움을 강조하는 대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인물들의 표정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쓰인다.

특히 고지의 정상을 쫓던 카메라가 시야를 꺾어 힘겹게 고지를 오르는 누군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 그리고 고지전투의 지난함을 전경과 후경의 전투로 보여주는 몽타주 시퀀스는 격한 효과없이 찍어낸 명장면이다. <고지전>의 절제는 눈물이며 핏물이며 한 방울도 남기지 않는 전쟁영화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지점일 것이다. 하지만 활력과 흥미를 지닌 전반부에 비해 후반부에 이르러 영화의 메시지가 배우들의 입을 통해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건 아쉬운 부분이다.

눈물의 아리아는 없다

반전영화로서 <고지전>이 지닌 시선의 색깔이 독창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대의를 따르지 않고 살기 위해 버티는 전쟁은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통해 목격했고, 전쟁이 초래한 인간에 대한 환멸은 <씬 레드 라인>에서, 내부의 적과 싸우는 전쟁은 <플래툰>에서 확인한 바 있다. 하지만 대상이 한국전쟁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지난해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이해 쏟아져 나온 드라마와 영화들, 그리고 <태극기 휘날리며>를 비롯한 그 이전의 한국 전쟁영화들이 전장에서 죽은 이들의 넋을 눈물로 달랬다면 <고지전>은 그들의 죽음에서 ‘실소’를 발견한다. 전쟁터에서의 죽음에 이유가 있다면 살아남지 못했다는 것 말고 무엇이 있을까. <고지전>은 이제껏 한번도 펼쳐진 적이 없었던 한국전쟁의 마지막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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