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영화다>부터 <의형제>를 거쳐 <고지전>까지 쉼없이 왔다. 이번 영화를 끝내고 하고 싶은 건 뭐였나.
=당분간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 여행도 다니면서 정리를 해야겠다. 예전에 <의형제>를 끝내고 1주일 동안 중국을 간 적이 있었는데, 너무 추울 때 가서 감기만 걸려 왔다. (웃음) 올해는 아예 다음 작품을 잡지 않으려고 한다.
-박상연 작가가 쓴 시나리오를 함께 각색했다. 원래 시나리오에서 어떤 부분이 바뀌었나.
=원래 시나리오는 좀 길었고, 더 처절했다. 앞부분의 판문점 장면은 각색과정에서 추가한 부분이다. 당시 전쟁 상황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려 했다. 그들이 왜 싸우는 건지, 그들의 전쟁이 어떤 맥락을 갖고 있는지 드러내야 할 것 같더라. 촬영하는 동안 넣은 부분도 있다.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라 전쟁이랑 싸우는 거야”란 대사가 그렇다. 내가 이 영화를 만들면서 전쟁을 바라본 태도가 그거였다. 악어중대의 과거도 그런 지점에서 이해했다.
-영화의 첫 고지전투에서 눈에 띄는 장면이 있다. 고지의 정상으로 향하던 카메라가 시선을 돌려 고지를 힘겹게 오르는 병사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 장면에서는 고지의 경사도를 관객에게 체험시키고 싶었다. 등산하는 것도 힘든데, 그런 데에서 싸운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일 같더라. 촬영하는 것도 그만큼 힘들었다. 와이어캠을 써야 했는데, 장비를 올릴 수가 없었다. 결국 쇠기둥을 자르고 용접해서 갔다가 고지 위와 아래에 박고 카메라를 매달아 찍었다. 다행히 의도한 느낌이 담긴 장면이 나왔다.
-<고지전>은 최대한 영화미학적인 스타일을 멀리한 영화다. 그럼에도 한 장면을 꼽자면 계절의 변화와 함께 반복되는 전투를 보여주는 몽타주 신이다.
=1차 전투가 병사들의 숨소리를 들려주는 게 목표였다면 2차 전투에서는 시간의 변화와 함께 고지가 상처받는 과정을 보여주려 했다. 그 장면에서는 앞부분의 병사들뿐만 아니라 뒷부분에서 멀리 보이는 병사들까지 모두 실제 리허설을 해서 찍었다. 김우형 촬영감독과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전투를 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자고 얘기했다. 그런 장면이 <고지전>의 톤이라고 생각했다.
-중공군이 들이닥치는 장면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연출됐다. <태극기 휘날리며>와의 차별성을 고려한 듯 보였다.
=당연히 신경이 쓰였다. 워낙 압도적이지 않나. 사실 그 장면이 가장 연출하기 힘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초지에서 찍으려고 하니 공간의 한계가 있더라. 연출 목표가 있었다면 양적인 압도감이 아니라 실질적인 공포였다. 자료를 보면 당시에는 중공군의 피리소리만 들어도 오줌을 지릴 정도였다더라. 워낙 영악한 부대라 소리를 사방에서 들리게 해 상대를 유인하는 전술이었다고 한다. 고민을 많이 했지만 의도한 만큼 나온 장면은 아니었다.
-촬영 전 인터뷰 당시, 기록사진을 통해 방탄조끼나 치마를 입고 있는 외국인 참전용사를 발견했다고 했었다. 내심 그런 장면을 기대했는데, 영화에는 담기지 않았다.
=그때 기대를 하고 있다는 게 내 눈에도 보였다. (웃음) 사실 정말 넣고 싶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영화적으로 끌어들이는 게 불가능하더라. 판문점 장면에서도 그들을 세워놓을 만한 장소나 상황을 만들 수 없었다. 이야기와 상관없는 장면을 만들 수도 없고. 너무 아쉬워서 사운드를 키워서라도 중국어랑 영어가 섞이는 소리를 만들어볼까 했는데, 인물들의 느낌이 깨진다고 해서 다시 줄이기도 했고. 미련이 계속 남아 있던 부분이다. 그런 과정을 겪어보니 영화가 스스로 자기에게 맞는 걸 선택한다는 느낌이 있더라.
-김옥빈이 연기한 2초의 모습이 흥미로웠다. 특히 그녀가 여성성을 드러내는 장면이 돋보였다. 장훈 감독의 영화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순간이었다.
=남자영화만 찍느라 워낙 메말라서…. (웃음) 적은 분량에 비해 아이 같기도 하고 소년 같기도 하고, 여자처럼 보이기도 하는 등 다양한 임팩트를 가진 캐릭터였다. 멜로의 분량을 더 넣어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도 있었는데, 그랬다가는 다른 부분의 색깔이 바랠 것 같더라. 또 현재 단계보다 덜 넣지 않은 건 김옥빈이라는 배우가 주는 기대 때문이었다. 사실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분량이 더 적었고, 더 차가운 인물이었다.
-남성식 이병이 죽는 장면에서도 온도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각색된 시나리오보다 더 냉정하게 묘사됐다.
=촬영할 때는 더 차갑게 찍었다. 워낙 많은 사람이 죽으니까, 한명의 죽음을 가지고 동등한 온도로 묘사할 수 없었다. 원래는 등장인물 누구도 절대 울지 않게 만들려고 했다. 남자배우의 눈물이라는 게 정말 조심스럽고 결정하기 힘든 것 같다. 자칫하면 신파적인 감정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막상 촬영을 하다보니 이 영화가 그렇게 차갑기만 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인물은 따뜻하게, 죽음은 차갑게 보여주자는 게 최종적인 기준이었다.
-그런 조절의 태도는 감독의 취향인가, 성격인가.
=아직 내 취향은 없는 것 같다. 영화에 담기는 건 내 성격일 거다. 무덤덤한 성격일 수도 있고. 욕을 할 때도 “이 정도 했으면 됐지 더하는 건 심하잖아” 이런 식이다. (웃음)
-후반부에 이르면 배우들의 대사를 통해 반전의 메시지가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각색을 할 때부터 많이 고민한 부분이다. 이제 와서 수정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전쟁의 개념에 대한 대사들이 배우들로서는 연기하기 어려웠겠지만 나중에는 그런 부분이 인물들의 드라마로 보여지겠다고 생각했다. <고지전>에는 인물들 개개인의 사연을 드러내거나, 그들의 끈끈함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거의 없다. 함께 노는 장면도 별로 없다. 현재로서는 그나마 관객이 인물들에게 감정을 내보일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고지전>을 찍으면서 감독 스스로 달라진 게 있다면 무엇일까.
=일단 몸이 안 좋아져서 그런지 없던 쌍꺼풀이 생겼다. 지금 7개월째 이 상태다. 덕분에 세상은 더 잘 보이는 것 같은데, 거울 보는 게 힘들다. (좌중 웃음)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동안에는 강박과 시간에 쫓겨 영화를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영화라는 게 어쩔 수 없이 주변 사람들을 못 챙기고 상처도 주고, 개인의 삶까지 추스르지 못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비관적인 생각이 <고지전>을 찍으면서 바뀌었다. 영화도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즐겁게, 건강하게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