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한류 액션영화’의 원조
2011-09-07
글 : 주성철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한국영상자료원, 9월15일부터 22일까지 정창화 감독 회고전 개최

정창화 감독은 ‘한국 액션영화’의 당당한 ‘원조’로 불릴 수 있는 인물이다. <자유만세>(1946)의 최인규 감독 밑에서 한형모, 홍성기, 신상옥, 정창화 감독이 배출됐다면 정창화 감독 아래서 임권택, 정진우, 김시현, 전우열 감독 등이 조감독으로 일하며 영화를 배웠다. 임권택 감독은 그의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에서 처음 조감독의 위치로 올라섰고 이후 <노다지>(1961), <지평선>(1961)에서도 조감독이었다. 임권택 감독은 액션 연출과 편집, 콘티 등 감독으로서의 모든 것을 그의 밑에서 익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해왔다.

6·25전쟁 당시 혼란한 전시사회를 배경으로 해 밀수범들과의 싸움을 그린 정창화 감독의 데뷔작 <최후의 유혹>(1953)은 신상옥 감독의 <악야>(1952)와 더불어 한국 범죄스릴러영화의 효시이다. 이후 <장화홍련전>(1956), <비련의 섬>(1958), <장희빈>(1961) 등 보다 폭넓은 소재의 영화를 만들던 그는 당시 주류를 이뤘던 신파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암울한 시대에 뭔가 활력을 주는 작품을 만들고자 마음먹었다. 당시 그에게 충격을 준 작품은 바로 조지 스티븐스의 할리우드 서부극 <셰인>(1953)이었고, 그런 영향을 바탕으로 만들게 된 첫 번째 액션영화가 바로 <햇빛 쏟아지는 벌판>이었다.

이후 그는 ‘액션영화 전문’ 감독이라고 해도 될 만큼 줄곧 이 장르에 매진했다. 말하자면 그는 ‘장르적 지향성’을 지닌 최초의 한국 감독이었다. 인간의 탐욕을 그린 <노다지>는 멜로영화의 서사 구조에 필름 누아르 스타일을 겹쳐놓고, 정교한 결투장면을 군데군데 배치한 액션영화였다. 사금을 찾는 데 평생을 바쳤던 사나이(김승호)가 옛 동료 형의 아들(황해)을 찾는 가운데, 소매치기로 전락한 딸(엄앵란)과 그 돈을 노리는 뒷골목 조직 보스(박노식)가 딸을 납치하는 위기를 겪는다. 이후 당시로선 보기 드문 대작이었던 <지평선>은 이른바 ‘대륙물’ 혹은 ‘만주 웨스턴’ 붐을 일으켰으며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1965)는 그 대륙물의 컨벤션을 동남아 무대로 옮긴 작품이었다.

정창화 감독의 개척자적 정신의 액션영화들은 대륙물에 이어 한국적 검술영화로도 이어졌다. 호금전 감독의 <방랑의 결투>(1965)를 보고 자극받은 그가 홍콩 무협영화와 차별되는 한국적 액션영화를 만들기 위한 시도였다. <황혼의 검객>(1967)에서 무법천지 마을에 홀연히 나타난 삿갓 쓴 검객(남궁원)은 온갖 횡포를 일삼는 오기룡(허장강)을 징벌한다. 남궁원과 허장강의 결투는 그의 얘기에 따르면 “한 폭의 동양화같이 아름다운 우리 고성의 ‘한국적인 선’을 활용해 궁의 지붕만 보이는 능선을 설정해놓고, 그 미장센을 통해 압축적이고 효율적으로 주제를 표현”하려고 했다.

<순간은 영원히>(1966) 홍콩 로케이션 촬영 당시 쇼브러더스의 란란쇼 사장의 눈에 든 그는 1968년부터 전속 계약을 맺어 홍콩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홍콩 진출 1호 작품인 <천면마녀>(1969)는 홍콩에서 큰 흥행 성공을 거둔 것은 물론 유럽에 수출된 최초의 홍콩영화로 기록된다. 이에 만족하지 못했던 그는 홍콩 감독들의 고유 영역이라 할 수 있는 ‘무협영화’로 눈길을 돌려 초교가 주연을 맡은 <여협 매인두>(1970)를 만들었고 만족스런 반응을 끌어냈다. 란란쇼를 비롯한 동료 감독들도 그가 와이어를 사용하는 고유의 무협영화에 도전해 성공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지만, 그것은 기우로 증명됐고 이후 그는 직접 쓴 시나리오로 <아랑곡>(1970)과 <래여풍>(1971)을 연달아 완성했다.

새로운 액션영화에 대한 도전은 홍콩에서도 계속됐는데, 아마도 그 결정판은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일 것이다. 왕우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용호투>(1970)가 기존 무협영화의 판타지에서 ‘맨손 대결’의 쾌감으로 옮겨간 권격영화의 효시라면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그 완성이라 할 수 있다. 무협영화의 긴 호흡과 유려한 율동보다 선 굵은 파괴력의 액션이 인상적이었다. 이후 그는 골든하베스트로 자리를 옮겨 <흑야괴객>(1973)을 만들기도 했으니 홍콩 영화계에서 그의 주가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1977년 <파계>를 끝으로 화려한 홍콩 생활을 접고 귀국한 그는 1979년 화풍영화사를 설립해 제작자로 활동하다 영화계를 은퇴했다. 영화감독으로서 한창 나이라고 할 수 있는 쉰살 무렵 연출을 그만둔 것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에 마련된 회고전은 그런 그의 굵직한 발자취를 느껴보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더불어 정창화 감독이 직접 영상자료원을 찾아 9월17일에는 <황혼의 검객> 상영 뒤, 18일에는 <죽음의 다섯 손가락> 상영 뒤에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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