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소녀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를 기다려왔다. 신세경이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 순간부터 말이다. 한국 TV역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그 악명 높은 명장면을 마지막으로, 신세경은 잠시 멈췄다. 유상헌 감독의 <어쿠스틱>(2010)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낸 것을 제외하면 이상할 정도로 신세경은 모습을 숨기는 듯했다. 물론 그녀의 시간이 정말로 멈췄던 건 아니다. 신세경은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현승 감독의 11년 만의 복귀작 <푸른 소금>을 찍고 있었다.
<푸른 소금>의 신세경은 여전사다. 일단 외양은 그렇다. 스모키 메이크업으로 진하게 장식한 눈매, 면도칼로 슥슥 잘라낸 듯한 머리카락, 세상의 모든 총알도 막아낼 것처럼 단단한 가죽 재킷, 항상 타고 다니는 제 몸집의 세배는 될 것 같은 오토바이, 전직 사격 선수이자 현직 암살자. 우리가 당연히 기대하는 것은 작은 몸집으로 바이크를 몰고 뛰어다니며 장총으로 정확하게 타깃의 좌심방 우심실을 파열시키는 여전사여야 마땅하다. 그런데 대신 그녀는 띠동갑은 훨씬 넘을 게 틀림없는 전직 조폭과 사랑(혹은 사랑과 우정 사이)에 빠지고 만다. 게다가 그녀가 사랑에 빠진 상대는 무려 송강호다.
신세경이 <푸른 소금>에 뛰어들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도 송강호라는 이름이다. 지금 한국의 젊은 배우들 중에서 송강호라는 거대한 이름과 함께 일해보길 갈망하지 않는 자는 없을 테지만 실제로 기회를 얻는 자는 드물다. 신세경은 모든 게 “천운”이라고 말한다. “송강호 선배와 작업한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역시 인복이 많다고 느꼈다. 아직 경력도 제대로 쌓이지 않은 상태인데 송강호의 상대역이라니, 천운인 거다. 그런데 처음엔 마냥 설레다 진짜로 촬영에 들어가면 나의 부족한 점이 오히려 두드러지기만 할까봐 걱정도 했다.” 당연한 걱정이었을 거다. 송강호는 대본에 쓰여 있는 것 이상의 뉘앙스를 만들어내는 드문 배우 아니던가. “송강호 선배님 옆에서 6개월간 연기하면서 자연스레 길을 깨달았다. 시간이 지나자 선배가 탁구공 튀듯이 자유롭게 연기하면 나도 거기 따라서 자연스럽게 반응을 하게 됐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푸른 소금>에서 송강호와 신세경이 스마트폰을 들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아야만 한다. 둘은 정해진 시나리오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연기한다. 그런 거야 별일 아니지 않냐고? 당신이 스물세살 신참 여배우고 상대방이 송강호라면 그런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신세경은 <푸른 소금>을 통해 비로소 스크린 위에 거대하게 투사되는 법을 배운 듯하다. 이제 남은 건 미래에 대한 질문들이다. 첫째, 이젠 역할도 스스로 선택하고 싶지 않은가? “항상 남의 충고대로만 생각을 해왔다. 그런데 이젠 스스로 생각을 할 때가 온 것 같다.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해서 모든 걸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이런 시도를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큰 변화다.” 둘째, 송강호처럼 오로지 영화에 집중하며 살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는가. “그저 나 자신에게 많은 것을 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주는 게 영화라는 느낌은 있다. TV는 카메라가 나를 향한 시간 내에 원하는 정답을 내놓아야 한다면 영화 현장은 많은 것을 시도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마지막 질문. 왜 신세경은 20대 초반의 다른 여배우들처럼 화려한 행사에서 하이엔드 의상을 걸치고 케이블TV의 샤워를 받는 걸 즐기지 않는 것처럼 보일까. “(아주 오랜 침묵) 이건 어떻게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들릴 수 있어서 답변하기 조심스럽다. 이 직업은, 본질 자체가 대중에게 사랑을 받아야 하는 직업이다. 그런데 내 느낌에는 본질 자체가 좀 변질된 느낌이 있다. 그러니까… (웃음) 중심을 잘 잡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사적인 자리였다면 더 직설적인 답변이 나왔을 테지만 지금은 이걸로도 충분하다. 어쨌거나 신세경에게는 중심이 있으니까. 세상의 다른 스물세살 소녀들에게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중심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