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혁은 자신이 연기한 <의뢰인>의 ‘한철민’에 관하여 “정황 증거로 몰린 용의자”라고 설명한다. “정적인 역할인데도 불구하고 풍성한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상황이어서 그 점에 매료됐다”고도 한다. 변호사(하정우)와 검사(박희순)로 각각 출연하는 나머지 두 주연배우들이 “법정에서 서로 논리적인 공방을 펼치는 가운데에서도 나는 조용히 감정선을 유지해야만 했다”고 밝힌다. 결국 “이 새로운 캐릭터를 잘 소화해내면 또 다른 영역을 넓힐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이 영화를 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이 말들을 모아보니 <의뢰인>의 한철민을 연기한 장혁은, 정황 증거로 몰려 용의자가 된 이 정적인 캐릭터의 풍성하지만 숨겨진 감정선에 도전하여 배우로서 새로운 장으로 진입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의뢰인>의 오프닝 시퀀스를 여는 것은 장혁이다. 차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들어오는 데까지 동네는 어수선하다. 경찰들이 가득하고 사람들은 소란스럽다. 그 소란이 자기의 집, 그리고 아내의 죽음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 그의 충격이 얼마나 가공할 만한 것인지 한철민의 표정에서는 읽을 수가 없다. 그는 다만 충격에 혼이 빠져나간 것 같다. 그때 돌연 경찰이 한철민을 살인용의자로 체포하고 법정 공방 과정에서 그가 과거에 또 다른 살인사건의 용의자였음이 알려진다. 하지만 과거의 사건 역시 물적 증거는 없었고 정황 증거만 가득했다. 그는 이제 교활한 살인자이거나 억울하기 짝이 없는 피해자가 될 운명이다. 이 시점 이후 한철민의 등장 분량은 주인공치고는 미비한데, 기이하게도 그 막후에서의 인상은 대단해서 영화 내내 힘을 발휘한다. 특이한 것은 그러는 내내 한철민은 여전히 수갑에 묶여 있고 의자에 앉아 있고 표정은 없고 말수는 적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철민의 몸이 구속의 상태에 있으므로 그를 연기한 장혁의 연기폭도 제한받지 않았을까 생각하기 쉽다. 변호사와 검사의 활발한 연기에 비해 그의 상태는 상대적으로 더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장혁은 단호하다. “두 배우가 많은 묘사를 해낼수록 나는 내면으로 그들의 묘사를 치고받아야만 한다.” 그가 이런 예를 든다. “나는 운동을 좋아한다. 운동에는 리듬감이라는 게 있다. 어떤 순간에 움직임이 멈출 때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듬이 멈춘 건 아니다. 그 멈춤도 리듬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리듬이란 감정선의 리듬일 것이다. 그러니 대개의 장면에서 한철민의 표정이 무감해 보인다 해도 장혁의 감정선의 리듬이 멈춰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영화에서 한철민의 울혈들을 차근히 누적시킨다. 마침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철민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후반부의 장면이 등장할 때, 그의 호소가 강력하게 뇌리에 남는 것도 그 때문일 거다. “억울하다, 그래서 표현도 해봤다, 하지만 먹히지 않더라, 내가 발버둥치면 칠수록 당신들은 나를 범인으로 여기지 않는가, 하는 식으로 말하는 장면이다. 그 장면은 압력밥솥이 터지는 것처럼 한철민의 감정적인 한계치가 터지는 거다. 내 생각에 <의뢰인>은 한 사람이 범인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보다 한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점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 그 선입견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 한철민이다.” 장혁은 다시 비유를 든다. 앞에 놓인 책상을 ‘딱따닥딱~ 따닥딱’ 하고 박자감있게 두드린다. 그러더니 다음에는 ‘똑, 똑, 똑, 똑’ 같은 간격으로 조용히 나눠 치다가 갑자기 쾅하고 내려친다. 전자가 <의뢰인>의 상대 배우들(변호사와 검사)의 리듬이라면 후자가 용의자인 자신의 리듬이라고 설명한다.
“배우라는 직업은 기본적으로 감정을 표출해야 하는 일인데 이번에는 그 감정을 바깥으로 내보이는 걸 절제해야 했다. 그러나 상대방이 내게 던지는 감정에 대해서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어떻게 받아내야 할 것인가 내내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장혁은 <의뢰인>에서 자신의 역할이 “투수가 아니라 포수였다”고 말한다. 무표정으로 표정을 받아내는, 무감함으로 감정을 자극해내는, 멈춤으로 활동들을 끌어내는, 그렇게 하여 서로의 연기의 리듬을 충족시키는 그런 작업이라는 뜻에서인 것 같다. 장혁은 애초에 그가 들어서고자 했던 새 영역으로 한발쯤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