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자고 한 얘기치고는 뼈가 있었다. “신분 상승을 하고 싶었다.” <의뢰인> 제작보고회 때 출연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박희순은 그렇게 대답했다. 누구는 인생의 밑바닥을 보여주고 싶어 기를 쓰는데 신분 상승이라니. 하긴 그의 전작을 떠올려보면 아주 이해가 안되는 말도 아니다. 난데없이 집에 침입한 ‘미친년’(강혜정) 때문에 몇번이나 자살 시도에 실패하는 남자(<우리집에 왜왔니>(2008))며, 상금 10억원이 걸린 서바이벌 게임쇼 참가자 8명의 생사를 쥐락펴락한 장 PD(<10억>(2009))이며, 머리가 노랗게 탈색될 정도로 동티모르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쳤던 전직 축구선수(<맨발의 꿈>(2010))는 확실히 슈트 차림과 거리가 먼 인물들이었다. “비슷한 처지의 인물을 연기하다 보니 내심 이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우연찮게 들어온 작품들이 신분이 높은 인물이었다. (웃음)” 그게 <혈투>(2010)의 무관 헌명, 얼마 전 크랭크업한 <가비>의 고종 황제, 그리고 <의뢰인>의 ‘안민호 검사’다.
<의뢰인>의 박희순은 “범인을 감옥에 보내는 것이 검사의 일”이라는 원칙에 투철한 엘리트 검사다. 그는 냉철하고 이성적이면서도 필요에 따라 법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누가 봐도 범인임이 분명한 용의자 한철민(장혁)이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풀려나는 것을 절대 허락할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다. 또, 안 검사는 전 감사원장 출신인 아버지에게 항상 인정받고 싶어 하고 라이벌인 강 변호사(하정우)와의 대결에서 절대 지기 싫어하는 콤플렉스 덩어리이기도 하다. “인간마다 비슷한 지점이 있지만 안 검사는 이긴 자의 느낌보다는 따라가는 자의 고독함과 외로움이 더 많이 묻어난 인물이다.” 그럼에도 안 검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검사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박희순 역시 이를 잘 안다. 그가 “이 작품의 포인트는 ‘검사’가 아닌 이야기의 주무대인 ‘법정’에 있다”고 판단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배심원 제도로 진행된 실제 재판을 참관했다. 일상적인 톤이 아닌 과장된 제스처, 억양 등 극적인 감정이 오가는 법정을 보니 한편의 드라마더라. 이 이야기를 연극하던 시절로 되돌아가서 풀어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의뢰인>이 ‘한국 최초의 법정드라마’라는 점에서 도전 의식이 생겼다.”
그러나 ‘연극’과 ‘연극 같은 영화’는 명백히 다르다. 한번의 집중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연기하면 되는 연극과 달리 영화는 아무리 긴 호흡이라도 여러 번 찍어야 했다. 극단 목화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그라도 여러 차례 진행되는 재판신은 많은 에너지를 요하는 작업이었다. “사실 우리 영화는 여러 번 끊어서 재판신을 촬영하지 않았다. 연극처럼 긴 호흡으로 한 앵글로 찍으면 그 장면을 다른 앵글로 다시 촬영해야 했다. 테이크가 두번, 세번 거듭될수록 진이 다 빠지더라. 어찌나 힘을 주고 했던지 ADR 녹음(후시녹음) 때 현장에서 낸 소리가 안 나오더라. (웃음)” 덕분에 영화 속 검사와 변호사 그리고 용의자가 상대의 허점을 파고드는 심문과 변론 그리고 증언은 한편의 버라이어티쇼처럼 생생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어쨌거나 연극처럼 작업한 <의뢰인>은 박희순에게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해줬다. 원톱 혹은 남녀주인공 위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 최근의 몇몇 작품이 흥행에 실패한 탓에 박희순은 그 어느 때보다 고민이 많던 차였다. “흥행에 실패한 게 빚처럼 느껴졌다. 이게 뭐가 잘못됐을까. 나의 연기력일까. 인지도일까. 아니면 운이 나빠서일까. 재미 삼아 올해를 신분 상승의 해로 목표를 정하긴 했지만 동시에 나를 정비하는 해이기도 한 것 같다. 다시 공부하는 마음으로 이번 작업에 임했다.” 안 검사의 심문이 법정 안을 날카롭게 가른다면 그건 박희순의 단단한 초심 덕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