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 최고의 CG맨 장성호 [1]
2002-01-12
글 : 문석
사진 : 정진환
“보이는 CG? 그건 하수다”

서울 강남구 하고도 신사동에 웬 공장이람. ‘Motion Factory’, 즉 ‘움직임의 공장’이라는 이곳에선 기계들이 만들어내는 웅장한 소음 대신 쉴새없이 짤깍거리는 마우스 소리만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노동으로 상품을 만들어내는 곳을 공장이라고 부른다면, 이곳도 분명 공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생산품이 이름 그대로 움직임, 그것도 컴퓨터에 의해 만들어진 움직임, 즉 컴퓨터그래픽 영상이라는 것이 다른 공장과의 차이라면 차이겠지만.

그냥 줄여서 ‘모팩’(mofac studio)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이곳을 불철주야로 지키며 17명의 직원과 2명의 프리랜서로 이뤄진 ‘생산라인’을 관리하는 인물은 설립자이자 ‘공장장’이기도 한 장성호씨다. “직원 모두가 힘을 합쳐 일하는 것이니 내 이름이 앞에 나가는 것은 이상하다”며 ‘사장’ 대신 ‘실장’이라는 직함을 명함에 새겨놓고 있지만, 1999년 창립한 이래 짧은 기간 동안 모팩을 영화분야에서 한국 최고의 컴퓨터그래픽 업체로 만들어낸 당사자가 바로 그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동안 그의 지휘 아래서 제작된 ‘움직임’을 납품받은 영화들은 타이틀만으로도 쟁쟁한 화제작들이다. <해피엔드> <이재수의 난> <공동경비구역 JSA> <가위> <화산고> 등등. 그외에도 <컷 런스 딥> <행복한 장의사> <킬리만자로> <미인> <섬>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고양이를 부탁해> <와니와 준하> 등이 이곳에서 만들어진 영상을 담은 영화들이다. 올해도 <재밌는 영화> <일단 뛰어> <후아유> 등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작품들이 줄 서 있는 상태.

컴맹, 진정한 슈퍼바이저로 태어나다

하지만 충무로가 그를 ‘최고의 영화분야 CG슈퍼바이저’로 꼽기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단지 다양한 스타일을 가진 여러 편의 작품에 참여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부단히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며 완성도 있는 컴퓨터그래픽 영상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이처럼 많은 작품에 손을 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재수의 난>의 까마귀 장면, 흑백사진을 훑어내리는 <공동경비구역 JSA>의 마지막 장면, <고양이를 부탁해>의 짤랑거리는 크레디트와 휴대폰 문자메시지 화면 등에서 그는 과거 한국영화가 디뎌보지 못한 미지의 섬을 찾아나서왔다. 또 이들 영상은 영화의 흐름을 살려주고 관객을 스크린 속으로 빨아들이는 역할을 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최근 개봉했던 <화산고>는 그동안 쌓아올린 장성호의 기량이 한꺼번에 발휘된 작품. 주인공들이 팟, 팟하며 수시로 날려대는 기의 파동이나, 장혁의 몸을 감싸도는 물의 모습, 학교의 전경을 비롯한 곳곳의 공간 등 전체 장면 중 80% 이상이 CG작업을 거쳤다. 게다가 아날로그 필름을 디지털로 스캐닝한 뒤 전체적인 색의 톤을 조정하는 디지털 색보정이라는 과정을 거쳤으니 영화 전체에 그의 손때가 묻어 있는 셈이다. 그가 인정받는 더욱 중요한 이유는 이들 장면 대부분이 감독의 지시를 받들어 수동적으로 소화한 것이 아니라 장성호 스스로의 머릿속에서 나온 아이디어를 반영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가 “오퍼레이터가 아니라 진정한 슈퍼바이저”라는 말을 듣는 것도 같은 이유다.

젊다면 젊은 32살의 그지만 충무로 경력은 CG로만 올해로 8년째를 맞으니, 오히려 중견이라고 부르는 게 어울린다. 하지만 10년 전 그가 컴퓨터그래픽은커녕 컴퓨터가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도 모르는 컴맹이었다면 믿으시겠는지. 그가 운명적 ‘파트너’인 CG와 만나게 된 사연은 이렇다. 1990년 홍익대 시각디자인학과에 입학했다가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준비하던 장성호는 92년께 페이퍼 드로잉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손으로 그린 그림을 일일이 촬영해야 하는 이 작업을 통해 그림을 움직이게 한다는 사실에선 희열을 느꼈지만, 몇달 밤을 지새워도 결국 몇분 분량밖에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엔 허탈감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애니메이션계에서 활동하기 위한 필수 코스인 도제시스템은 혈기방장한 스물둘의 그에겐 너무나 먼 길로 와닿았다. 바로 그때였다. 미술학원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한 선배가 “컴퓨터그래픽이란 게 있는데, 그걸 이용하면 장편영화도 만들 수 있다”며 그를 꼬드긴 것. 컴맹이었던 그는 “얼떨결에” 선배가 차린 컴퓨터그래픽 업체에 들어가게 됐고, 그때부터 학교는 뒷전으로 젖히고 CF작업을 중심으로 CG를 만들게 됐다.

수입은 좋았지만 그에게 CF작업은 창의력보다는 단순한 기능만을 요구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졸업하던 해인 94년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귀천도>에서 CG를 맡은 이정환씨가 햇수로 3년이 넘는 그의 CF작업 경력을 높이 사 참여를 제의한 것이었다. 그 제안을 수락한 것이 이후 그에게 함박웃음과 아득한 한숨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계기가 될 줄 그땐 미처 몰랐다. <귀천도>에 이어 <박봉곤 가출사건>을 끝내는 9개월 동안 그와 그의 동료들은 월급을 한푼도 받지 못했다.

결국 회사는 와해됐고, 그는 또다시 “얼떨결에” 독립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월급 대신 회사에서 가져온 컴퓨터 2대를 방 한구석에 놓고 일감을 기다렸지만, 그가 하고 싶었던 영화 일은 좀처럼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미대 출신이라고” 프리랜서로 잡지 일러스트나 표지 디자인을 하며 직원 인건비를 조달했다. 장하연 감독의 <일팔일팔>, <퇴마록> 등에 부분적으로 참여하며 이름을 날리던 그에게 다가온 작품은 <이재수의 난>이었다. 이 영화를 위해 6개월 동안 작업했지만 흥행 실패로 역시 돈을 받지 못했다. 이때의 좌절을 딛고 차린 곳이 모팩이었다.

"알게 모르게, 영화에 녹아들어라"

그뒤 장성호와 모팩이 승승장구하게 된 데에는 축적된 경험과 높은 수준의 CG 구현 능력뿐 아니라 무언가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장성호가 CG계 종사자이기에 앞서 영화인이라는 사실이다. 항상 “나는 영화 스탭”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영화계 CG 종사자들은 ‘나는 CG를 한다. 그중에서 영화를 한다’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은 ‘나는 영화를 만든다. 그중에서 CG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

얼핏 말장난처럼 보이는 두 가지 입장의 차이는 크다.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어떤 장면에서 어떤 CG를 사용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없으며, CG를 영화적으로 이용하지 못하면 영화 전체가 무너진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다. 하긴 세상에는 ‘CG가 뛰어난 영화’가 있는 반면에 ‘CG만 훌륭한 영화’가 있는 게 사실이니. 실제로 장성호와 함께 일해본 사람들은 그가 CG에 앞서 영화를 잘 알고 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의 이시명 감독은 “영화의 편집이나 리듬을 제대로 파악할 줄 알기 때문에 어떤 장면에선 CG보다는 실사가 낫다고 제안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신뢰가 간다”고 말한다. <화산고>의 김재원 프로듀서도 “보통 CG하는 사람들은 어떤 장면을 만들 수 있겠냐고 물으면, 안 되는 게 없다고 한다. 장성호는 오히려 안 되는 게 많은 친구다. 영화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그래픽의 한계를 명확하게 구분지어줘 편하다”고 설명한다.

그가 컴퓨터그래픽보다 영화를 앞세우는 것은, CG를 알기 훨씬 전부터 영화를 친구로 사귀었던 탓인지 모른다. 히치콕, 존 포드, 펠리니, 로셀리니 영화를 좋아했고 국방영화 촬영감독이기도 했던 부친의 영향 덕에 영화와 가까운 거리에 있을 수 있었던 그는 중3 때 교육방송에서 본 <엘리펀트 맨>을 통해 영화도 예술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이후 미대를 희망하게 된 것도 학교의 무지막지한 스파르타식 입시 트레이닝에서 벗어나고자 함과 동시에, <제다이의 귀환>이나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백 투더 퓨처> 시리즈의 포스터를 그린 드루 스트루잔 같은 포스터 화가로 영화계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정도에서만 머물렀다면 그는 평범한 CG계 인사가 됐을지도 모른다. “<귀천도> 때 난생 처음 영화 촬영현장이란 곳에 나갔는데, 나이도 어리고 CG담당이라는 이유로 스탭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현장에서 스탭들에게 씹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본격적으로 영화 공부를 시작했다.” 그 전까지 시네마테크 같은 곳에서 영화를 ‘즐기던’ 그는 구할 수 있는 책을 모조리 구해 읽고 동료 스탭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영화의 속살을 파고들었다. “CG보다 영화 공부에 열중했”던 이 시기를 거치고 나자 영화의 톤이란 무엇인지, 시나리오는 어떻게 봐야 하는지, 연출자의 의도를 읽는 방법은 무엇인지에 관해 감을 잡게 됐다. 그러다보니 자연 자신이 만드는 컷이 해당 시퀀스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지, 그 시퀀스는 전체 영화에서 어떤 맥락에 자리하는지 등도 염두에 두게 됐다.

물론 장성호의 장인정신에 입각한 과감한 도전정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모팩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팩 초창기 시절, 디지털 입출력 장치가 없어 정작 작업을 해놓고도 어떤 수준의 결과물이 나왔는지 답답해하던 그는 어느날 일을 저지르기로 결심한다. 은행의 융자를 얻어서라도 고가의 디지털 입출력 장치를 구입하기로 한 것. 그가 무려 7억원에 가까운 빚을 내 필름 스캐너와 필름 레코더를 구입한 것은 결과물의 퀄리티를 확인하고 싶은 탓만은 아니었다. <박봉곤 가출사건>으로 인연을 맺게 돼 그에게 영화와 연출의 세계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준 김태균 감독의 프로젝트 <화산고>를 “저지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가 <화산고>에서 사용한 디지털 색보정이라는 방법은 실로 과감하다 못해 무모함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스스로 인정하듯 “화질이 떨어지고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관리하는 게 까다로우며 대단한 노가다가 수반”되는 데도 이 길을 택한 것은 촬영, 조명, 현상 등의 아날로그 기법만으로는 영화 전체의 통일성을 확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제작비를 절감할 수 있다는 것 또한 고려한 요소였다.

아직도 스스로의 실력이 모자라고 이를 받쳐줄 외적 환경도 썩 좋지만은 않다고 판단하지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빠지게 되는 컴퓨터그래픽의 매력을 그는 부정하지 않는다. “CG란 영화에선 이미지를 조작하는 도구 중 하나다. 세트, 조명, 분장, 의상 등과 다른 점은 촬영 이후 가해지는 조작이라는 점 정도일 게다. 그런 의미에서 CG는 크리에이티브를 만들어내는 주체는 아닌 게 확실하다. 하지만 감독의 의도와 영화적 맥락을 이해한다면 그 속에서 자신의 크리에이티브를 일부 녹일 수 있는 즐거움을 준다는 사실도 확실하다.”

그가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CG는 때깔 좋고 멋들어진 그림을 만들어내는, ‘드러나는 CG’가 아니라 영화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 굳이 찾으려 해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 CG다. 기술적으로는 엄청나지만, 영화와는 겉도는 것 같은 느낌의 CG를 제작하는 티펫 스튜디오(<스타쉽 트루퍼스> <할로우 맨> 등)보다 영화와 착착 달라붙는 ILM쪽의 손을 들어주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때문에 그가 만든 영화를 본 관객에게서 가장 듣고 싶은 이야기도 “어디가 CG였어?”라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CG가 잘됐다”는 말은 경우에 따라선 기분 좋은 얘기가 아닐 수도 있다고 그는 말한다.마음을 읽는 최고의 CG

이같은 점을 생각해보면, 장성호가 가장 훌륭한 CG를 담은 영화로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포레스트 검프>를 꼽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깃털이 하늘로 날아가는 CG로 시작하는 이 영화에는 톰 행크스가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하는 장면이나 중국 선수와 탁구를 치는 장면 등 잘 알려진 곳 외에도 여러 차례 꼼꼼하게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곳곳에서 CG가 사용됐다. “컴퓨터그래픽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역사라는 광풍을 묵묵히 헤쳐간 포레스트의 내면을 어떻게 표현했겠는가”라는 게 그의 부연설명이다.

저메키스 감독의 다른 영화들인 <왓 라이즈 비니스>와 <콘택트>도 높이 평가하는 작품이다. 특히 <왓 라이즈 비니스>는 알게 모르게 컴퓨터그래픽이 엄청나게 많이 쓰였는데, 그중에서도 그는 달리는 자동차 안으로 카메라가 들어가더니 해리슨 포드의 휴대폰 액정을 클로즈하는 장면 등 실제 촬영으로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불가능한 카메라 워킹을 주목한다. 모두 3D 그래픽으로 만들었는데, 기술적으로 절묘한 데다가 “지금의 테크놀로지를 갖고 히치콕이 영화를 만든다면 어떨까”라는 저메키스 감독의 문제의식을 표현하는 데 CG가 제구실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어비스>를 비롯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작품들 또한 그의 손에 꼽힌다. <어비스>의 그 유명한 물기둥 장면을 포함해 <트루 라이즈>나 <타이타닉>에서도 컴퓨터그래픽을 드러나게 보여주려 하지 않고 드라마의 상황이나 캐릭터의 내면을 설명하기 위해 쓰였다는 점이 교본으로 삼을 만하다는 것. 뜻밖에도 그가 꼽는 또 하나의 교본은 <죠스>. 이건 일종의 역설이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1975년엔 컴퓨터그래픽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는데도 최고의 작품이라고 내세우는 이유는, CG 없이도 감독이 전달하려는 바를 효과적으로 표현한 대표작이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현악기의 음과 시점숏만으로도 관객의 공포를 극대화시켜낸 스필버그를 통해 CG가 능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얘기.

“어떤 작업을 하건, 어떤 분야에서건, 늙어죽을 때까지 영화 일만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한국영화 CG분야에서 독보적인 인물이 된 장성호가 꾸는 꿈은 얼핏 소박해 보인다. 하지만 이 말은 어쩌면 한때 그가 소망했듯 촬영을 배우러 미국으로 훌쩍 떠날지, “요즘 예고편을 만들면서 배우게 된 편집이 너무 재미있다”는 그의 말마따나 편집기를 붙들게 될지, “장성호에게 연출을 한번 맡겨보고 싶다”는 김재원 프로듀서의 말에 부응해 연출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굳이 우리가 상관할 필요가 없는 문제 같다. “영화가 좋아서 영화계에 들어왔기 때문에 근근이 버틸 수만 있다면 계속 이 자리를 지킬 것”이라는 이야기처럼, 그는 이전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영화의 듬직한 친구로 서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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