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에 뒤 시네마>의 60년은 아시아영화 발굴의 역사
<카이에 뒤 시네마> 필진과 정성일, 허문영 평론가가 함께한 부산영화포럼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봉준호, 홍상수. 이 세명의 ‘아시아 Big3’가 부산영화포럼 3부에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로 아시아영화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했다면, 1, 2부의 주인공은 평론가들이었다. 올해로 60주년을 맞은 서구 영화비평의 중심 <카이에 뒤 시네마> 필진과 한국의 정성일, 허문영 평론가는 ‘아시아’라는 미지의 세계를 엿보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혹은 그 안에 몸담고 있는 증언자의 입장으로 흥미로운 대담을 나눴다.
영화의 바다를 항해하는 데 있어 중심과 주변은 구분되지 않는다. 누벨바그를 주도하며 탄생한 <카이에 뒤 시네마>는 창간 이래 줄곧 발견되지 않은 영화들의 세계를 탐험해왔다. 그들에게 아시아영화는 미지였지만, 아시아영화에도 그들의 존재는 충격이었다. 전세계 모든 해변을 강타하는 물결. 그곳이 어디든 영화가 있는 곳이라면 파도는 친다. 그러나 은하수의 별빛이 시차를 두고 도착하는 것처럼 파도가 오감에는 시간이 걸린다. 심지어 지구 반대편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는 지금마저도 시차는 항상 존재한다.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서로에게 미지의 영역이며 발견의 대상이다. 이번 부산영상포럼을 방문한 <카이에 뒤 시네마> 필진의 생생한 증언은 시차에서 생기는 그동안의 오해를 조금이나마 줄여갈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아핏차퐁, 멘도자, 에릭 쿠, 봉준호를 주목한다
10월10일 오전 11시 부산 그랜드호텔에서 열린 포럼 1부에서는 더들리 앤드루, 전 편집장 샤를 테송과 티에리 주스, 현 편집장인 슈테판 들로름이 차례로 1960년, 1970∼80년, 1990년, 그리고 현재의 아시아영화를 탐험하는 <카이에 뒤 시네마>의 역사를 증언했다. 그것은 발굴의 역사였다. 역사가 그들로부터 출발했을지언정 그 기원이 아시아에서 비롯되었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더들리 앤드루가 말하길 “<카이에 뒤 시네마>는 베니스에서 공개된 <라쇼몽>과 함께 탄생했다”. 그들에게 일본영화는 충격이었으며 프랑스 누벨바그 영감의 원천이었다. 얼리-클래식-모던-월드시네마로 영화역사를 구분한 더들리 앤드루는 모던시네마를 탄생시킨 영화제와 영화평론의 힘이 아시아에서 비롯되었음을 강조한다.
60년대가 일본영화에 의한 누벨바그 탄생의 시기였다면 70~80년대는 다른 여타 아시아영화에 대한 발굴의 시기였다. 오즈 야스지로나 미조구치 겐지 등 작가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되는 동시에 인도영화나 중국영화, 대만과 홍콩, 필리핀영화로도 부지런히 그 발길을 옮겼다. 이 기간은 각종 영화제를 중심으로 다른 지역의 영화를 발견하는 중요한 시기였으며 이두용 감독의 <피막>이 베니스에 처음 소개되기도 했다. 샤를 테송은 이 시기에 “영화의 중심이 유럽이라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아시아 지역에서 중요한 작품들이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음을 발견했”다고 강조한다.
슈테판 들로름의 발표로 마무리된 1부 마지막은 9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아시아영화와 작가를 훑어보는 시간이었다. 누벨바그로의 영향력 아래있는 구로사와 기요시, 아오야마 신지, 스와 노부히로 등 일본의 시네아스트들은 동시대의 촉매제이자 영화가 교류하며 서로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국적인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을 찾는 것”이라는 티에리 주스의 말처럼 역동성과 새로움에 대한 갈망은 그들의 시선을 중국, 한국, 동남아로 옮기며 수많은 작가를 발굴하게끔 한다. 현재 가장 주목받는 아시아 작가로 타이의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필리핀의 브리얀테 멘도자, 싱가포르의 에릭 쿠, 그리고 한국의 봉준호를 꼽으며 마무리된 그들의 발표에는 새로운 것, 영화적인 것에 대한 애정과 굶주림이 묻어났다.
‘작가’는 <카이에 뒤 시네마>의 영원한 화두이자 갈망이다. 11일 오전 11시에 재개된 포럼 2부에서는 허문영, 정성일 평론가에게 한국 작가에 대한 그들의 구체적인 견해를 들을 수 있었다. <카이에 뒤 시네마> 애독자인 정성일은 “낯선 영화를 영화사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창조력이 <카이에 뒤 시네마>의 매력”이라고 칭찬하며 한국영화에 대한 <카이에 뒤 시네마>의 입장을 질문했고, 이에 뱅상 말로사는 “작가라는 명칭이 제한적, 분리적으로 쓰이지 않는 것이 한국영화의 특징이자 매력”이라고 답했다. 한편 <카이에 뒤 시네마> 전 편집장 티에리 주스가 “그렇다면 내부적으로 한국영화계가 인정하는 작가는 누구인지”를 되묻는 등 난상토론이 오가는 가운데 관객마저 진지함과 학구적 열기 속으로 자연스레 동참할 수 있었다. 하늘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별이 더 많지만 우리가 그 존재를 아직 모른다 하여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 시야에 포착되지 않는 것도 늘 의식하고 있는 자세, 그것이야말로 그들과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정신이며 이번 포럼이 <카이에 뒤 시네마>‘의’ 아시아영화가 아니라 <카이에 뒤 시네마>‘와’ 아시아영화인 이유였다.
이미지들의 확산이 삶에 기여하는 지점을 믿습니다
아핏차퐁은 그저 ‘아핏차퐁’이면 족하다. 어떠한 수사나 비유에도 포착되지 않고 독자적인 영화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그는 어느 날 불쑥 우리 곁에 다가왔다. 다르고 은밀하며 모호하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매혹적인.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창조적 에너지로 가득 찬 영감 덩어리다. ‘과잉’이라는 주제하에 그가 풀어놓은 사적 기억은 기술의 최전선을 경유하여 어느새 영화의 미래에까지 촉수를 뻗고 있다. 그의 뿌리가 미래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는 환상의 순간을 여기에 담아본다.
“제게 빛을 주신 분들이 계십니다. 제 생애 최초로 만난 영화감독은 의사였던 어머니십니다. 그녀의 현미경을 통해 저는 다양한 빛깔의 혈구들을 보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었고, 그녀의 슈퍼 8mm 카메라로 작은 세계를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분들은 펠리니, 고다르, 코폴라, 올리베이라, 마야 데런 등 제게 아름답고 전염되기 쉬운 빛을 주사한 의사들입니다. 빛과 피야말로 제 취향이지요. 저는 스필버그와 80년대 할리우드의 전설을 보며 자랐고, 이후 피를 줄이고 빛을 좀더 강조한 미국 실험영화에 매혹되었습니다. 타이로 돌아온 저는 16mm 흑백영화만을 만들기로 결심했지만, 이내 변화를 감지했습니다.
이미 제가 생각한 영원한 안식처와 당시의 제 작업을 연결하긴 무리였고, 다른 미학을 지닌 시스템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바로 디지털입니다. 복제의 복제의 복제로서의 영화 시대인 지금, 모든 것은 파편화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영화 자체의 인식의 순간들처럼 기능합니다. 영화를 감상하는 행위는 단지 보는 것이 되었고, 경청은 단순히 듣는 것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미지들의 확산이 우리 삶에 기여하는 지점을 믿습니다. 우리는 과잉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모르기에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더 많은 노출, 더 많은 기록에 늘 굶주려 있으며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우리 모두는 이제 ‘카메라를 든 사나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들을 로봇과 구분하고 위엄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당신 선택의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