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거장의 생각을 훔치다 (4)
2011-11-03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씨네21 BIFF 데일리 사진팀
배우 이자벨 위페르·감독 뤽 베송

홍 감독님의 작업은 관습적이고 시적이죠

배우 이자벨 위페르

가르침을 받기보다 영화와 인생에 대해 툭 터놓고 담소를 나눈다는 느낌이었다. 10월7일 오후 3시 영화의 전당 아카데미룸에서 ‘이자벨 위페르-나의 삶, 나의 영화’라는 주제로 마스터클래스가 열렸다. 기조특강 없이 관객이 묻고 위페르가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마스터클래스 강연을 다섯개의 키워드로 소개한다.

스타일_어떤 역할에 임할 때 제가 가장 공들이는 부분이 의상과 신체적인 특징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헤어와 분장, 의상은 캐릭터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변신의 수위를 설정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외적인 모습이 캐릭터의 개성을 지나치게 부각시켜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스타일을 바꿔야 할 때는 과감해야 하지만 배우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선에서 스타일의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봅니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엔딩신_제가 가슴에 스스로 칼을 꽂는 장면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직도 당시의 감정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제게 주문한 연기는 특별하고 구체적이었습니다. 그는 인간과 동물이 하나가 되는 감정을 요구했어요. 오스트리아 작가 엘프리드 제리넥의 원작 소설에도 그 대목은 매우 고통스러운 느낌으로 묘사되어 있지요. 굉장히 연기하기 힘든 장면이라 촬영이 끝나가던 무렵에 찍었고 테이크도 여러 번 갔었습니다.

홍상수_저는 올여름 한국 배우들과 함께 홍상수 감독님의 신작 촬영을 마쳤습니다. 영어로 촬영했는데 프랑스인인 저도 외국어를 하고, 함께 출연한 한국 배우 유준상, 문소리, 정유미, 윤여정씨도 외국어로 연기해야 하는 상황이 흥미로웠어요. 홍 감독님과의 작업은 저에게 하나의 모험이었습니다. 비관습적이고 시적이며 우아한 그의 연출 방식이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저는 여행을 참 좋아합니다. 배우는 내면적인 여행을 하는 사람이라고 늘 생각하며 살아왔고, 현실의 여행은 그런 배우의 인생을 보완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좋아했어요. 이 두 가지 방식의 여행이 조화를 이루는 게 바로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이라는 낯선 곳에서 촬영 당일에야 시나리오를 받고 연기하는, 그야말로 우연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영화. 그런 작품에 출연할 수 있게 되어 기뻤습니다. 저는 영화에서 세 가지 버전의 인물을 연기합니다. 각 버전의 인물들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한다는 점까지만 얘기할게요.

연기론_<피아니스트>의 여교수처럼 강렬한 인물을 종종 맡다보니 그런 캐릭터를 연기하기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힘든 역할이란 없다고 생각해요. 연기란 상상이 주가 되는 직업입니다. 어떤 역할에 대한 객관적인 진리란 존재하지 않아요. 제가 <보바리 부인>을 연기한 적이 있는데, 보바리 부인이 실제로 어땠는지 누가 알겠어요? 저는 제가 보여주고 싶은 보바리 부인을 연기할 뿐입니다. 연기자는 그처럼 완전한 자유를 느끼며 작품에 임해야 합니다. 물론 그건 연기자의 자유를 존중해주는 감독을 만났을 때에야 가능한 것이지요. 제게는 <의식>을 비롯해 여러 작품을 함께한 클로드 샤브롤이 바로 그런 감독이었습니다.

인생관_인간 이자벨 위페르로서, 제 삶을 규정하는 프레임 같은 건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에 대한 의혹과 확신, 이 상반된 감정이 공존한다는 점이 제 인생의 흥미로운 지점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제가 소망하는 모습과 실제로 삶에서 발견하는 모습, 이 두 가지 요소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한 삶의 목표가 될 것 같아요.

왕은 감독이 아니라 영화다

감독 뤽 베송

타협하지 말라, 뚜렷한 비전을 가져라,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면 지금 당장 카메라를 가지고 거리로 나가라. 뤽 베송의 말투는 이처럼 거침없었다. 프랑스와 할리우드를 오가며 <레옹> <택시> <제5원소> 등을 만들어온 그는 10월11일 오후 2시 영화의 전당 아카데미룸에서 열린 마스터클래스에서 30년의 세월이 녹아든 경험담을 연달아 쏟아냈다. 두 시간 내내 뜨거웠던 그의 특강을 모두 싣지 못하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알다시피 저는 프랑스와 할리우드를 오가며 영화를 만들어왔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게 할리우드와 프랑스는 어떻게 다른지, 또 할리우드로 진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더군요. 근본적으로는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할리우드에서 작업하더라도 저는 그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원하는 영화를 만드니까요. 한국의 영화감독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할리우드 진출을 꿈꾸기보다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먼저 집중하세요. 미국적인 영화를 만드는 건 미국 사람들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적임자는 바로 여러분이고요. 저도 프랑스를 기반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더 레이디>를 촬영하게 됐습니다. 외국 감독들이 파리에 와서 촬영하는 모습을 보면 영화에 꼭 바게트를 넣더라고요. (웃음) 그 모습을 보며 제가 다른 지역에서 영화를 만든다면 저렇게 전형적인 장면은 넣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더 레이디>도 그런 마음으로 촬영에 임한 영화입니다. 처음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본 뒤, 아이처럼 울었습니다. 너무나 감동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국가의 민주주의가 피와 투쟁 속에서 태어났지만 말로서 민주주의를 일으킨 사람은 역사를 통틀어 아웅산 수지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 민주주의를 탄생시킬 수 있다는 점이 사람들에게 큰 희망을 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아쉬운 점은 <더 레이디>의 촬영을 마치고야 아웅산 수지를 만났다는 점입니다. 아웅산 수지에 대한 자료가 별로 없었기에 영화를 만드는 동안은 그녀의 삶을 최대한 진솔하게 보여주려 했습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저는 아웅산 수지가 남편과 살았던 아파트에 직접 찾아갔습니다. 아파트와 주변 호수의 모습을 정밀하게 측정해 세트장에 똑같이 재현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저는 아웅산 수지의 삶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 영화의 영감이 되어주는 건 삶 그 자체입니다. 모든 것들이 주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감각을 열어두어 스쳐지나가는 것들을 흡수해야 합니다. 일례로 저의 모든 영화에는 제 삶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감추려 해도 기념품처럼 영화의 곳곳에 튀어나오더라고요. <그랑블루>에서 소년이 오리발을 신고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장면은 그리스에서의 유년 시절을 반영한 겁니다. <제5원소>에는 열여섯살 때의 삶이 녹아 있습니다. 시골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 당시의 삶- 경제, 경찰, 병원, 음식- 에 대해 두서없이 400페이지를 썼거든요. 그 내용은 이후 <제5원소>의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30년 동안 작품 활동을 이어오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장애물에 부딪힐 때마다 제가 항상 되뇌는 말이 있습니다. 16살 때 조감독이 “왕은 감독이 아니라 영화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건 왕에게 바쳐야 한다. 왕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해줬습니다. 그 말을 항상 머릿속에 넣고 다닙니다.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는데도 풀리지 않는 일이란 없습니다. 연출부 제3조수로 일할 때 생판 모르는 사람을 공항에서 붙잡고 영화 소품을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옮겨달라며 사정사정한 적도 있습니다.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동기가 이처럼 강렬하다면 대부분의 경우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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