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한 것만 찾던 시절에서 벗어나…
고현정_한동안 제3세계 음악도 대중에게 많이 소개해주셨죠?
윤상_제 취향은 그저 식상함을 피하려고 조금 더 자극적인 것을 찾다보니 나온 결과인 것 같아요. 음악도 “너무 지겹다. 다른 나라엔 뭐가 있을까?” 둘러보다 남미음악을 접했고 그러다보니 자연히 그 나라 영화도 궁금해졌어요. 공동작업자인 박창학씨가 세계 대중음악에 통달한데다가 영화학 박사 공부까지 했거든요. 그 친구 근처에 있으면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다양한 국적의 영화를 손쉽게 보게 돼요.
고현정_요즘 영화를 찍느라 부산에 7개월째 머무르는데 마침 영화의 전당이 개관해 기념행사에 참여하게 됐어요. 제가 좋아하는 다섯 작품을 골라 관객과 함께 보는 프로그램인데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부운>이 첫 상영작이었고 며칠 전에는 <나는 인어공주>라는 러시아영화를 보고 관객과 대화를 했어요. 사실 최근 제가 ‘전원’이 꺼질 뻔했는데 그 영화를 보고 힘을 냈어요. 작품 자체의 기운도 좋았고. 40년을 살며 어찌됐건 길 가다 ‘고현정 너무 예쁘다’는 말씀도 듣고 대놓고 욕하시는 분은 없었잖아요. 그런데 내가 스위치를 꺼버리는 게 배은망덕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그 영화가 환기시켰어요. <나는 인어공주> 극중에 파인애플이 등장하거든요? 마음에 드는 질문을 하는 남자 관객한테 드리려고 그날 파인애플 두개를 안고 단상에 올라갔는데 (좌중 폭소) 결국 하나는 저랑 영화 보러 만삭의 몸을 이끌고 온 여자 관객께 드렸죠.
윤상_영화도 보다보면 끝이 없죠. 저는 음악이고 영화고 뭐가 최고인지 누가 짱인지 끝을 보고 싶어 하고 배틀을 벌였던 세대거든요. 누가 최고냐의 문제는 30대까지도 친구와 벌이는 설전의 주제가 되곤 했어요.(웃음) 어렸을 때는 메이저 할리우드영화를 못 봤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 20년 만에 <귀여운 여인>을 보는데 리처드 기어가 멋있고 가슴이 뛰는 거예요. 제일 독한 것만 찾던 시절에서 이미 내가 벗어났구나 싶었어요. 옛날 같으면 그런 영화를 보고 있는 내 모습을 누구에게 들키기조차 싫어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말이죠. 그런데 음악은 역시 조금 다른 것 같아요 . 몸에 안 맞더라도 어느 정도 입어봐야 한다는 직업병 비슷한 의식이 있었지만, 최근 유행하는 음악에는 역시 큰 매력을 못 느껴요. 영미권 바깥의 음악이나 예전 음악을 계속 찾게 되죠.
고현정_뜬금없는 이야기 하나 해도 될까요? 윤상씨 3집 《클리셰》(2000)에 <바람에게>라는 곡이 실려 있었어요. 그 무렵이 제가 운전하는 시간을 약간 자유로 느끼던 시기였는데 그 노래가 제게 대단한 위로가 됐어요. 오늘 인터뷰를 확정한 다음 <바람에게>를 꼭 다시 듣고 가야지 마음먹고, 얼마 전 차 안에 앉아 밖을 쳐다보는 신을 찍는 촬영현장에서 크게 틀어놓고 스탭들과 함께 들었어요.
윤상_감사합니다. 음악 취향에 대해 더 말씀드리자면, 이를테면 아이돌 음악에 대해서도 그들에게 꼭 그런 음악적 옷을 입혀야만 할까 하는 의구심이 있어요. 그들이 제가 좋아하는 장르의 곡을 못 부르라는 법은 없거든요. 최근 기사를 하나 봤어요. ‘오늘 밤’, ‘뜨겁게’, ‘우리 서로’, ‘소리 질러’ 같은 30, 40개 단어 안에서 작사를 하는데 그걸 무슨 창작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요지였죠. 거기 100% 공감하는 건 아니지만 그것이 제가 아이돌 음악에 잘 못 빠져드는 이유인 건 맞거든요. 그렇다면 내가 꼭 아이돌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싶어요. 예를 들어 2NE1의 박봄이라면 <내가 제일 잘나가> 같은 곡도 부를 수 있지만 뭔가 자기 속내가 내비치는 다른 음악도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죠.
고현정_아이돌이라 불리는 친구들을 보며 안쓰러울 때가 있어요. 엄마 마음인지(웃음) 이상한 우려지만, 한류도 그렇고 어떤 굳건히 다져지지 않은 불안한 곳에 아이들이 나가서 너무나 열심히 일하는데 어른들은 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저 애들 괜찮을까? 무대 위는 괜찮을 수 있지만 그 아래쪽은 괜찮을까?
윤상_조금 다른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젊은 친구들이 너무 현실적인 면만 바라보게 되는 것 같긴 해요. 춤추고 노래하고, 오래 지속하기엔 너무 단것만 하면서 청춘을 보내는 듯한 거죠. 젊은 날 영화도 책도 많이 보고 고민도 해야 하는데 아이돌은 이미 완성된 인격을 보여줘야 하고 말도 잘해야 하고 방송도 꿰고 있어야 해요. 거기에 비하면 과거 우리는 참 어리바리했을 거예요. 열여덟, 열아홉 된 친구들이 제가 30대에 가졌던 표정을 지니고 있는 걸 보면 너무 선수가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우려하게 되더라고요. 자유도 적고 그렇다고 음악적으로도 창작하기보다는 주어진 것에 맞춰야 하니까 나이가 들면…. 아, 그런데 결국은 저나 잘해야죠.
고현정_맞아요. 휴. 결론은 항상 “내일 스탠바이 시간에나 늦지 말아야겠다”로 끝나요. (좌중 폭소)
“무의미한 칭찬 따위 개나 줘버려”
윤상_사실 저는 음악을 만드는 일보다 듣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긴 해요.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많이 듣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래서 힘들어요. 상상을 뛰어넘어 넋을 잃게 하는 음악을 들으면 내가 과연 저 수준까지 갈 수 있을까 기분이 편치 않아요. 국내에서도 해외에서도 어쩌면 저렇게 잘할까 싶은 사람들만 제 눈에 보이는 거예요. 그 점이 제일 괴로워요.
고현정_왜 괴로우세요?
윤상_무엇을 만들어도 장르의 테두리는 피해갈 수 없으니 훌륭한 곡에 비해 제 것이 너무 후져 보이니까요. 특히 저는 가사를 쓰지 않거든요. 싱어 송 라이터에겐 가사도 중요한데 저는 자기 이야기가 없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거죠. 글쓰기에는 정말 재주가 없어요. 그래서 말씀하신 <바람에게>를 포함해 제 노랫말을 쓰는 박창학씨가 제게 더욱 운명적인 존재로 느껴져요. 만약 그가 없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6집 《그땐 몰랐던 일들》에 이르면 앨범 전체의 가사가 처음부터 하나의 스토리를 이루기도 하고, 박창학씨 비중이 더욱 커졌죠. 너무 커져서 그가 없인 곡을 못 만드는 걸까 두렵기도 해요.
고현정_자기 이야기가 왜 없다고 생각하세요?
윤상_물론 그의 가사가 객관적으로 좋은 가사라서만이 아니라 제 내면에 잠재된 이야기를 대신해주는 저의 다른 목소리 같은 면이 있어서 좋아하는 것이긴 하죠. 그 친구가 내 멜로디를 먼저 들은 다음 글을 쓰니까 그렇게 믿어요. 한데 제가 또 남의 노래를 들을 때는 별로 가사에 신경쓰지 않아요. (웃음)
고현정_맞아요! 저도 소리가 먼저 들리고 거기에 마음이 가면 가사에 귀를 기울여요.
윤상_하지만 일반적인 대중가요는 듣다 가사가 잘 안 들리면 흥미를 잃게 된다고 해요. 가사가 그 노래를 선호하는 이유가 되는 예도 생각보다 많고요.
고현정_제 경우를 말씀드리자면 아주 잘하는 연기나 좋은 작품을 보는 것과 제가 연기하는 일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에요. 뛰어난 작품과 배우를 보면 훅 가고, 가능하면 많은 관객이 보면 좋겠다 싶기도 하지만 스스로 현장에 서 있을 때는 제 연기에 별로 관심이 없어요. 대신 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즐거운 곳으로 여기를 기억할지에 꽂혀 있어요. 나의 상식과 그들의 상식이 어느 순간 딱 맞아떨어지며 확 웃음이 터질 때 같은 교감의 순간이 이번 작품에는 열네번 있었구나, 아 이번 작품은 일곱번뿐이었네, 에잇! 그런 식이에요.
윤상_더 어려운 과제 아닐까요? 저로서는 처음 접하는 시각인데 그것도 결국은 나름의 방식으로 작품에 몰두하고 있는 거 아닌가 싶네요. 뜻대로 촬영이 안되는데 웃을 수 있는 감독은 없을 테니까요. 연기는 기본이고 그 밖의 요소까지 아우르려고 하니 현정씨가 머리 아플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죠? 그런 걸 누가 바라지도 않잖아요? 그냥 이기적으로 살아요.
고현정_사후적으로 합리화하자면 그런 순간에 제가 행복하더라고요.
윤상_아마 어려서부터 예쁘다, 잘한다는 말을 일상적으로 듣고 살아서 더이상 그런 이야기는 칭찬도 아니고 다른 걸 추구하는지도 모르겠네요.
고현정_구체적이지 않은 칭찬은 듣기 싫어요. 꼭 돈도 안 주면서 가는 길에 떡 사먹으라고 하는 거 같아요. (좌중 웃음) 반면 구체적인 칭찬은 서걱서걱하고 원시적 표현이라고 해도 반가워요.
윤상_감추고 싶어 하는 기질이긴 한데 저도 “무의미한 칭찬 따위 개나 줘버려”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데뷔 초에 팬들이 저를 지나치게 떠받들 때 어차피 여러분은 나나 심신이나 신승훈이나 똑같이 들을 것 아닌가요, 그러니 내게 이러지 마세요 하는 태도가 있었어요. 제가 봐도 훨씬 잘생긴 친구들이 옆에 있는데 나보고 잘생겼다고 환호하면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당혹스러움이었죠. 지금은 예전의 그런 자세가 미안하지만요. 어쩌면 저는 그런 반응을 내치며 음악적으로도 의도적으로 오빠라고 환호하는 팬들을 밀어내는 쪽으로 기울었던 것 같아요.
고현정_칭찬으로 기대를 표하고 부담을 주는 것까진 괜찮은데 집중하지 않고 대충 그냥 “너무 좋아요”, 하는 말은 팬들이라 해도 마냥 좋지는 않아요. 언젠가는 촬영장에 선물 들고 온 분들께, 자기 일은 어쩌고 여기까지 왔냐고, 누가 돈을 걷고 관리했냐고 자리도 마련돼 있지 않은데 왜 무작정 오셨냐고 화낸 적도 있어요. 그래도 진짜 팬들은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니, 없어져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결론은 아니지만, 제겐 윤상씨가 무대에서 직접 본인 노래를 하는 라이브를 방송에서 듣고 싶은 바람이 있어요.
윤상_대한민국의 음악, 예능 PD들이 저를 보는 시각이 어떤지 누구보다 현실적으로 알고 있어요. 다가가려면 제가 좀더 노력해야겠죠. 아직은 그런 자신이 없고요. 내년쯤 크고 작은 공연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안타깝게도 한 사람 앞에서 노래해본 적은 없고요. (웃음) 보통 사람들 생각에는 가수라면 가까운 사람에게 전화로 노래 불러주고 할 거라고 상상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민망해서….
고현정_사실 전 이벤트하는 남자들이 싫어요. 일단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너무 민망해요. (웃음) 궁금한 질문의 반도 못했지만 서로 일이 기다리니 오늘은 이만 보내드려야겠죠? 저는 내일 물속에 들어가는 장면을 촬영해요.
윤상_저런! 당연히 실내에서 찍겠죠?
고현정_야외신도 있어요. 부산 앞바다에 한번 빠져야 해요. 세상의 모든 눈먼 자들이 눈뜨기를 기원하면서 빠질 거예요.
윤상_(웃음) 인당수… 심청이가 되겠다는 말이네요.
고현정의 선물
to. 윤상
후각이 평균보다 예민한 고현정은 거의 예외없이 엷은 향을 두르고 다닌다. 그녀를 마주친 사람들은 전나무 숲이나 장미밭이 지척에 있는 듯한 느낌을 코로 받곤 한다. 윤상을 위한 고현정의 선물은 실내에 깔고 덮는 천에 뿌리는 아로마 제품들. 가수 강수지가 불러 여러 세대에 걸쳐 사랑받은 윤상의 노래 <보랏빛 향기>가 스쳐갔다. 안개처럼 내려와 서리는 이 뮤지션의 음색에도 어울리는 선택이다. 더불어 영화 촬영 중인 부산의 도자기 공방에서 골랐다는 은은한 빛의 아담한 머그컵 한쌍도 건네졌다. 윤상이 대학 재학 시절 도자기공예를 전공했던 사실을 고현정이 미처 몰랐던 터라 더욱 유쾌했던 우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