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그 코뮌의 선술집에선 누구나 영웅이다
2011-12-08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단순한 동화 <르 아브르>가 전해주는 복잡한 감동의 실체에 대하여

괴짜라고 이름 붙일 만한 감독들은 많다. 영화광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감독들도 많다. 혹은 단순미를 추종하는 감독들도 많다. 그런데 이상의 조건을 하나로 모으면 한 사람의 이름이 얼른 떠오른다. 핀란드의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다. 한국에서는 90년대에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가 개봉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2000년대 이후에는 점점 전세계적인 감독이 되어 <과거가 없는 남자> <황혼의 빛>으로 대가의 자리에 올랐다. 그 작품들은 우리에게도 찾아왔다. 그의 새로운 삼부작의 첫 작품이라는 <르 아브르>는 어떤 영화일까. 그냥 척 봐도 간단한 동화가 맞긴 한데, 이 영화의 감동이 보통이 아니다. 이 감동은 어디서 어떻게 울리는 건가, 우린 그게 궁금하다. 아마, 여러분도 그럴 거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가장 존경한다는 일본 감독 오기가미 나오코가 헬싱키를 배경으로 조용하고 아담한 영화 <카모메 식당>을 만들었을 때, 적어도 그녀는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제대로 사랑한 적이 한번도 없거나 너무 사랑하여 극구 반대의 버전을 만들게 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카모메 식당>은 안빈낙도의 낙원이며 무료한 천국의 낮의 현실이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대사는 적지만 소동은 많고 착한 사람들이 살지만 종종 잔혹하거나 그걸 치열하게 이겨내야만 하는 밤의 동화다. 오기가미 나오코가 생각한 것처럼 무료한 평화의 세계가 아니다.

카우리스마키의 세계를 제대로 공유한 감독은 짐 자무시다. 지상의 다섯 도시, LA, 뉴욕, 파리, 로마, 헬싱키의 새벽 같은 시각의 택시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연출한 영화 <지상의 밤>에서 짐 자무시는 헬싱키를 가장 마지막에 놓는다. 만취한 세명의 너절한 노동자들, 게다가 그중 하나는 해고된 직후라 택시 안은 아수라장이다. 누구의 인생이 더 지랄 같은지 마치 내기라도 하자는 듯 서로 자기의 불행을 떠들고 있을 때 택시 기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며 조용히 말을 꺼내자 그들의 하소연은 잦아든다. 새벽의 푸르스름한 눈밭을 걸어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으나 다음날이 희망이 될지 아닐지 영화는 모른다. 비극이 상존하는 가운데 더 비극이 있고, 어느 비극은 또 다른 비극보다 희망적일 수도 있다는 것. 카우리스마키 영화 세계란 그렇게 허망하고 어둡고 치열한 것들과 얽혀 있는 비극이거나 희극이다.

‘항구도시 삼부작’ 중 첫 번째 작품

<헬싱키, 포에버>라는 걸출한 도시 에세이를 연출한 감독이자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친구이며 그의 영화에 관한 한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핀란드의 평론가 피터 폰 바흐는 <르 아브르>가 카우리스마키의 앞선 두개의 ‘루저 삼부작’(그러니까 <천국의 그림자> <아리엘> <성냥공장 소녀>가 그 첫 번째, <어둠은 걷히고> <과거가 없는 남자> <황혼의 빛>이 두 번째)에 이은 세 번째 루저 삼부작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카우리스마키는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이 새로운 삼부작의 이름을 이미 ‘항구도시 삼부작’이 될 것이라고 밝혔으며 나머지 두 작품을 스페인과 독일에서 찍을 것이고 다음 영화의 제목은 스페인의 항구도시 비고에서 찍을 <비고의 이발사>라고 예고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존경하게 만든 놀라운 영화 <르 아브르>, 이 영화를 너무 사랑한다!” 헝가리의 위대한 영화감독 벨라 타르는 벌써 이런 찬사를 남겼다.

한편 피터 폰 바흐는 이렇게도 설명한다. “이것은 <과거가 없는 남자>와 같은 동화다. 프랭크 카프라 또는 비토리오 데 시카 또는 그런 영화를 만들던 계열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그 어떤 휴머니스트들의 영혼 안에서 다시 만들어낸 동화다. (중략) <르 아브르>는 더 좋은 세계와 그 가능성들에 대한 저항할 수 없는 감정을 지닌 채 순진하면서도 지적이고 친밀하면서도 미니멀리즘적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프랑스어로 만든 두 번째 영화의 이 위대한 아름다움은 이러한 주제의 상호 연관성 안에 놓여 있다: 존엄, 연대, 나이, 그리고 죽음.” 위대한 감독의 찬탄과 명석한 권위자의 분류와 정의, 그것만으로도 우린 <르 아브르>를 호의적으로 느끼기에 족하다. 그러나 보르헤스가 그의 소설에서 중국 백과사전에 적힌 동물들을 분류하며 “황제에 속하는 동물, 향료로 처리하여 방부 보존된 동물, 사육동물, 젖을 먹는 돼지, 인어, 전설상의 동물, 주인 없는 개” 등등으로 말했던 것만큼 신묘하게는 못하더라도, 솔직히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 관하여 우리 방식대로 분류하고 설명하고 싶은 생각을 지금 참기 어렵다.

가난한 예술가, 정육공장의 직원, 외로운 야간 경비원, 실직하는 남자, 죽으려는 자살남, 냄새나는 청소부, 깡패들에게 한방 후려 맞고 기억을 잃은 남자가 카우리스마키의 남자들이다. 그들이 ‘실직’을 하는 것은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하나의 사태이자 종종 영화의 시작이다. 이 사태가 벌어지면 성냥공장 여직원, 늙은 웨이트리스, 또 늙은 의상실 여직원, 병든 아내, 시골의 아낙네와의 ‘사랑’이 찾아오거나 혹은 존재하던 사랑이 위기에 처한다. 못생긴 남자와 못생긴 여자 중에서도 가장 못생긴 남자와 가장 못생긴 여자가 주인공이며 그들 사이에는 이제 ‘꽃다발과 빵과 돈’이라는 낭만과 생존의 물질들이 수시로 오간다. 그들은 위안을 위해 ‘싸구려 영화 관람이나 밴드의 음악공연’장을 드나들기도 할 것이며 영화는 오래 그것을 보여줄 것이며 종종 그것이 기적처럼 사태를 해결할 것이다. 때로 인물들은 ‘허름한 선술집’에서 우두커니 서 있거나 몇 마디 말로 우정을 나누거나 아니면 난동이라도 부릴 것이다. 그렇게 하여 ‘아이러니와 유머러스한 상황’을 통과하고 혹은 ‘범죄와 휴머니티’의 사이에서 ‘비극과 기적’이라는 결말 어딘가로 향해 갈 것이다. 때로는 총을 맞고 쓰레기장에 처박히는 비련의 주인공으로 남게 되기도 하며, 기적이 도래하기도 한다.

모조와 단순성의 미학

<르 아브르>의 사태도 가난한 자가 더 가난한 자를 만나 시작된다. 남의 상점 앞에서 그 짓을 하지 말라며 구두통을 차이는 일이 다반사인 르 아브르 항구의 중년의 구두닦이 마르셀(앙드레 윌름)이지만, 그래도 런던에 있는 엄마를 만나기 위해 컨테이너에 실려가다가 르 아브르 항구에 인접하여 경찰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밀입국 흑인 소년 이드리사(블론딘 미구엘)보다는 나은 삶을 살고 있다. 아니,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마르셀의 착한 아내(카티 오티넨)는 지금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마르셀이나 이드리사나 차이 없이 불행하다. 그러나 우연히 둘은 만났고 마르셀은 경찰들의 눈을 피해 이드리사를 런던에 있는 엄마에게로 보내주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찾고 그의 가난한 동네의 주민들도 그를 돕는다. 이 영화에 관하여 카우리스마키는 “사람을 보아야 한다. 모든 것이 잘못되어가고 있을 때 그 사람이 어떤 최선을 다하는지를 보아야 한다”라고 했다. 이게 무슨 뜻일까.

그런데, 그 뜻을 묻기 이전에, 들을 때마다 실은 좀 어이없기까지 한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연출론이 여전히 <르 아브르>에도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부터 말해야 할 것 같다. 가령 이런 식이다. “스타일에 관해서라면 <르 아브르>는 프랑스영화 스타일 안에서 네오리얼리즘의 어떤 종류를 재창조하려는 시도”이다. 이 말은 비토리오 데 시카의 영화와 마르셀 카르네의 영화를 결합한 재창조라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런데 대체로 이렇게 말하는 감독들의 영화는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하며 대개는 지식에 물든 얼치기 시네필인 경우가 매우 많다.

그런데 카우리스마키는 한술 더 뜬다. “내 영화의 세트 디자인 컬러의 기반이 되는 푸른 톤의 회색은 장 피에르 멜빌에게서 가져온 것이고, 거기에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내가 좋아 보였던 붉은색 주전자 때문에 붉은색을 덧입혔을지도 모른다.” 그는 아주 끝까지 간다. 예전부터 그런 식으로 말해왔다. <어둠은 걷히고>를 만든 다음 <포지티프>의 미셸 시망에게 답하기를, “이 영화는 30%는 오즈 야스지로, 30%는 비토리오 데 시카, 15%는 더글러스 서크, 20%는 에드워드 호퍼, 10%는 프랭크 카프라다. 그것이 105% 영화를 만든다! 그 모든 것 안에 나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영화감독이 아니다: 내가 바로 블러디 칵테일을 만드는 사람인 거다!”라며 마치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대답했던 사람이 카우리스마키다.

“영화란 일종의 복제품(copy)으로 각자의 스타일에 따라 다양해지는 것”이라는 그의 믿음이 그런 식으로 말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말할 때 그에게는, 고전기 이후 영화의 발전은 없으며 결국 고전기 영화 산물들을 모아서 베끼고 조합한 다음 새로운 스타일로 복습하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 같다. 카우리스마키라는 시네필 출신의 이 감독은 그게 최상의 영화적 구현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한마디로 그의 미학은 고전영화들에의 모조다. <르 아브르>를 보고 나면 그의 말투를 흉내내어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이 영화는 프랭크 카프라식의 기적을 예정해 놓고, 더글러스 서크 혹은 파스빈더 영화의 관계 내지는 영혼들이 만나, 비토리오 데 시카의 인물들의 모험처럼 진행되어가면서도, 브레송의 제스처로 심플하게 직진하는 한편 자주 멈추어 서서 오즈 야스지로처럼 탄식한다.’ 부부가 “여보, 체리꽃이 피었네요”라고 말하는 <르 아브르>의 마지막 장면은 카우리스마키도 인정한 것처럼 “완벽한 오즈의 숏”이다.

하층민과 보헤미안들의 이야기

그러니 전대미문의 미스터리가 여기에 있다. 이 뻔뻔하게(?) 자인된 모조품의 진열장이 보는 이의 가슴을 치지 않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사실이다. 그게 대개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진실이다. 도대체 모조품의 진열장이 어떻게 그걸 가능하게 하는가. 물론 카우리스마키는 “내 작업 방식은 아주 일본적이다. 모든 예술의 기본은 장식이나 치장 없는 단순화다”라고 말하거니와 “그의 영화들을 정말 좋아한다. 그 단순성이 참 좋다”라고 짐 자무시 역시 힌트를 주고 있는 것 같지만, 그에 관한 분석의 과정은 실은 매우 복잡하며 더 많은 설명을 요할 것이다. 이를테면 과장된 무표정, 정지, 시선의 내러티브, 침묵의 밀도, 커팅과 트래킹의 순간들, 이격된 인물간의 거리가 주는 정서 혹은 인물의 접촉 등이 일으키는 영화적 매혹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말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르 아브르>의 감동적인 몇 장면에 관한 묘사로 대신하려고 한다. 남편 마르셀이 외상값 독촉을 이겨내며 겨우 빵을 사와 식탁 위에 빵과 구겨진 지폐와 동전 몇닢을 내려놓을 때, 그런 그를 아내가 살짝 웃으며 물끄러미 볼 때 이 장면은 어딘가 슬프고 아름답다. 혹은 마르셀과 이드리사가 만나는 장면은 더 슬프면서도 믿음직하다. 배가 고파 항구의 계단으로 내려가 그저 소금 친 달걀과 빵 한 조각으로 점심을 때우려던 마르셀의 눈에 들어온 건 몸의 삼분의 일이 물속에 잠겨 있는 흑인 소년 이드리사다. 몇번의 시선이 둘 사이에 오간다. 이드리사가 묻는다. “여기가 런던인가요?” “여긴 르 아브르야.” 마르셀이 말한다. “배고프니?” 다시 마르셀이 말한다. 소년이 고개를 끄덕인다.

오가는 시선, 무표정한 놀람, 그 어느 요구도 과잉도 없는 상태에서의 친밀함이 이 장면을 볼 때 가슴을 메이게 하며 이것으로 이들의 우정과 연대는 이미 모두 성립한 것이다. 그리고 온갖 역경을 지나 그들의 마지막 작별과 이 영화의 마지막 순간들. 그러니 문제는 이제 복잡해진 것이다. 우린 카우리스마키의 영화가 모조품이며 극도의 단순화라고 했고, 그 모조와 단순성의 미학이 복잡한 시네마틱 작동법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는 추측도 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런 분석을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의 감정의 물결은 거의 시정에 취해 일렁인다는 사실을 이런 장면들을 마주칠 때마다 느낀다는 것이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한 평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카우리스마키를 단순히 사회적인 감독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는 시인이다. 그는 프랑스인들이 보들레르를 더이상 읽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에 분노하기조차 한다.” 공감은 가지만 수정의 필요가 느껴지는 말이다. <르 아브르> 영화 속 대사와 카우리스마키 본인의 자전적 일화 하나를 차례로 전하고 싶다. 영화에서 마르셀은 문득 이드리사에게 우쭐대듯 혹은 향수에 젖은 듯 말한다. “내가 한때는 파리의 보헤미안이었어.” 마르셀을 연기한 앙드레 윌름은 카우리스마키의 <보헤미안의 삶>에서 실제로 파리의 가난한 예술가 마르셀을 연기했다. 그러니 이것은 단순한 조크인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아직은 영화감독이 되지 못하고 우편집배원으로 혹은 건설공사 인부로 낮에는 일을 하고 저녁에는 영화를 보러 다니던 카우리스마키에게 한 친구가 앙리 뮈르제의 <보헤미안 생활의 정경들>(19세기 프랑스 파리를 무대로 한 보헤미안 예술가 네 사람의 삶을 담은 연작 단편소설)을 선물했을 때 그는 50번 이상을 읽고 다짐했다. 이걸 영화로 만들 것이다. 친구들은 너는 그냥 우편집배원일 뿐이라고 비웃었지만 하층 노동자 카우리스마키는 결국 감독이 되었고 <보헤미안의 삶>이라는 영화를 만들었으며 하층민과 보헤미안들의 이야기를 지금까지도 하고 있다. 그는 <르 아브르>에서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고 있는 것이다.

카우리스마키는 <르 아브르>의 마르셀의 행동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한때 파리의 보헤미안이라고 자처했던 그는 모든 그의 희망을 잃은 것이겠지만 지금 그는 수십년 뒤에 도덕적 오르막을 경험한다. 그가 ‘무언가’에 대한 책임을 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사회의 가능한 가장 낮은 계층을 본 것이다. 그는 더 나은 직업과 돈을 벌기 위해 그 자신만을 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그 사람들과 더 가까운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자, 여기서 그가 ‘무언가’, ‘되기’를 바랐으며 그 무언가가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그게 우리의 결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평등의 동화, 코뮌의 동화

“보헤미안은 칼 마르크스의 글에서 의미심장한 문맥에 나타난다”라고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라는 명문의 글을 시작하고 있는 것은 발터 베냐민이다. 베냐민은, 칼 마르크스가 “신분이 모호하고 환경에 따라 유동하는 온갖 잡동사니 패거리(그러니까 카우리스마키의 인물들에 관한 묘사처럼 들리기도 하는)”인 “보헤미안을 직업적 반란 음모가들 속에 포함시킨다”고 지적한다. 한편 베냐민은 “보들레르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으면, 그가 이런 유형의 정치가들과 닮았다는 점을 언급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보들레르의 정치적 통찰은 근본적으로 이 직업적 음모가들의 그것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말도 잊지 않고 있다. 그러니 <카이에 뒤 시네마>의 평자는 틀렸다. 카우리스마키를 두고 단순히 사회적 감독이 아니라 시인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보들레르가 그러했던 것처럼 카우리스마키는 보헤미안이며 직업적 반란 음모가이며 때문에 사회적으로 출중한 시인이다.

노래 하나를 기억해내자. “노동계급의 영웅이란 뭔가 되어볼 만한 것”(Working class hero is something to be)이 아니냐고 묻고 또 물으며 노래했던 것은 존 레넌이었다. 그를 시인이 아니라고 혹은 그의 노래가 사회적이지 않다고 반문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그의 노래는 아름답다. <르 아브르>의 마르셀이 ‘무언가’, ‘되기’를 바랐으며 그가 되고자 했던 것이 ‘사람들에게 더 가까운 사람’이었음을 기억해주면 좋겠다고 우린 앞서 말했다. <르 아브르>는 마르셀이라는 노동계급의 한 사람이 영웅이 되어보아도 괜찮지 않겠냐고 이야기하는 동화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보고 나면 저절로 카바레의 어느 불빛에서 조금 엉망으로 끌어안고 있는 중년의 남녀 혹은 말없이 술에 취해가는데도 속은 모르겠는 선술집의 사내들 또는 초라한 집의 식사 식탁 위에서 오가는 예술적 소동이 떠오른다. 영화의 도굴꾼이자 보헤미안이자 보들레르를 꿈꾸는 예술가 카우리스마키는 그가 할 수 있는 고전적 영화의 각양각색 고물들을 모아 바로 그 코뮌의 선술집을 차리거나 강력하고 원대한 코뮌의 바리케이드를 만들기를 영원히 꿈꾸는 것 같다. <르 아브르>가 동화라고 누구나 말할 수 있다. 다만 이 동화는 상징이 없는, 그냥 사태를 직진으로 밀어붙여 지어낸 평등의 동화이며 코뮌의 동화다. 이 동화의 형식이야말로 카우리스마키가 믿어 의심치 않는, 그리고 그가 염원하는, 영화라는 그 자신의 가상의 국가가 지닌 강력하고 낭만적이고 아이러니한 레종데타(국가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하여 지켜야 할 국가의 행동 기준)다. 이것이 이 간명한 영화 <르 아브르>가 주는 복잡한 감동의 실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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