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였다. 영화에서는 선동열이 최동원을 우러러보는 쪽이었는데, 사진촬영 중에는 조승우가 양동근을 흘끗거리는 쪽이었다. 쉴새없이 미간을 쥐었다 놓았다 부산히 근육을 놀리는 조승우 뒤에서 양동근은 해탈한 부처인 양 무덤덤한 표정으로 떡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두 시간 남짓 지켜본 인상으로 섣불리 판단하건대, 그는 승부사의 기질을 아예 혹은 거의 타고 나지 않은 듯했다. 그는 라이벌과의 설전보다 자신과의 싸움에 몰두하는 인간형에 가까웠고, 그가 해석해낸 <퍼펙트 게임> 속 선동열도 비슷했다. “선동열 감독님이 최동원 감독님에게 품었던 감정은 단순했던 것 같아요. 주변에서 자꾸 비교하는 소리 듣기 싫으니 확 그냥 이겨버리고 잊어버리자. 뭐 그런 마음 아니었겠어요?” 선동열 감독의 당시 심정이야 알 길이 없지만 양동근의 성미는 짐작이 갔다.
양동근은 야구공 한번 던져본 적 없는 초짜 중의 초짜였다. 마이클 조던의 팬이지만 그가 야구로 외도했던 시기에조차 경기 한번 본 적 없다고 했다. “야구는 전혀 몰라요. 알고 싶지도 않고.” 그래도 그는 해태 전 선발투수 선동열이 돼야만 했다. 그래서 독종처럼 연습했다. 훈련 2주 만에 얼추 비슷하게 폼을 흉내내서 주변을 놀라게 했을 정도다. 폼이 제대로 나와야 연기에도 힘이 실린다는 사실을 간파한 그는 선동열 감독을 만나 조언을 구하고도 싶었다. 하지만 금세 촬영이 시작되고 말았다. “못 뵀으니 혼자서 알아서 하는 수밖에 없었죠.” 결국 그는 훈련과 촬영 기간을 합쳐 6개월간 오로지 자신의 몸뚱이만으로 부딪혀 야구를 터득했다. 아니, 정확히 말해 투구의 품새만을 연마했다. “세세히 나누면 공을 준비해서 던질 때까지 구분 동작이 100개도 넘어요. 그걸 어떻게 한호흡으로 이어내느냐가 문제죠.”
끈덕진 배우 양동근을 거쳐 탄생한 야구선수 선동열은 묵직한 매력을 지녔다. 물론 그전에 투구 폼으로만 봐도 최동원이 팔색조라면 선동열은 구렁이였다. 언뜻 둔해 보이지만 실은 민첩한 혀로 목표물을 정확히 잡아채는 노회한 구렁이. 그가 두텁고 무거운 몸으로 낮게 굴려낸 공은 그의 손끝을 벗어나기가 무섭게 곧장 포수의 글러브에 안착했다. 그 구렁이의 미끈한 포복자세를 양동근은 특유의 말투와 몸짓으로 스크린 위에 옮겨냈다. 그 자태가 완벽히 선동열의 것은 아닐 수 있으나 온전히 양동근의 것임은 확실했다. 어떻게 연습했냐는 질문에 그는 말보다 몸이 앞섰다. “선동열 감독님의 폼은 정말…. 이렇게 확, 다음에 슉…. 준비자세, 호흡, 다리 높이, 팔의 각도, 리듬, 다 중요한데…. 아, 설명하기가 어렵네.”
그럼에도 그는 끝내 야구에 취미를 붙이지 못했다고 한다. 한데 야구에 일말의 흥미도 없었다면 왜 그는 어깨가 빠질 정도의 고통과 중노동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영화에 뛰어든 것일까. 답은 “조승우 때문”이었다. “시나리오도 좋았지만 어떤 배우가 저와 작품을 같이 한번 해보고 싶다고 연락해온 경우가 처음이었어요.” 과연 양동근과 조승우의 앙상블은 이 영화의 주요 관전 포인트다. 말의 점성부터 몸의 실루엣까지 여러모로 대조적인 두 배우는 첫 시퀀스 이후로 한번도 마주치지 않으면서도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했다. 뿐만 아니라 양동근은 손병호, 마동석 같은 선배들과 연기하면서 “아주 오랜만에 배우로서의 재미를 느꼈”다고 했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호흡이 있었어요. 상대의 액션과 리액션에 따라 저도 연기 패턴을 조금씩 바꿀 수 있었고. 같이 만들어가는 재미가 컸죠.”
병원을 다니고 진통제를 맞으며 함께 버텼던 기억 때문인지 양동근은 촬영이 끝났는데도 촬영장을 쉽게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생전 처음으로 마지막 날 스탭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고생하셨다고 인사를 건네봤어요.” “내일이면 또 공 던지러 나가야 할 것 같아서” 발걸음을 떼기 힘들었다는 그는 그러나 지금은 또 선동열이라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씩씩하게 원래의 생활로 돌아온 상태다. “촬영 끝나면 휴지통 비우듯이 머릿속을 지워버려요. 어느 장면에서 어떻게 연기했는지 다시 생각하지 않는 성격이에요. 오늘 같은 인터뷰만 없어도 생각할 일 없죠.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데 충실하면 되는 거고.” 하지만 그의 몸은 그의 머리보다 더 오래 선동열을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그의 입은 다 잊었다고 말하는데 그의 손이 너무도 익숙하게 야구공을 감싸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