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vs <택시 드라이버>
20세기 뉴욕의 아저씨, 21세기 서울 출현?
한 남자가 거울 앞에 서서 도루코 면도날로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있다. 시퍼런 면도날과 시꺼먼 두발이 일으키는 마찰음이 오싹하다. 몇번을 그러다 그는 면도날을 내려놓고 바리캉을 집어든다. 그리고 박력있게 두피 위로 바리캉을 몬다. 아까보다 훨씬 많은 양의 머리카락이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 부분이 기억나는지 자문해보자. 아마 당신의 머릿속에는 이 열개 정도의 숏들이 사라졌을 확률이 높다. 그 다음에 오는 한개의 숏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 숏에서 우리는 남자가 된 원빈을 만났다. 그러니까 해맑은 웃음이 천진했던 소년 원빈이 아닌 남자 원빈이 자상이 뚜렷한 상반신을 온전히 드러낸 채 거울에 비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리기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던 그는 지난해 한국영화가 낳은 최고의 나르키소스였다. 그러므로 아저씨의 뿌리는 <테이큰>의 리암 니슨이 아니다. 딸을 납치한 범인을 찾기에 급급한 아버지는 목적지를 향해 질주할 뿐 자기도취에 빠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가 아저씨를 더 잘 알 것 같다. <택시 드라이버>에서 트래비스는 상원의원을 저격하려고 총기를 빠르게 꺼내드는 연습에 몰두하는데, 그 역시 거울 속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경찰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어린 창녀를 구해낸다는 설정도 <아저씨>와 비슷하다. 그러니 2010년 서울에 사는 아저씨의 과거는 1976년 뉴욕에 살았던 트래비스에게 물어야 맞을 것이다.
<슈퍼 에이트> vs <괴물>
한강의 괴물이 미국 오하이오주까지?
<슈퍼 에이트>에 나오는 괴물을 보고 어디서 봤다 싶었다면, 당신의 예감은 타당하다. 걷는 폼으로 보나 식습관으로 보나 딱 <괴물>의 그놈이니까. 하지만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한강에 살던 괴물을 오하이오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발견하게 되리라고. 어쩌면 봉준호 감독은 괴물의 이민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런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J. J. 에이브럼스 감독이 <슈퍼 에이트>를 만들며 직접 봉준호 감독에게 <괴물>을 참조했다고 미리 양해를 구했다는 소문. 봉준호를 향한 에이브럼스의 팬심은 익히 알려져 있다. 칸에서 <괴물>을 본 에이브럼스는 봉준호의 재능에 찬탄을 금치 못한 나머지 그를 <클로버필드> 시사회에 초대했으며, 언젠가는 봉준호와 함께 작업하길 꿈꾼다고 고백한 적도 있다. 그러니 그 소문이 진짜 같기도 하다. 그가 봉준호의 <괴물>에 친밀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괴물을 이해하는 방식이 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봉준호의 괴물이 억눌린 한국인의 상처를 수면 위로 드러냈던 것처럼 에이브럼스의 괴물도 어머니를 잃은 소년의 슬픔을 은유한다. 하지만 두 괴물의 처지는 좀 다르다. 그저 지구에 불시착했을 뿐인 미국의 괴물에게는 고향도 미래도 있다. 거처도 제법 으리으리하다. 반면 한강의 괴물은 원효대교 북단 우수구 셋방살이에서 겨우 벗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화염병을 맞고 숨을 거두고 만다. 그래서인지 한강의 괴물이 훨씬 더 측은하다.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비정상적으로 태어난 괴물이라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