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진보와 진부 사이
2012-01-26
글 : 이후경 (영화평론가)

<의뢰인> vs <어 퓨 굿 맨>

의뢰의 기본 공식
법정드라마 속에서 벌어지는 재판은 왜 그리도 약자에게 불리한 게임인지. 웬만하면 그들은 이길 수 없다. 법정드라마의 모범적 사례로 여겨지는 영화들이 도입부에 특히 공을 들이는 건 그래서다. 관건은 이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가, 질 게 뻔해 보이는 싸움에 왜 뛰어들어야 하는가 같은 질문들을 신속 정확하게 해결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기꺼이 억울한 자들의 편이 되어줄 수 있다. <어 퓨 굿 맨>에서는 야구장 장면이 그런 기능을 하고 있다. 판결이 나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소송을 이끌어가야 하는 캐피 중위(톰 크루즈)와 피의자들의 결백을 믿는 갤로웨이 소령(데미 무어)이 펜스를 사이에 두고 옥신각신 말다툼을 벌이는데, 그때까지 둘은 한편이지만 한편이 아닌 모양새다. 그러다 갤로웨이가 자리를 뜨며 “레드 코드(폭행을 은폐하기 위한 관타나모 내 군대 용어)가 뭔진 압니까?”라고 캐피를 훅 찌르는데, 그때부터 캐피도 승리의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할리우드식 법정드라마를 면밀히 연구해 만든 <의뢰인>의 도입부는 그 야구장 장면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피칭 연습에 반쯤 정신을 팔고 있는 강 변호사(하정우)에게 건수를 물어온 브로커는 “한철민은 꼭 강 변호사가 맡아주길 바라던데…”라며 떡밥을 던진다. 그에게 강 변호사가 관심없다며 그 이유를 친절히 설명하지만 분위기로 봐선 그도 결국 브로커의 낚시질에 걸려들 것 같은 느낌이다. 결국 법정드라마는 처음에 잘 낚아야 한다. 그것이 관객에게 방청을 의뢰하는 법정드라마의 기본 공식이다.

<베리드> vs <CSI 과학수사대> 시즌5

밀실의 공포
지난해에 로드리고 코르테스라는 스페인 감독의 <베리드>를 보고 “오, 신선한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당신이 미드와 쿠엔틴 타란티노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뜻이다. 코르테스를 말하고 있는데 미드와 타란티노 얘기가 왜 나오냐고? 그건 그가 이미 2005년에 방영된 <CSI 과학수사대> 시즌5 피날레에서 CSI 요원 하나를 같은 방식으로 묻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타란티노의 버전에서는 누명을 뒤집어썼던 여죄수의 아버지가 등장해 CSI 요원 닉을 납치, 매장하는데, 타란티노가 코르테스보다 얼마나 치밀하고 독한지 알 수 있다. 우선 두 감독이 관을 설계한 방식이 다르다. 코르테스가 만든 관은 그저 평범한 나무 궤짝이지만 타란티노가 만든 관은 밀폐된 투명 아크릴 관이어서 산소량도 계산할 수 있고 주변 토양도 알 수 있다. 타란티노가 관에다 환풍기와 카메라를 연결시킨 방식은 또 얼마나 섬뜩한지. 요원들이 두려움에 떠는 닉을 지켜보고자 카메라를 켜면 환풍기가 꺼지고, 카메라를 끄면 환풍기가 켜진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요원들은 자신들이 닉을 서서히 질식시키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카메라를 계속 켜두려 한다! 심지어 타란티노는 자살하고 싶어지면 유언을 남기라며 관 속에 총과 녹음기를 넣어주었다. 과연 <킬 빌>의 감독답다. 그에 비하면 코르테스는 관 속에 휴대폰을 넣어 드라마를 쥐어짜내는 반칙을 쓰고 있다. 당연히 밀실에 갇힌 자의 공포도 잘 전달되지 않는다. <베리드>가 시시했다면, 제대로 된 밀실공포극을 원한다면 타란티노 버전을 찾아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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