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화가 사랑한 스파이-2
2012-02-14
글 : 주성철
글 : 장영엽 (편집장)

코드네임 콘돌 Three Days of the Condor (1975) / 시드니 폴락

제임스 그래디의 원작 <콘돌의 6일>을 3일로 압축했다. CIA 하부조직의 말단 자료조사원 조셉 터너(로버트 레드퍼드)는 점심을 먹으러 나간 사이 사무실 동료들 모두가 살해됐음을 발견한다. 뜻하지 않게 목숨을 구하게 된 터너를 죽이기 위해 다른 조직원들이 그를 추적한다. 터너는 문학협회로 위장한 조직에서 세상의 모든 출판물을 읽고 분류하고 정보를 제공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그러니까 다른 스파이들처럼 무기와 호신술에 능한 자가 아니지만 어느 순간 살아남기 위한 사투를 벌인다.

초보적인 형태의 위치추적 장치라든지 영어로 얘기하던 중 갑자기 사람들이 지나가자 알아듣지 못하게 불어로 얘기하는 스파이의 모습 등 탄탄한 시나리오 안에서 아기자기한 아날로그적 기법과 설정들이 정겹다. 냉전 막바지이던 시기, 중동 석유시장을 탐내는 미국을 묘사한 점은 지금 봐도 꽤 의미심장하다. 로버트 레드퍼드는 이듬해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치는 기자로 출연한 <대통령의 음모>에서도 유사한 캐릭터를 연기했으며, 세월이 흘러 토니 스콧의 <스파이 게임>(2001)에서는 정년 퇴임을 앞둔 베테랑 CIA 요원을 연기했다.

바늘 구멍 Eye of the Needle (1981) / 리처드 마켄드

<자칼의 날>과 <채털리 부인의 사랑> <샤이닝>이 만나면? 바로 <바늘 구멍> 같은 작품이 탄생할 것이다. 냉전의 긴장감이 사라진 1980년대, 스파이영화는 멜로, 스릴러,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를 적극적으로 차용하며 활로를 모색했다. <바늘 구멍> 또한 2차 세계대전의 성패를 손에 쥔 유능한 독일 스파이의 행보를 다루지만, 그가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머물게 된 외딴섬에서 등대지기의 아내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 또한 이야기의 중요한 축을 차지한다.

‘잭 바우어’ 키퍼 서덜런드의 아버지이자 <매쉬> <보통사람들> <JFK> 등의 작품으로 주목받은 도널드 서덜런드가 암호명 ‘바늘’이라 불리는 독일 스파이 헨리 페이버로 출연한다.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이라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날렵한 나이프를 배에 꽂아넣는 그의 독보적인 암살 솜씨 때문에 첩보물로서의 긴장감은 덜한 편이다. 오히려 <바늘 구멍>은 등대지기의 아내가 독일 스파이의 정체를 알아채는 후반 30분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넣는다. 총 한번 쏴본 적 없는 여자가 독일 최고의 킬러를 상대로 기암절벽을 오르내리며 어설프게 총격전을 벌이는 마지막 결투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다.

위험한 장난 The Falcon and the Snowman (1984) / 존 슐레진저

<위험한 장난>의 원제는 ‘매와 눈사람’(The Falcon and the Snowman)이다. 첩보물 장르에 속하는 영화니 이 제목이 암호명쯤 되리라 짐작하는 이도 있겠지만, ‘매’와 ‘눈사람’은 캘리포니아 근교에 살던 평범한 두 청년 보이스와 리의 별명일 뿐이다. 어찌됐든 <위험한 장난>은 매 사냥을 좋아하고, 마약 거래로 돈을 벌던(그래서 별명이 ‘눈사람’이다) 이 청년들이 냉전 시대에 어떻게 스파이로 몰려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영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역사에 한획을 그은 첩보의 귀재들을 스크린 위에 부활시킨 여느 실화 기반 스파이영화와는 다른 길을 간다. 그럴싸한 액션장면이나 첩보물로서의 긴장감도 없고, 미 정보기관에서 일자리를 얻은 보이스가 정부에 대한 분노로 홧김에 소련에 기밀 정보를 넘긴다는 내용도 황당하고 허무하다.

운이 좋았다면 엉뚱한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을 보이스와 리의 도발에 정색하고 달려드는 미국 정부의 신경증적인 태도가 바로 <위험한 장난>이 보여주고자 하는 난센스다. 더불어 이 영화에선 젊은 마약상 리로 분한 청년 시절 숀 펜의 모습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있다. 스파이 혐의로 투옥되는 순간에도 평소 가고자 했던 코스타리카에 수감될 수는 없냐고 묻는 그의 천진난만한 연기가 깊은 여운을 남긴다.

트루 라이즈 True Lies (1994) / 제임스 카메론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2005) 등 여러 영화들이 영감을 얻은 화려한 무도회장에서의 탱고, 스파이의 아내와 가족을 둘러싼 에피소드 등 스파이영화의 기본기와 테크닉에 꽤 충실하다. 해리(아놀드 슈워제네거)는 핵테러리즘 전문 미합중국 최고비밀기관 오메가 섹터의 스페셜 에이전트다. 아내 헬렌(제이미 리 커티스)에게도 비밀로 하고서 그는 컴퓨터 회사의 세일즈맨으로 위장 취업 중이다. 그러던 중 구소련과 연계된 이슬람원리주의 핵테러리스트들을 상대로 작전을 펼치게 된다.

국제 정세에 민감한 스파이영화라기보다 찰떡궁합 감독과 배우가 만나 만들어낸 순도 100%의 오락물이다. 마이애미의 고속도로 다리 폭파신과 수직이착륙 비행기 해리어를 이용한 액션신이 압권. 또 다른 패러디 스파이영화인 레슬리 닐슨의 <스파이 하드>(1996)에서 아놀드 슈워제너거가 빌딩 안에서 말 타고 달리는 장면을 패러디하기도 했다. 또한 <테일러 오브 파나마>(2001)에서 테일러(제프리 러시)의 아내였던 제이미 리 커티스의 모습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

미션 임파서블 Mission Impossible (1996) / 브라이언 드 팔마

007 시리즈의 계속되는 흥행은 미국의 영화 제작자들에게 꽤 뼈아픈 성공이었을 거다. 제임스 본드를 내세워 자국의 첩보 기술을 과시하는 영국산 블록버스터에 맞설 1990년대 미국의 대안은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이 영화의 원작인 브루스 겔러의 동명 TV시리즈는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만 맡아 수행하는 IMF팀의 미션 수행 과정을 다뤄 큰 인기를 끌었다. 시리즈의 열렬한 팬이었던 톱스타 톰 크루즈가 영화의 프로듀서이자 주연배우로 나서면서 <미션 임파서블>은 IMF의 팀워크보다 최첨단 기술의 수혜를 입은 요원 이단 헌트의 현란한 개인기에 초점을 맞추게 됐지만 이단 헌트를 연기하는 톰 크루즈의 매력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인기를 선도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특히 고공 침투를 즐기는 이단 헌트 캐릭터의 특성상 톰 크루즈는 시리즈마다 아찔한 고공 액션을 선보이며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를 규정하는 또 다른 특성은 ‘내부의 적’이다. 브라이언 드 팔마가 1편에서 IMF 국장이었던 존 보이트가 모든 사건의 주범이었다는 충격적인 결말을 선보인 이래, IMF 속 내부의 적은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을 제외한 모든 시리즈에 빠짐없이 등장해왔다. 가장 가까이 있는 자가 가장 치명적인 적일 수 있다는 <미션 임파서블> 1편의 결론은, 새로운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모든 등장인물을 주의깊게 살피는 계기가 됐다.

오스틴 파워 제로 Austin Powers (1997) / 제이 로치

007 시리즈의 완전한 반대말. 힘의 원천 ‘모조’를 바탕으로 치명적인 성적 매력을 지닌 영국 스파이라는 점에서 제임스 본드와 맞먹으며 악당으로 등장하는 닥터 이블은 역시 007 시리즈에 등장했던, 회색 제복에 흰 고양이를 쓰다듬던 스펙터의 두목 블로펠트를 그대로 따라한 것. 1967년 닥터 이블(마이크 마이어스)은 숙적 오스틴 파워(마이크 마이어스)를 암살하려다 실패하자 후일을 도모하며 스스로를 냉동시킨다. 그의 음모를 막기 위해 오스틴 파워 역시 자신의 몸을 냉동시킨다. 30년 뒤 깨어난 두 사람은 지구를 날려버릴 폭탄을 둘러싸고 소동을 벌인다. 1990년대에 깨어난 두 사람이 새 시대에 적응하는 모습이 배꼽을 잡게 만든다.

무엇보다 <오스틴 파워> 시리즈는 마이크 마이어스의 원맨쇼다. 분장을 통해 오스틴 파워와 닥터 이블 1인2역을 할 뿐 아니라 2편 <오스틴 파워: 나를 쫓아온 스파이>(1999)에서는 특수분장으로 더러운 뚱보 역할까지 맡으며 1인3역을 했고, 3편 <오스틴 파워: 골드멤버>에서는 무려 1인4역을 소화했다. 현재 마이크 마이어스가 그대로 출연해 거의 10년 만에 4편이 만들어질 예정이다.

본 아이덴티티 The Bourne Identity (2002) / 더그 라이먼

제이슨 본(맷 데이먼)은 <본 아이덴티티>(2002), <본 슈프리머시>(2004), <본 얼티메이텀>(2007) 3부작을 거치며 단숨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세계의 최강 첩보원으로 우뚝 섰다. 구사하지 못하는 외국어가 없고 그 누구도 격투로 그를 이길 수 없다. 거의 첩보작전을 위해 단련된 기계요원과 다름없기에 식당에 가더라도 자신이 몇 발짝을 걸어 입구에서 자기 자리까지 갔는지, 그 공간 속 사람들의 숫자와 스타일 분석까지 끝낼 정도다. 하지만 지중해 한가운데에서 어부들에게 발견된 그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 스위스 은행의 계좌 번호를 단서로 자신이 ‘제이슨 본’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것을 알게 된다.

로버트 러들럼의 원작에 바탕한 본 시리즈의 매력은 자신의 과거를 알지 못하는 스파이라는 설정에서 비롯된다. 영문도 모른 채 쫓기고 언제나 상대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리처드 챔벌레인이 주연한 TV영화 <본 아이덴티티>(1988)도 있다. 젊고 화려한 액션기계 맷 데이먼과 달리 중년의 제이슨 본을 보고 있어야 하는 안타까움이 있지만 원작에 충실하다. 한편, 맷 데이먼이 떠난 자리를 제레미 레너가 채운 4편 <본 레거시>가 올해 찾아온다.

뮌헨 Munich (2005) / 스티븐 스필버그

첩보 강국을 거론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특히 이스라엘의 비밀정보기관 모사드는 미국 대통령을 암살하는 건 시간문제도 아니란 평가를 받을 정도로 그 잠재력을 인정받는다. 21세기 중동이 국제 분쟁을 부추기는 최강의 화약고로 떠오르면서 모사드의 활동을 조명하는 첩보물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 자신이 유대인 출신인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을 맡은 <뮌헨>은 모사드를 다룬 스파이영화 중에서도 단연 수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팔레스타인의 무장 조직인 ‘검은 9월단’은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단 전원을 무참하게 살해한다. 모사드는 요원 아브너(에릭 바나)를 중심으로 사건의 배후 인물을 척결하기 위한 팀을 꾸린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조직원들을 차례로 암살해나가는 과정에서 아브너와 팀원들은 복수의 정당성에 대한 혼란에 사로잡힌다.

총격전과 유혈사태가 만연하는 이 영화는 첩보물로서의 장르적 쾌감을 충실히 선사한다. 하지만 <뮌헨>의 진정한 미덕은 순환되는 폭력의 역사와 그 역사를 살아내는 사람들에 대한 불안감을 주시한다는 데 있다. 테러리스트와 모사드 요원의 마음이 다르지 않으며, 보복이 계속되는 한 누구도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전하는 깊이있는 첩보물이다.

솔트 Salt (2010) / 필립 노이스

그레타 가르보와 마를렌 디트리히가 구축해놓은 할리우드 고전영화 속 품위있고 강인한 여성 스파이 캐릭터는 가슴골을 아슬아슬하게 드러낸 본드 걸들에 밀려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안젤리나 졸리의 <솔트>는 남자 첩보원의 액세서리로 전락한 여성 스파이의 위상을 다시 영화의 중심부로 옮겨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영화다. 유능한 CIA 요원인 솔트는 러시아 정보원이 그녀를 이중 첩자로 지목하면서 쫓기는 신세가 된다. 12층 빌딩의 외벽을 기어오르고, 사무실의 평범한 물건들을 이용해 바주카포를 만들며, 다리에서 맨몸으로 뛰어내리는 솔트는 제임스 본드, 이단 헌트, 제이슨 본 등 최강의 남성 스파이 캐릭터에 뒤지지 않는 실력을 자랑한다.

<솔트>의 매력은 전적으로 배우 안젤리나 졸리에게서 비롯된다. 원톱 여전사로서 영화를 이끄는 카리스마, 강도 높은 액션장면도 무리없이 소화해내는 운동 감각, 여성으로서의 우아함과 기품을 모두 갖춘 졸리는 여성 스파이 캐릭터의 21세기적인 클래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배우다. 브래드 피트와 함께 부부 스파이로 열연한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속을 알 수 없는 미모의 여인을 연기한 <투어리스트>에서도 스파이로서 졸리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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