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스파이영화의 효시라 불리는 프리츠 랑의 <스파이>(1928)는 이런 의미심장한 말로 시작한다. 또한 그것은 스파이영화 혹은 첩보영화의 태동과 이후의 흐름을 요약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스릴러와 필름 누아르 장르의 애매한 결합처럼 느껴지는 스파이영화는 특정한 장르로 분류될 정도는 아니지만, 어떻게 영화사와 더불어 관객 혹은 영화계와 조응하며 그들만의 세계를 이뤘는지 일러준다. 세계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 ‘첩보전’은 사실상 지난 세기 동안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그것은 공교롭게도 이제 막 100년을 넘긴 영화의 역사와 거의 일치한다. 지난 20세기는 영화의 세기이자 첩보의 세기이기도 했다. <스파이>가 말한 ‘세상의 이상한 일들’이 바로 지난 세기에 집중돼 일어난 것이다. 말하자면 스파이영화를 굳이 설명하기 위해 스릴러와 필름 누아르라는 장르성을 언급한 것이지 스파이영화는 영화사의 시작과 함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TV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 영화의 스크린이 바로 그런 스파이를 보여주던 뉴스릴 브라운관이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치게 허무맹랑한 얘기일까.
냉전의 시대, 공공연한 첩보활동 가능해져
스파이의 역사는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까. 저 멀리 고대 그리스 신화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볼프강 페터슨의 <트로이>(2004)는 스파이영화고 트로이의 목마를 타고 잠입하는 아킬레스(브래드 피트)는 당시의 스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실제 이야기에서 아킬레스는 트로이의 목마를 타기도 전에 죽었다). 그렇게 고대 그리스 국가 때부터 첩보활동은 이미 시작됐다. 아마도 ‘특사’나 ‘사절단’이 그런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며 그때부터 스파이는 국가가 관리하는 형태였다. 다른 얘기지만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시리즈에 등 의미장하는 제다이도 사실상 스파이의 다른 이름이다. 공개적으로 원로회의 등에 참석한다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언제나 제국군을 상대로 ‘정보 습득’과 ‘침투’라는 스파이의 기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존재들이다.
16세기 당시 교전 중이던 영국과 프랑스의 앙숙 관계는 다시 스파이들을 불러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으며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만큼 ‘보이지 않는 전쟁’이 계속됐다. 특히 ‘축구 종가’ 아니 ‘스파이 종가’라도 불러도 좋을 만큼 영국이 앞서 나갔다. <비밀과 음모의 세계사>에서 조엘 레비는 16세기경 여왕 시해 음모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활동을 했던, 물론 엘리자베스 여왕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친히 거느리고 아꼈던 프랜시스 월싱엄을 본격 스파이의 시초로 본다. 007 제임스 본드와 해리 파머를 비롯해 유능하고 위대한 스파이들은 물론 007 시리즈의 이언 플레밍,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존 르 카레, <자칼의 날>을 쓴 프레드릭 포사이드 등 뛰어난 스파이 소설 작가들의 고향이 대부분 영국인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히치콕이 그냥 영국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20세기 들어 냉전시대가 확산되면서 첩보활동은 공공연하게 가시화된다. 이른바 ‘장막’의 시대, 그 장막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이 무엇인지 필사적으로 알아내기 위한 노력이 수많은 스파이들과 그 조직들을 낳게 된 것. 먼저 영국은 MI5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보안국(SS)과 MI6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해외정보국(SIS)이 있다. 007이 바로 MI6 소속이다. 미국에는 중앙정보국(CIA)과 국가안전보장국(NSA) 그리고 연방수사국(FBI)이 있다. <007 어나더데이>(2002)에서 본드를 돕던 할리 베리가 바로 NSA 소속이다. 러시아에는 이제는 사라진 KGB의 후신인 대외정보국(FIS)이 있다. 독일은 군사정보국 ‘압베르’로 시작해 보안대(SD), 비밀첩보대 ‘겔렌’ 등으로 진화해나갔다. 흔히 알고 있는 게슈타포는 비밀국가경찰로 1945년 해체됐다. 스필버그의 <뮌헨>(2005)에 등장하는 모사드(Mossad)는 이스라엘의 중앙공안정보기관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암살 작전을 실행하는 첩보기관이다. 역사적으로는 영국의 언론 재벌 로버트 맥스웰 암살 사건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국가안전기획부의 후신인 국가정보원(NIS)이 있다. 지난해 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관련해 디도스 공격의 징후를 발견하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스파이영화, 갱스터영화를 닮았다
스파이영화의 재미란 무엇일까. <패트리어트 게임> <레인보우 식스> 등을 쓴 첩보군사소설의 대가, 그리하여 펜타곤을 출입증 없이 드나드는 작가 중 하나인 톰 클랜시는 “원자폭탄을 만드는 가장 빠른 방법은 원자폭탄 만드는 법을 훔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스릴러 장르의 하위장르로서 스파이영화가 주는 재미의 요체가 그 말에 담겨 있을 것이다. 실제로 1949년 8월 처음으로 실험에 성공한 소련의 원자폭탄 1호는 미국의 원자폭탄 제조에 참가했던 독일의 망명 물리학자 클라우스 훅스의 스파이 정보를 바탕으로 미국의 원폭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었다. 현대영화에서 첩보 초강대국은 미국이지만 당시만 해도 그렇지 않았던 것. 가령 독일 압베르의 대미국 작전 책임자인 니콜라우스 리터는 포드 자동차의 경영자까지 첩보요원으로 포섭해 1936년까지 미국의 산업기밀, 특히 항공과학 분야의 기밀을 독일로 빼돌리는 데 크나큰 역할을 했다. 2차 세계대전을 수행할 만한 공군 무기체계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런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미국은 방첩활동을 강화했고 어느 순간 독일은 미국의 연구실에서 어떤 첨단기술이 개발되고 있는지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끝은 그렇게 첩보활동에 의해 좌지우지됐던 것이다.
두 번째로 화려한 로케이션을 들 수 있다. 007 시리즈가 1편부터 국제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데는 거의 무명에 가깝던 숀 코너리가 연기한 매력적인 스파이의 모습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자메이카 현지 로케이션도 큰 역할(물론 비키니를 입고 조가비를 들고 서 있던 본드걸 우슬라 안드레스의 관능미를 떼놓고 생각할 수 없지만)을 했다. 당시로선 컬러영화의 등장과 함께 세트 촬영이 우선시되던 때라 이후 007 시리즈가 보여줬던 다채로운 로케이션은 시리즈의 전매특허가 됐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나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가 보여주는 동유럽과 중동,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풍광을 떠올려보라. 스파이라는 것이 소속은 있으되 기본적으로 홀로 움직이는 ‘노마드’라는 것과 맞물려 로케이션이라는 볼거리는 스파이영화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그렇게 전세계를 내 집처럼 오가며 신출귀몰한 첩보활동을 벌이는 스파이들을 두고 존 르 카레는 ‘지정학적 연금술사’라고 불렀다.
무엇보다 스파이영화의 매력은 스파이 그 자체에 있다. 그런 점에서 스파이영화는 갱스터영화와 유사하다. 정보기관을 마피아 같은 조직으로 비유한다면 스파이들은 갱스터 장르를 가득 메운 무수한 히어로들과 닮았다. 둘 다 사람들의 요란한 관심을 피해 음지에서 활동하고 종종 내부의 적과 싸우며 거의 초인과도 같은 힘을 발휘한다. 갱스터와 스파이, 둘 다 영화계가 기술적으로 슈퍼히어로를 만들 수 없던 시대의 슈퍼히어로였다. 그래서 이제 할리우드에서 이단 헌트와 제이슨 본은 거의 마지막으로 남은 아날로그 액션 히어로들이다. <스파이의 역사>를 쓴 어니스트 볼크먼은 “첩보의 세계는 유일무이한 세계이다. 인간의 노력이 이처럼 철저히 음지에서 이뤄지는 분야는 그 어디에도 없다. 세계 모든 국가가 어떤 형태로든 정보기관을 두고 있을 정도로 첩보는 필수 분야이면서 동시에 국제정치의 어두운 단면을 대변한다”며 “스파이를 향한 은밀한 매혹에는 국가가 허가한 일종의 관음증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다. 007에게 허용된 ‘살인면허’가 대표적이다. 더불어 스파이와 갱스터가 갈라지는 유일한 지점이랄까.
갱스터와 스파이 모두 알 카포네를 비롯한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에서 많은 소재를 취해왔다. 갱스터와 스파이가 현실로부터 달아나 존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제임스 본드와 마타 하리가 스파이영화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남녀 주인공들이라면 그들 역시 그렇다. 이언 플레밍은 1947년 대영제국훈장을 받은 최강 스파이 두스코 포포프, 그러니까 겉으로는 독일 스파이로 가장했지만 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을 위해 일했던 이중스파이 포포프를 모델로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만들었다. 실제로도 그는 당시 미국 후버 국장의 묘사처럼 ‘매일 밤 미녀를 끼고 침대 위를 뒹구는’ 스파이였다. 일본군이 진주만 군사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미국에 전달한 이가 바로 그였다. 이후 등장한 수많은 남자 스파이들은 부드럽고도 거친 본드의 영향력 아래 있다. 같은 영국 태생의 스파이이자 모차르트를 좋아하는 해리 파머도 그렇다. 전달사항을 써서 여비서에게 종이비행기로 날리는, 얼핏 싱거워 보이는 그는 여러모로 본드와 닮았으면서도 다른 묘한 매력을 풍긴다.
스파이 역사상 가장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붙는 독일의 미녀 스파이 마타 하리는 영화사를 통틀어도 가장 매력적인 여자 캐릭터일 것이다. 그 후예들도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신시아’라는 가명으로 불린 영국 최고의 미녀 스파이 베티 소프 파커는 혼자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로 건너가 군사기밀정보를 훔쳤으며 북아프리카에서 연합국을 위해 뛰어난 공적을 세웠다. 2차 세계대전의 판도를 바꿔놓은 인물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영국 처칠 총리가 보낸 섹스 스파이이자 히틀러의 정부였던 낸시, 그리고 인도 출신 미녀 스파이 누르도 있다. 최근 영화 중 마타 하리의 후예는 폴 버호벤의 <블랙북>(2006)의 레이첼(캐리스 밴 허슨)과 리안의 <색, 계>(2008)의 왕치아즈(탕웨이)다. <블랙북>에서 레이첼의 친구는 그녀의 정체를 안 뒤 이렇게 말한다. “멋져, 너 꼭 <마타 하리>에 나온 그레타 가르보 같아. 그런데 그 여자 나중에 죽지 않니?”
몸의 액션보다 더 치열한 마인드게임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한때 영국 정보부의 부장 지위까지 오를 뻔한 ‘20세기 최고의 스파이’이자 러시아의 이중간첩이었던 킴 필비와 또 다른 KGB 스파이인 조지 블레이크에게서 모티브를 얻었다.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영화에서 드러나는 스파이들의 모습에서 연상되듯 1963년 ‘케임브리지 5인조’라는 스파이 조직이 드러나면서 그의 정체가 밝혀졌다. 그리고 원작자 존 르 카레가 연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블레이크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 수용소에 연행됐던 경험도 있다. 미국 전투기가 북한의 작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광경을 목격하고 회의에 빠진 그는 스스로 KGB에 자원했고, 석방 뒤 런던으로 돌아가 별 의심 없이 MI6에 복직했다. 그런 이중간첩을 두더지(mole)로 묘사해 끊임없이 추적하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신뢰, 배신, 의혹과 같은 주제와 함께하는 스파이의 침투작전에 대한 근본적인 재미를 복기한다. 적의 내부로 들어가 상대가 무엇을 계획하는지 알아내는 게 두더지의 첫 번째 작전이라면, 상대의 힘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거나 자신의 진의를 숨기면서 상대를 교란시키는 것이 두 번째 임무다. 하지만 그것은 복잡한 미로처럼 종잡을 수 없고 이내 짙은 안개 속에 묻혀버린다. 영화는 자연스레 연상할 만한 대규모 물량의 침투 액션장면 하나 없이 그런 스파이영화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이중간첩을 지칭하는 용어인 두더지는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집자들이 존 르 카레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그가 이 말을 만들어냈냐고 물어봤을 정도다. 그의 얘기에 따르면 그가 정보원 노릇을 하던 시절 KGB의 은어였다고 한다. 그렇게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두더지를 찾는 과정을 통해 스파이영화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컨트롤(존 허트)이 죽기 전, 내부에 첩자가 있음을 밝히고 팀은 와해될 지경에 처한다. 그런데 옛 조직 ‘서커스’는 사라지고 이미 팀원들은 나이 들고 힘없는 스파이들이다. 존 르 카레의 또 다른 걸작 스파이 소설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를 영화화한 마틴 리트의 동명 작품에서 스파이 알렉 리머스(리처드 버튼)를 두고 한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수배자고 불량소모품이고 냉전이 구축한 악화들이지. 댁을 사고팔고 버리거나 당장 총살시킬 수도 있소.” 같은 의미에서 컨트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린 과거의 유산이 될지 미래의 구성원이 될지 결정해야 한다.”
조지 스마일리(게리 올드먼)는 러시아 스파이 ‘칼라’를 한번 만난 적 있다며 그와의 대화 내용을 얘기한다. 그가 얘기하길 “우린 상대방 체제의 약점을 찾아내느라 평생을 허비했소. 이젠 알 때도 되지 않았소? 당신네나 우리나 그럴 만한 가치가 별로 없다는 것을.”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사라져가는 스파이영화, 그러니까 액션영화의 형태가 아니고서는 장르로서 굳건히 버텨 서기엔 너무나 토대가 약한 스파이영화를 향한 쓸쓸한 송가다. 조지가 만난 옛 동료 코니(캐시 버크)의 한마디가 내내 귓가에 맴돈다. “참 좋은 시절이었어. 러블리 보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