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역사 속에서 답을 구하라
2012-02-28
글 : 이화정
글 : 강병진
충무로가 사극 제작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를 품은 달>

사극이 충무로의 블루칩으로 떠오르고 있다. 광해군의 숨겨진 비밀을 소재로 한 팩션사극이자, 이병헌의 첫 사극 출연으로 화제가 된 <나는 조선의 왕이다>(가제)를 비롯해 조선시대 얼음저장고를 둘러싼 코믹사극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세종이 임금이 되기 전 거지와 자리를 바꿔 겪는 사회상을 그린 코믹사극 <나는 왕이로소이다>, 한 여자를 둘러싼 왕과 내시의 사랑과 욕망을 그린 <후궁: 제왕의 첩> 등이 촬영 중이거나 촬영준비 중이다. 조선시대 관상쟁이를 통해 어두운 시대상을 조명한 한재림 감독의 <관상>, 전령과 그에 맞서는 세력간의 대결을 그린 권종관 감독의 <전령>, 사도세자의 미스터리한 죽음을 다룬 김한민 감독의 스릴러 <충신>, 조선의 옥쇄를 삼킨 귀신 고래를 둘러싼 산적과 해적의 대결을 그린 천성일 작가의 <해적> 등도 현재 제작준비 단계인 것으로 알려졌다. 수면 위에 떠오른 작품이 줄잡아 여덟편, 아직 기획 혹은 시나리오 단계에 있는 작품까지 더한다면 사극의 물량은 그 배에 달한다. 지난해 한국영화 흥행 1위를 한 <최종병기 활>이나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이 시장에서 거둔 흥행의 성과와 맥을 잇는 고무적인 시도다. ‘과거’는 이제 충무로가 눈을 크게 뜨고 지켜봐야 할 ‘밝은 미래’다. 롯데엔터테인먼트의 이진훈 팀장은 “들어오는 시나리오를 보면 사극이 20% 정도는 많아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NEW의 장경익 이사는 “많아졌다고 볼 수는 없지만, 시기적으로 몇편이 몰리는 것 같다”며 “당장에 사극 편수가 많아진 것보다는 사극에 대한 편견이 줄어들었다는 게 중요한 변화로 보인다”고 설명한다.

드라마에서 촉발된 열풍

사극 붐과 관련해서 가장 손쉽게 유추할 수 있는 이유는 최근 부쩍 늘어난 사극드라마의 영향이다. 이미 지난 2003년 TV드라마 <다모>와 <대장금>이 기존 사극드라마의 전형을 깨고 호평을 받을 때,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와 <황산벌> 등의 퓨전사극이 만들어졌다는 점을 기억할 수 있다. 사극드라마의 시청자가 곧 사극영화의 관객인 이상, 서로가 맞물려 사극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는 이야기다. 최근 들어 TV드라마에 팩션을 기반으로 한 퓨전사극이 늘어나면서 정통사극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소재, 장르의 사극드라마가 꾸준히 개발되고 있다. 덕분에 기존 정통사극과 확연히 다른 20, 30대 관객층이 사극의 고정팬으로 유입되고 있다. 매회 시청률을 경신하며 사극 열풍을 몰고 온 <해를 품은 달>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드라마 시작 전에 이미 허구임을 명시한다는 점에서 <해를 품은 달>은 기존 사극의 금기를 깬다. 이훤은 조선의 왕일 뿐 정확히 어떤 왕인지 지칭하지 않는다. 그가 펼치는 절절한 로맨스 역시 모두 작가가 만들어낸 100%의 픽션일 뿐이다. 사극이라면 당연하게 제시되어야 한다고 여겼던 특정 시대와 인물,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증이 모두 사라졌다는 점은 지금의 사극이 가진 변화를 보여주는 극명한 예다. 사극이 지켜야 할 상식에 대한 도전은 최근 사극드라마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소이자 성공 요인이다.

<성균관 스캔들>

<성균관 스캔들>은 인물의 대사와 상황 설정이 모두 현대극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정통사극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뿌리 깊은 나무>의 이도는 한글 창제라는 업적을 행하는 동시에, ‘지랄’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다. 금기를 깬 사극은 이제 왕에게 욕까지 시킬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박상연 작가는 “사극이 금기를 깨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왕에게 욕까지 시키는 용기를 갖게 된 거다. 결국 영화든 드라마든 이제부턴 더 센 것이 나올 수밖에 없다.” 더불어 할리우드에 비해 판타지 장르가 약한 한국의 경우 사극은 코믹, 액션, 멜로 등의 장르 변주를 통해서 판타지 장르를 구축할 수 있는 좋은 도구로 인식되기도 한다.

물론 드라마가 보여준 상상력과 거침없는 설정, 다양한 장르의 시도가 고스란히 영화 제작에 옮겨왔다고 보는 건 무리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추노>의 천성일 작가는 “한편 기획하는 데 2년 정도가 필요한 영화제작 시스템상 지난해부터 이어지는 사극드라마의 붐이 영화로 옮겨왔다고 볼 수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극드라마의 인기가 높아지면, 분명히 영화쪽에서 사극을 대하는 분위기도 넓어질 것이다. 또한 드라마에 비해 허구와 판타지를 더 많이 가미하는 사극영화 덕분에 사극드라마에서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증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경계가 희미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며 사극과 영화의 영향관계를 피력한다.

규모는 커지고 제작비는 낮추고

그렇다면 지금 영화 관계자들이 바라보는 사극의 가능성은 무엇일까. <후궁: 제왕의 첩>의 황윤정 PD는 사극의 강점을 ‘자유로움’으로 꼽는다. “현재가 아니라는 것은 표현과 상상에 있어서 무한한 가능성을 준다. 특히 사극이 많이 만들어지면서 사극에 대한 고정관념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음란서생>이나 <황진이> 때 지켜야 했던 표현의 부분이 지금은 변형될 수 있다. 과거의 제약을 돌려 생각해 오히려, 그 제약을 깨는 시도를 할 수 있다.” <나는 조선의 왕이다>를 기획 개발한 CJ E&M의 김보연 과장은 “굳이 현실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더라도 사극은 관객이 쉽게 공감하고 부담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이진훈 팀장은 “플롯의 흥미를 높일 수 있는 강점”을 꼽는다. “과거를 무대로 놓으면, 당연히 신분제도와 남녀 유별의 문제, 무엇보다 왕의 존재감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제약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야기의 가능성을 높이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고 전한다. 장경익 이사는 “리얼리티에서 자유로운 만큼 소재의 다양성이 높다”고 말한다. “관객에게 사극은 우대받는 면이 있다고 본다. 에로틱 장르로 볼 때도 현대물과 다른 차원의 기대를 받는다. 액션 장르로 볼 때도 현대물보다 비용은 적게 들면서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강점이 있다. 무엇보다 역사를 근거로 하는 만큼, 실화를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듯 보인다.” 현재 영화계에서 거론 중인 사극들이 대부분 코미디나 미스터리 등의 장르로 확대된 형태를 보이는 것 또한 그런 맥락에서 짚을 수 있는 현상이다.

<선덕여왕>

사실 이같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같은 조건의 현대극보다 2배 이상의 제작비가 책정되는 사극의 제작은 쉽지 않은 선택이다. 그러나 영화 관계자들은 대형화를 꾀할 수 있다는 점이 오히려 사극의 장점이라고 말한다. 잘만 접근한다면 블록버스터로의 진입도 그만큼 수월하다는 말이다. 내후년을 목표로 사극을 준비 중인 한 제작자는 “사극 시나리오는 예전에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독 올해 많이 제작에 들어간다는 건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지금의 사극 붐은 좀더 구조적인 문제에서 짚어봐야 한다”고 말한다. “시장에선 보다 큰 영화, 보다 센 영화에 대한 요구가 팽배하다. 20억∼30억원대의 로맨틱코미디가 예전처럼 제작될 수 없는 상황이다. 사극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비슷한 아이템으로도 규모를 대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7광구>나 <마이웨이> 같은 대작영화들이 시장에서 고배를 마셨지만, 여전히 충무로는 큰 작품에 대한 요구를 하고 있다”라고 강조한다.

고로 사극은 현실적인 대작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준비 중인 강영모 PD는 “최근 제작되는 사극의 규모는 50억원대 안팎이다. 사극 하면 100억원대 정도여야 가능했던 것과 달리 확연히 제작비가 다운되었다.

<평양성>처럼 큰 규모의 오픈세트를 짓는다거나 <최종병기 활>처럼 대형 액션신이 많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극이라고 해도 경제적 운용이 가능할 수 있다. 제작사들이 사극에 보다 손쉽게 뛰어들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순제작비는 46억원 정도, 스탭, 인건비 등은 현대극과 비슷한 20억원대, 나머지가 미술비로 책정된다. 미술비의 경우 새로운 디자인, 미술 등의 연출로 합리적 운용이 가능해진 부분으로, 프리 프로덕션을 철저히 하면 비용절감이 가능하다.

<후궁: 제왕의 첩>의 황윤정 PD 역시 사극의 순제작비가 예전보다 적어졌다는 데 동의한다. “궁중극으로 한정됐던 과거와 달리 각 작품의 소재에 맞게 규모가 축소될 수 있다. 왕 즉위식 같은 상징적인 장면들이 반드시 표현되어야 했던 예전 사극과 달리, 이제는 좀더 인물이나 사건의 집중적인 세부묘사만으로 장면을 연출할 수 있다. 콤팩트한 장면 운용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렇게 규모가 확보된 사극이 시장에서 가진 장점도 뚜렷하다. NEW 한국영화팀 김형철 팀장은 “사극의 독특한 시대 배경과 연출은 해외 블록버스터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확실한 차이점을 가질 수 있다”며 “영화로 제작될 경우 드라마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장르 표현의 한계 같은 것이 보완될 수 있고, 관객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전한다.

이병헌, 차태현도 사극에 도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사극 붐을 일으킨 데는 배우들의 참여도 컸다. 촬영 분량이 많고 말투가 정해진 데서 오는 부담감 때문에 사극이 예전부터 배우들의 기피 대상 1호였다면, 최근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특히 <선덕여왕>의 고현정, <뿌리 깊은 나무>의 한석규로 이어지는 톱캐스팅이 배우들의 사극 진입 장벽을 한층 낮췄다.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의 김명민, <최종병기 활>의 박해일 등 부쩍 증가한 톱배우들의 사극영화 진출 역시 사극 붐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특히 <나는 조선의 왕이다>의 이병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차태현,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주지훈, <후궁: 제왕의 첩>의 김민준, 김동욱 등이 사극영화에 첫 도전하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제작사들 백종헌입장에서는 규모가 큰 작품을 위해 톱배우들의 필요성이 절실하다. 배우들은 사극 자체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사극 시나리오가 부쩍 늘어났고 그 과정에서 독특한 소재를 찾다보니 사극을 선택하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병헌은 <나는 조선의 왕이다>에서 광해군과 천민의 1인2역 연기에 도전한다. 이병헌 소속사인 BH엔터테인먼트의 손석우 대표는 “사극을 하겠다는 뚜렷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시기적으로 잘 맞았다. 특히 배우로서 1인2역에 대한 도전지점이 확실한 작품이었다”라고 전한다. 그럼에도 그는 “예전과 달리 전반적으로 사극을 받아들이는 정서가 달라진 건 사실이다. 소재와 캐릭터가 다양해지니 연기자들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눈길을 돌리는 게 아닐까”라고 전한다. 차태현의 사극 도전 또한 생소한 경험이다. <엽기적인 그녀>에서 삿갓 쓴 검객으로 변신한 적은 있지만, 본격적으로 사극에 출연해 비주얼적으로 변신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조선시대,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탐관오리에 맞서 얼음을 훔치는 도둑으로 변신한 차태현은 “대본은 퓨전 형식이지만 오히려 사극 톤이 배어나오게 하려고 노력했다. 어렵다기보단 신선한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이번 작품의 출연 계기에 대해 차태현은 “최근 부쩍 사극 제작이 늘었다. 사극 시나리오도 그만큼 많이 들어온다. 그러나 단순히 사극이어서 한다기보다는 어떤 시나리오냐, 캐릭터냐가 선택의 기준이었다”고 말한다.

고무적인 건 소재와 장르의 다양화, 규모 면의 대형화, 톱스타들의 잇단 캐스팅으로 사극이 한국영화계에 불어넣은 새로운 기운이다. 덕분에 과거의 사극이 줄 수 있는 흥행에 대한 신뢰보다 현재 사극의 흥행에 거는 기대점이 부쩍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할 건 드라마의 시청자가 반드시 극장까지 이어질 거라는 맹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극이 영화계의 트렌드로 자리잡았던 스릴러물처럼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어떻게 자리를 잡아나가야 할지는 지금의 사극 붐에 앞서 충무로에 내려진 중요한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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