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조선시대에도 탐정이 있었으니
2012-02-28
글 : 강병진
미드와 팩션에서 비롯해 사극에 파고든 장르적 긴장감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

ㅣ 口 亡 己. 죽은 이가 남긴 글자는 뚫을 곤, 입 구, 망할 망, 몸 기다. 집현전 학자와 반촌 사람들이 저마다 해석을 내놓는다. 입을 뚫어 몸을 없앤다. 몸을 뚫어 입을 없앤다. 입을 없애 몸을 뚫는다. 곤의 1획은 전하요, 구의 3획은 3정승, 망과 기의 획을 합쳐 6은 6조를 뜻한다. 4개의 한자음이 사실 훈민정음을 뜻했고, 결국 ‘밀본’을 지칭했다는 결과보다 수많은 해석을 낳는 과정이 더 흥미로웠던 <뿌리 깊은 나무>의 한 챕터다. 연쇄살인의 음모를 파헤치는 가운데 해석에 참여한 등장인물과 시청자도 탐정이 됐다. 정확히는 <장미의 이름>의 윌리엄 수사나 <다빈치 코드>의 랭던 교수 같은 기호학자가 된 셈이다. 돌이켜보면 최근 사극에서 탐정이 아닌 주인공이 없었다. <허준>의 허준이 무술실력까지 뽐내며 갖가지 미스터리를 돌파한 이후, <대장금>의 장금은 의술로 부모의 죽음에 얽힌 음모를 풀어냈고, <성균관 스캔들>의 잘금 4인방은 학문적 지식과 탐문을 통해 정치적 음모를 밝혀냈다. 한 내의녀가 궁녀의 세계에 숨겨진 비밀을 풀어내는 영화 <궁녀>도 마찬가지다.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의 탐정 또한 연쇄살인을 수사한다. <해를 품은 달>의 이훤 또한 연우의 죽음에 얽힌 음모를 파헤치려 든다. 과거 사극의 장르적 판타지는 장희빈이 지푸라기 인형에 침을 꽂는 정도였다. 지금의 사극은 암호를 해독하고, 시체를 검안하고, 기록과 증인을 탐문할 뿐만 아니라 반전의 술수까지 부린다.

사극이 미스터리와 스릴, 반전을 플롯의 힘으로 끌어들인 요인은 상당히 복합적이다. <허준> 이후, 정통사극에서 벗어난 사극은 역사가 아닌 개인의 성장과 투쟁을 그리기 시작했다. 주인공에게는 전진을 가로막는 장벽을 해결해야 하는 동시에 출생의 비밀을 파헤쳐야 하는 미션이 주어졌다. 온라인 다운로드 시대와 함께 도래한 미국드라마의 붐이 한국드라마에 장르적 쾌감과 비선형적인 플롯을 담게 만든 것도 한 가지 요인이다. 그와 함께 김탁환, 이정명 등 미스터리의 힘으로 역사를 재구성한 팩션 작가들이 등장했고, 그들의 작품이 드라마와 영화로 뻗어가는 중이다. 지금의 사극을 만드는 작가군이 예전의 사극 전문 작가들이 아닌 이유도 있다. 사극드라마뿐만 아니라 지난해 등장한 <조선명탐정…>과 <최종병기 활>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사극영화들이 지닌 장르의 결 또한 더욱 뚜렷해진 상황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없었다면, <영원한 제국>도 없었을 거다. <영원한 제국>이 없었다면 <뿌리 깊은 나무>도 나올 수 없었다. 사극만이 아니라 지금 나오는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크게 기대고 있는 부분이다.” 박상연 작가의 말은 지금 우리가 사극을 통해 경험하는 장르의 매력이 본질적으로는 현대극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뜻으로 들린다. 사극의 주인공이 파헤치는 출생의 비밀은 이미 ‘막장’으로 불리는 드라마들이 시청자를 몰입시키는 갈등으로 활용한 지 오래다. 캐릭터와 이야기로 볼 때, <바람의 화원>의 김홍도와 신윤복을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의 미카엘과 리스베트에 빗대도 무리가 아닐 것이며, <조선명탐정…>은 조선판 셜록과 왓슨의 모험담이고, <최종병기 활>은 <테이큰>의 플롯과 흡사하다. 다만 자주 보았던 이야기가 사극으로 치환되면서 생기는 신선함과 호기심의 효과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극에는 리스베트의 무기인 맥북프로도 없을뿐더러, 비밀은 더욱 굳센 금기의 영역에 있고, 금기에 접근하는 성별이 무엇이냐에 따라 위기도 커진다. 무엇보다 암기과목으로 배웠던 역사를 지금의 사극이 욕망과 의지의 충돌, 그리고 이성의 논리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 사극의 장르적 쾌감을 증폭시키는 듯 보인다. 사극에 대한 열광은 어쩌면 한국 역사교육의 폐해가 가져온 결과일 수도. 역사를 교과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이야기로 들으며 배운 어르신들에게 역사는 처음부터 장르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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