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실장보다는 왕이 절대적 남자
2012-02-28
글 : 이화정
사극은 어떻게 멜로드라마의 매력을 갖는가
<해를 품은 달>

“내 허락없이 내 눈앞에서 멀어지지 말거라!” <해를 품은 달>(이하 <해품달>)에서 왕 이훤(김수현)의 월(한가인)을 향한 명령은 고스란히 20, 30대 여성 시청자를 향해 전이된다. 시종 ‘감히!’를 언급하며 뭇 여인들의 애간장을 녹이는 이훤은 백성의 안위와 정국의 안정을 꾀하는 기존 사극 속 왕과는 엄연히 다른 존재다. 조정 정사를 논하던 왕은 이제 그의 권위를 온전히 월을 향해 열어둔다. 이른바 로맨틱코미디물에서 최고 위치를 점하는 남자주인공 캐릭터로서 정의해야 할 왕의 표본의 새로운 정립이다. 현대극으로 따지면 실장 혹은 본부장으로 통칭되는 부류로, <파리의 연인>에서 한기주가 유학생 강태영에게 재량껏 베풀었던 아량과 <발리에서 생긴 일>의 정재민이 빈털터리 이수정에게 과시적으로 퍼부었던 물량공세,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이 액션배우 길라임에게 보여주었던 복지부동의 자신감을 똑같이 나눠 가진 캐릭터다.

이 경우 사극의 왕(혹은 계급적으로 우위에 있는 남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돈을 가진 실장보다 절대적인 위치를 점한다. 계급으로 엄격히 구분된 사회, 자유로운 연애의 불가라는 사극의 제약이 주는 효과가 뒷받침되면서 남자주인공 캐릭터의 카리스마가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전제조건들을 충실히 따라가다 보면 현대극에서 쉽게 만들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 연인관계가 형성된다. <해품달>의 월은 외척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대왕대비파의 술수로 결국 액받이 무녀로 전락하지만, 이훤은 그녀와 신분 차이를 넘어선 연애를 강행한다. 부모 세대의 정치적 다툼이 2세의 사랑에 오히려 ‘훌륭한’ 족쇄로, 강한 운명의 연결고리로 작용하는 셈이다. <성균관 스캔들>의 김윤희는 가솔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성균관 유생이 된 남장여자다. 노론영수의 아들 이선준은 남색이라는 시대적 제약이나 아버지 세대의 관계에 굴하지 않고 김윤희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표한다. <공주의 남자>의 드라마를 이끄는 실질적 동력 역시 사건 당사자가 아닌 2세간의 사랑이다. 이세령은 김종서 일가를 멸문지화에 이르게 한 수양대군의 딸이지만, 김종서의 아들 김승유는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원수의 딸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물론 운명이라는 거대한 배경 아래에서도 로맨틱코미디가 주는 소소한 재미는 그대로 운용된다. <해품달>의 이훤과 월의 첫 만남은 그녀가 이훤을 미처 왕인지 모르고 막 대하며 벌어지는 에피소드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영락없이 김주원을 반백수로 알고 초반에 그를 무시하는 <시크릿 가든>의 길라임으로 맥을 잇는다. <성균관 스캔들>의 이선준은 자신의 재력을 이용해 김윤희가 진 빚을 몰래 갚아준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김윤희의 반응은 로맨틱코미디 속 자존심을 내세우는,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여주인공의 반응과 한치 다를 바 없다.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회자된 “날 동정하는 건가?”라는 대사는 로맨틱코미디 속 가난한 여주인공이 가진 유일무이한 재산이자 펀치라인이다.

사극 멜로는 이렇게 형성된 기본적 로맨스 구도에 또 하나의 극약처방을 내린다. <해품달> 13회의 마지막 장면은 “중전을 위해 내가 옷고름 한번 풀지”라는 왕 이훤의 도발적 대사로 마무리됐다. 합방과 관련된 어떤 단서도 주지 않고 매정하게 끝나버린 이날 <해품달>의 시청률은 37.1%에 육박했다. 왕가라는 뒷배경, 정치적 대의라는 멍석이 깔려 있지만 알아두어야 할 것은 왕은 이 와중에도 합법적 부인 대신 다른 여자와의 사랑을 탐한다는 점이다. 막장드라마의 구도지만, 조선시대 왕가에서라면 이건 지극히 가능한 관계다. 사극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막장에 품격을 더해줬고, 덕분에 시청자는 이 규칙의 세상에서 이제 편한 마음으로 사랑놀음을 감상할 수 있게 됐다. 결국 사극 멜로를 조목조목 해체하면 로맨틱코미디의 안전한 바탕 위에 운명적 사랑이라는 강한 멜로, 그리고 막장드라마의 독한 설정이 깨알같이 도출된다. 사극은 현존하는 연애드라마에 있는 가장 뜨거운 것들의 결합으로 세대를 초월한 멜로 관객을 얻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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