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주진모] 자존심보다 귀한 것
2012-03-12
글 : 이주현
사진 : 백종헌
주진모

스튜디오에 들어서자마자 커피를 찾는다. 자리에 앉아선 제일 먼저 담배를 꺼내 문다. 얘기할 땐 상대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직설화법을 즐겨 쓴다. 머쓱한 얘기를 할 땐 숨겨둔 주름을 만면에 쓰윽 드리운다. “제가 인상이 세서 무섭죠?” 슈트가 잘 어울린다는 말에 돌아온 대답이 이렇다.

주진모는 자신을 둘러싼 주변 상황을 잘 관찰하는 사람이다. 레이더에 어떤 징후가 감지되면 즉각 반응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한다. 일차적으론 방어기제가 동원되고, 이거다 싶으면 모험심과 책임감으로 내달린다. <가비>의 일리치가 되기로 결심할 때도 그랬다. 주진모는 <가비>를 통해 “진짜 큰 공부를 했다”. 장윤현 감독에게서 일리치라는 “활어와도 같은 캐릭터”를 받아든 그는 주방을 총책임지는 요리사가 된 심정으로 비늘부터 손수 다듬기 시작했다. “시나리오의 48%는 내가 썼다”는 말은, 펜을 들고 책을 쓰지 않았다뿐이지 사실이었다. 일리치는 러시아에서 커피와 금괴를 밀수하다 붙잡혀 일본의 스파이가 돼 고종 암살 작전에 투입되는 인물이다. 사랑하는 여인 따냐(김소연)를 지키기 위해 조국도, 자존심도 모두 내던지는 사내. “시나리오 초고에선 일리치가 너무나 착하고 이상적이기만 한 남자였다. 그런데 이런 인물을 관객이 좋아할까, 공감할까 싶더라. 그래서 감독님한테 그랬다. ‘싹 바꾸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힘들 것 같습니다. (일리치와) 대립하는 인물들도 많이 붙여주십시오.’ 고종(박희순)과 맞붙는 장면도 없었고, 사다코(유선)도 원래는 남자였다.” ‘내 것, 내 대사’만 챙겼으면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진모는 “혹여나 길을 잘못 들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어쩌나 하는, 공포스러울 정도로 힘들었던” 마음을 꿋꿋이 다잡고 무에서 유를 창조해갔다. 그 과정이 자신의 연기에 확신과 자신감을 심어준 것은 물론이다.

지켜야 할 대상을 위해 지고지순한 마음을 불태우는 사내는 주진모의 이전 작품들에서 익히 보아온 모습이다. <사랑> <쌍화점> <무적자>에서처럼 <가비>에서도 그는 비극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새로운 타입의 인물도 연기하고 싶은데 아직까지는 그런 책들만 들어오고 또 그런 것만 눈에 들어온다.” 지인들에게 모니터해본 결과 주진모하면 다들 “강인한 인상, 남성성, 우직함, 음울함, 한(恨)”을 떠올린다고 한다. 현실의 주진모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그의 마음 한구석엔 늘 개그 본능이 숨쉬고 있다. “같이 작품했던 감독님들이 작품 끝내고 나면 항상 그런다. ‘진모야, 나중에 꼭 같이 코미디 하자.’ 그런데 다들 상상을 못하는 거지. (웃음)” 우리는 아직 배우 주진모의 십분의 일밖에 보지 못했다고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머지 아홉을 어서 빨리 보여주고 싶어 죽겠다는 듯이.

이미지 캐스팅에 대한 고민, 나이가 들면서 깊이감은 생기는데 선택의 폭은 좁아지는 것에 대한 고민,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쇼, 예능프로그램에도 출연해야 하나 하는 고민. 주진모는 “개인적으로 요즘이 혼란스러운 시기”라고 했다. 긍정적인 건 고민과 비례해 의욕도 충만하다는 거다. 의욕이 충만하니 더 배가 고프다. “배우를 하는 한 죽을 때까지 배고파야지. 배우가 연기를 제일 잘할 때가 돈 없고 배고플 때라지 않나. 요즘 많이 절박하거든. 진짜 눈에 불을 켜고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웃음)” 지금까지와는 패턴을 달리해 ‘다작을 해볼까’ 하고 막연히 생각하는 것도 작품에 허기져서 그렇다. 하지만 “눈이 높아져서 그런지” 작품의 완성도보다는 작품 외적인 요소로 이슈몰이해 급하게 기획되는 작품엔 영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결국 부딪히는 건 자존심이더라. 작품을 결정할 때 가장 많이 영향을 끼치는 게 자존심이다. 그런데 어느 철학자가 한 말 중에 ‘자존심은 가장 고귀한 인격을 망친다’는 말이 있다. 요즘엔 그 말이 가슴에 와닿더라.” 망가지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망가질 이유도 없는데 망가져야 하는 게 싫은 배우는, 그렇게 자기와의 싸움을 부단히 계속할 것 같다고 했다. 일단은 <가비>의 일리치로 관객의 공감을 사는 게 먼저고, 다음 일은 그 자신도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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