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에 나타난 김소연은 마치 신인배우로 돌아간 모습이었다. “<체인지> 이후 처음 와봐요”라고 말하는 목소리에서 여유보다 설렘이 느껴졌다. <체인지>라면 벌써 15년 전이다. 번개 맞아 남녀 고교생의 몸이 뒤바뀌는,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원류 격인 그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사이 서극의 <칠검>에 고려시대 여인으로 출연한 적도 있지만 제대로 된 연기를 보여주긴 힘들었다. 비중도 적었거니와 2주 동안 자신이 등장하는 부분의 번역본만 받아 소화해야 했던 역할이라 숲이 아닌 나무만 볼 수밖에 없었던 작업이었다.
열네살에 아역배우로 데뷔해 서른셋의 성숙한 여배우로 자리잡기까지 그녀의 안마당은 드라마였다. <순풍 산부인과>(1998)에서 오지명의 셋째 딸로 나와 나름 똑똑한 의사지만 엉뚱한 매력을 발산했던 것을 시작으로 <이브의 모든 것>(2000년)에서는 차가운 인상을 백분 활용해 최고가 아니면 견딜 수 없는 욕심 많은 아나운서로 변신했고 간만의 복귀작 <식객>(2008)에서는 원로한 요리 고수의 따뜻하고 지혜로운 오른팔로 등장해 가뿐히 침체기를 뛰어넘었다. 이후 <아이리스>(2009)에서는 어떤 위험에도 거침없이 몸을 날리는 첩보원 김선화로, <검사 프린세스>(2010)에서는 몸개그가 주특기인 무개념 신입 검사 마혜리로 열연한 그녀였다. 때문에 영화배우와 드라마 배우의 구분이 모호한 시대에도 그녀는 여전히 후자로 각인돼왔다.
장윤현 감독의 <가비>는 영화 현장으로 돌아오고 싶었던 배우 김소연에게 간절한 새 출발의 기회였다. 쉽지는 않았다. 비운의 첩자 따냐 역은 극도로 미묘한 “감정 플레이”를 요구했다. 역적으로 몰려 살해당한 아버지를 가슴에 묻은 채 러시아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일본의 계략에 휘말려 고종암살작전에 투입된 조선 최초 바리스타 따냐는 아관파천 시기에 조선, 러시아, 일본 사이에서 삼중 스파이 노릇을 감당해야 하는 복잡한 인물이다. 그녀와 일리치(주진모), 고종(박희순)간의 거미줄처럼 얽힌 시선이 드라마의 긴장을 지탱하는 요체다.
TV 화면만한 자신의 얼굴에 익숙한 그녀로서는 ‘실물보다 큰’ 스크린 크기를 가늠하며 움직이는 법을 터득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절제가 관건이었다. 장윤현 감독도 계속 그녀에게 “과한 표정은 빼고, 감정은 마음속 깊은 데 눌러두고, 겉모습은 아무렇지 않게” 하라고 주문했다. 자신 때문에 수많은 스탭들이 몇 시간씩 기다리는 것이 미안해 발을 동동 굴러도 보았지만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했다. 결과는 승. 그녀는 버림으로써 더 많은 것을 얻었다. “연기를 덜어낸 연기”가 무엇인지 이제 어렴풋이 알겠다는 것. “가편집본을 봤는데 내게 저런 표정이 있었나 싶은 장면들이 보이더라고요. 카타르시스가 느껴졌어요. 처음에 제가 해석한 대로 연기했으면 지금쯤 후회의 강을 건너고 있겠죠. (웃음)”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신인처럼 그녀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데뷔 20년차인 배우 김소연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는 ‘관성’일 것이다. 그녀는 경력을 핑계 삼아 남들이 가리키는 길로만 다닐 생각이 전혀 없다. <마이 프린세스>의 마혜리 역을 덥석 물었던 것도 날카로운 이목구비의 그녀에게 웬만해선 절대 오지 않을 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가비>의 시나리오를 받은 지 일주일 만에 수락한 이유도 비슷했다. “보헤미안 기질도 있고, 야생적인 면도 있는 이 다채로운 캐릭터가 어떻게 제게 왔나 싶어 신기하고 감사해요. 제 이미지가 한정돼 있어서 다양한 시나리오가 안 들어오는 편이거든요.” 그렇다고 그녀가 전략가나 요령꾼이란 말은 아니다. 그녀가 매번 처음처럼, 계산없이 투명한 마음으로 새 작품을 찾아나설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밑도 끝도 없는 성실함 때문이다. 배우로서 그녀가 지닌 싱싱한 활력의 원천도 거기에 있다. 영영 성장판이 닫히지 않을 것 같은 배우 김소연. 그녀의 영화배우로서의 행진에 <가비>가 눈부신 신호탄이 되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