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정_요즘 제가 TV도 인터넷도 안 봐서 모르겠는데 신보 반응이 좋은 건가요?
김동률_하루가 다르게 음반시장의 반응 속도와 방식이 달라지고 있어서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요즘 대다수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 음원 사이트에 들어가서 ‘오늘의 신곡’, ‘이주의 베스트10’을 듣고 그 순위가 바뀌면 또 듣는 식이거든요. 꼭 그 음악을 돈 주고 산다기보다 월정액제로 휴대폰 요금에서 빠져나가고 스트리밍 서비스로 듣는 거죠.
고현정_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네요. (좌중 웃음) 우리 시대의 1위부터 10위까지는 아무튼 내가 정하는 거였지 스마트폰이 정해준 걸 듣고 있진 않았잖아요? 저는 옛날 스타일로 음악을 들어요. 좋아하는 가수 신보 나오면 당연히 좋을 테니 무조건 서너장을 사서 나도 듣고 주변에 선물해요. 속지를 펴서 가사도 다 읽고 누가 피처링하고 앨범 사진을 찍었나까지 알아야 속이 시원해요.
김동률_더 많은 음악을 접하는 순기능이 있으니 반드시 비관적인 변화라고만 볼 수는 없을 거예요. 시대 탓을 하는 건 말이 안되는 거고 결국엔 ‘그럼에도 불구하고’CD를 사서 들어야겠다고 여겨지는 음악을 만드는 수밖에요. 앨범의 구성에도 상당히 신경을 쓰는데 이따금 정말 이 순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해서 들어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하곤 해요. CD를 산다 해도 리핑을 해서 랜덤 셔플로 들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다운로드해 들어도 좋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은 꼭 들어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어요.
고현정_CD를 사서 듣는다는 건, 바로 그 가수가 정한 구성을 인트로부터 끝까지 듣는다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그 가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요. 창작자는 쉽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을 것 같은 부분을 더 열심히 잘해놓아야 해요. 그래야 아까 이야기한 클라이맥스가 제대로 전해져요.
김동률_저는 두 가지 의미에서 끝까지 그런 태도를 견지할 거예요. 첫째, 99명이 몰라도 한 사람은 알 거라는 믿음이 있고 둘째, 그 미세한 부분에 대한 노력이 나머지 99명에게도 은연중에 영향을 준다고 봐요. 새 앨범의 <Replay> 같은 곡을 듣고 “10년 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을 받았다”는 감상을 들려준 분들이 있어요. 얼핏 그냥 감상적 평 같지만 제가 90년대 음악을 재현하기 위해 당대의 드럼 톤, 일렉트릭 피아노 톤을 쓰고 구성의 어법을 원용한 시도를 궁극적으로 느껴주신 것이거든요. 구체적으로 풀어서 표현 못해도 분명히 “안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마지막 순간까지 놓을 수가 없어요.
고현정_촉이랄까, 감수성을 놓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는 거죠. 연기도 비슷해요. 투자사, 제작사가 기획한 울고 웃는 포인트와 상관없이 실제 관객은 살면서 나름 저간의 사정이 있기 때문에 영화가 진짜 좋은 영화라면 삶의 경험을 투영해 각자에게 가닿는 지점에서 울고 웃기 마련이에요. 그래서 배우의 보이지 않는 감수성이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란 거죠. 실제 연기는 굉장히 아방하거나 또라이처럼 할 수도 있지만, 동시대의 기본적 삶을 배제하고 아예 딴 데 가 있는 건 위험할 수 있어요. 문 여는 동작, 스쳐지나가는 걸음 하나에도 다 위안받고 가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아티스트의 숙명에 대하여
고현정_혹시 내게 묻고 싶은 건 없어요? 드문드문 만났지만 알고 지낸 기간은 길잖아요.
김동률_배우로서 오랫동안 좋아했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예전에는 솔직히 (손으로 막연한 대상을 뜻하는 큰 원을 그리며) ‘고현정’이었죠. 연기를 잘한다는 생각을 본격적으로 한 건 <선덕여왕> <대물>을 보면서예요. 그래서 인간 고현 투정으로서 말고 배우 고현정으로서 어떤 목표가 더 있을까 궁금해요.
고현정_음, 이걸 성의없는 답이라고 여기지 않을 사람임을 믿고 말하는데 배우로서 목표는 없어요. 그런데 왜 <선덕여왕>과 <대물>을 보고 연기 좀 한다고 생각했어요? 전에도 좀 하긴 했는데? (웃음) 악 쓰고 못되게 나와서요?
김동률_몰입을 부르는 카리스마가 소리 지르고 우는 연기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미실의 눈치를 보며 대신들이 도열해 있는 장면이 제일 좋았어요. 나도 그녀의 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 궁금하고 극중 대신들도 같은 마음인 거죠. 그러다 입을 열어 던지는 한마디에 그녀가 처한 복잡한 상황과 생각이 다 담겨 나와요. 반란을 일으키는 대목에서 “너희들이 한 게 뭐 있냐!”고 일갈할 때 몇 십회 동안 쌓였던 감정이 터지는 걸 느꼈어요. 그건 마치 음악에서 클라이맥스와 거기에 이르기까지에 관한 아까 이야기와 비슷한 거죠.
고현정_(한숨) 미실의 경우는 제가 그 애의 마음을 너무 알겠더라고요. (좌중 폭소) 배우는 어떤 캐릭터를 연기할 때 백수면 백수, 의사면 의사, 최근에 찍은 영화 <미쓰 고> 같으면 공황장애가 있는 만화가를 실제 그 인물한테 가서 설득할 수 있을 만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표현한 인물한테 가서 설명을 해도 내가 이겨야 한다고요.
김동률_<대물>에서는 사람들이 데모를 하고 있는데 고현정씨가 뒤에서 “이건 뭐 하는 거야? 왜 이리 시끄러워?” 하는 표정을 짓고 쳐다보는 장면이 좋았어요. 보통의 연기라면 무슨 시위인가 하는 호기심과 장차 그녀가 정계로 나아가는 계기가 됐다는 뉘앙스를 냈을 텐데 누나는 정말 동네 아줌마로서 너무 귀찮아하는 표정을 짓더라고요. (좌중 폭소)
고현정_동률씨 음악에도 비슷한 점이 있어요. 앞부분을 듣고 있으면 세상에 뒤에 가서 날 그렇게 만들어주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는 노래가 있다고요. 클래식 음악에서 자주 접하는 느낌인데, 처음에는 감정이 옅게 흘러나오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딱 그 감정만 남게 하는 울타리 같은 구조를 세운다고나 할까요? 사람이 감정을 마구 소모시켜버리고 싶을 때가 있는가 하면, 왠지 이 슬픔은 술 먹고 우는 걸로 토해내고 싶지 않아서 누군가가 다르게 꺼내주었으면 할 때가 있잖아요. ‘고상하다’라는 단어에 위화감이 있을 수 있지만 김동률씨 음악은 그렇게 감정을 에워싸주는 속성이 있어요.
김동률_제가 영화 볼 때 느끼는 바와도 비슷하네요. 당장 울고 싶을 때 찾아보는 영화와 이걸 보면 채 울지도 못하고 감정이 차올라서 힘들 걸 알면서도 굳이 보는 영화가 있거든요. 사실 전 <비기너스> 같은 후자의 영화를 좋아해요. 물론 제가 이해되는 수준에서. (웃음)
고현정_요즘 여자가수 중에 누가 제일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해요? 아니, 마음에 들게 불러요?
김동률_김윤아씨는 멋있고 끝내준다는 느낌이고 이소라 누나는 조금 다르게 좋아요. 가슴이 아프죠. 저분이 저렇게 노래하기까지 아픔이 있었을 텐데 그렇게 얻은 소리를 내가 들으면서 좋으니까 미안하기도 해요. 개인적으로는 누나가 행복한 쪽을 바라지만 그럼으로써 남에게 영감을 주기도 하니까요. 그게 아티스트의 숙명 같아요. 예전에 라디오 DJ를 1년 반 한 적이 있는데 그동안 행복했어요. 라디오라 사람들과 부대낄 일도 없었고 웃고 떠들며 일한 다음 기분좋게 귀가했죠. 그런데… 정신상태가 너무 건강하니까 곡을 못 쓰겠는 거예요. 오늘 하루 공쳤다는 위기감이 없고 꼬박꼬박 할 일을 했다는 충족감이 생기니까 음악 작업을 하기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만뒀어요.
고현정_하긴, 연기도 배고픈 시간에 더 잘돼. (좌중 폭소)
김동률_그리고 앨범 작업에 들어갔죠. 그때 나는 편안하고 무난하게 살면 안되는 아이로니컬한 직업을 가졌구나 깨달았어요.
고현정_어머, 누가 들으면 웃겠어요. 잠깐, 김동률씨 혹시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드라마틱한 삶을 살고 있나요? 이면이 있구나! 갑자기 관심이 동하는데요?
김동률_하하. 누님께 비하겠습니까?
고현정의 선물
to . 김동률
<해리 포터>에 나오는 다이애건 앨리의 약방에서 파는 시럽 병인 줄 알았다. 혹시 아나. 약효는 못지않을 수도 있다. 고현정은 한달은 너끈히 태울 법한 큼직한 시트러스계 아로마 초를 김동률에게 선사했다. 마침 김동률은 얼마 전부터 집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나 목욕하는 시간에 초를 태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침대보다 더 깊이 몸을 누일 수 있는 세상에서 제일 작은 독방, 김동률은 욕조를 사랑하는 사람들 중 하나다. 목욕 시간은 주로 연습으로 뼛속까지 탈진해 집에 돌아온 늦은 밤. 그는 욕실에 들인 초가, 그대로 자면 뭉칠 듯한 심신의 매듭을 헐겁게 하는 짧은 시간을 작은 사치로 만들어주는 기분이라고 했다. 사치를 선물받은 보답으로 김동률은 고현정의 아이팟에 추천 음악을 꾹꾹 눌러 담아주기로 약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