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이범수] 흥행을 들다
2012-03-26
글 : 이주현
이범수

6일간 밤샘 촬영을 했다. 사이사이 두어 시간 쪽잠을 잔 게 전부였다. 이범수가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드라마 스케줄을 소화하고 스튜디오에 나타났다. 조금 과장하면 ‘시체’가 뚜벅뚜벅 걸어오는 느낌이었다. 드라마 <샐러리맨 초한지> 속 능청스런 유방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만큼 집중했다. 연기에 집중하고 있으니까 추운지 더운지, 위험한지 아닌지조차 당시엔 잘 몰랐다.” 이범수는 “컨디션이 좋든 나쁘든 스트라이커는 감독이 원하는 순간 골을 넣어야 한다”는 소신으로 버티며 연기했다.

이범수는 유방과의 작별이 유난히 슬펐다고 한다. 하지만 “연기를 즐기는 배우라면 한 작품이 끝나고 그 여독이 채 풀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음 여행지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갖게 된다”면서 개봉을 앞둔 영화 <시체가 돌아왔다> 얘기로 금세 빠져들었다. <시체가 돌아왔다>는 하나의 시체를 놓고 벌어지는 유쾌한 소동극이다. 이범수가 연기하는 백현철은 행동에 앞서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는 생명공학연구소 연구원이다. 얼핏 김옥빈이 연기하는 행동파 한동화와 류승범이 연기하는 사기꾼 안진오에 비해 밋밋해 보인다. “자극적이지 않고 평범한 캐릭터가 어떻게 존재감을 발휘하느냐, 그게 과제였다.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종횡무진 활약하는 다른 배우들에 묻어간다고 욕먹을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백현철이 되기로 한 이유는 뭘까. 이범수는 <태양은 없다> 때 김성수 감독이 자신에게 해준 얘기 한 토막을 들려줬다. “김성수 감독님이 ‘너는 축구선수로 따지면 몸싸움도 피하지 않고 화려한 발놀림으로 공을 드리블해 상대 선수를 제치고 골을 넣는 선수 같다’고 하셨다. 난 드리블할 수 있는 공간,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 많은 캐릭터를 좋아한다. 유방이란 인물이 그랬다. 단선적인 캐릭터가 아니잖나. 능청스럽고 어수룩한 면도 있고 남자답고 엄격한 면도 있는, 그런 변화무쌍한 연기의 공간을 즐긴다.” 그런데 <시체가 돌아왔다>에선 화려하게 드리블할 수 있는 공간이 적었다. 이범수는 ‘이런 상황에서도 골을 넣을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를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에 <시체가 돌아왔다>에 뛰어들었다.

공간을 스스로 만들어 거침없이 드리블하고 패스하고 슛 날리는 걸 좋아하는 이범수에겐 그래서 자신의 플레이를 응원해주는 팬들이 언제나 고맙고 소중한 존재다. 그리고 500만, 1천만 관객보다 자신의 연기를 이해해줄 수 있는 단 한명의 관객이 더 소중하다고 믿는다. 지금껏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지만 유독 블록버스터영화에 출연한 적이 없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잘 차려진 팀에서 흥행을 경험하는 것도 좋겠지만 장치가 덜 된 팀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게 진짜 좋은 배우라고 생각한다. 흥행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만의 느낌을 가지고 가는 배우들을 좋아한다.” 덧붙여 <킹콩을 들다>를 예로 들며 자신은 흥행배우라고 당당히 말한다. “나는 항상 흥행을 해왔다. 여기서 말하는 흥행은 소스가 적은 와중에도 선방을 해 흥행한 걸 말한다. 누가 봐도 확률 높은 게임이다 싶은 작품에 주인공으로 들어가면 십중팔구 흥행할 거다. 제작사, 투자사, 배급사의 힘으로 흥행해서 인터뷰 점잖게 하는 것도 좋지. 근데 이범수라는 사람의 성격이 그렇지가 못하다. 자극적인 거리가 적고 예산이 적어도 캐릭터나 작품이 좋으면 너무 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해서 흥행한 게 <킹콩을 들다> 아닌가.”

연기가 직업이고 취미이면서 놀이인 이범수. 그는 최근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면서 “믿거나 말거나 하는 세계를 경험하게 됐다”고 했다. 김옥빈은 <시체가 돌아왔다> 현장에서 이범수가 촬영 끝나면 집에 일찍일찍 들어가더라고 귀띔했는데 틀린 말이 아니었다. “집사람한테 그런 얘길 했다. 결혼하고 나서 배우로서의 굶주린 눈빛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현실이 행복하고 편안하니까. 그런데 아니더라. 이글거리는 눈빛을 잃은 게 아니고 풍부하고 촉촉한 감성을 더 얻은 거였다. 인생 저편의 그윽하고 심도 깊은 감정들이 연기할 때 우러나오는 것 같다.” 오랜 무명의 시간을 거쳐 드라마 흥행불패를 써내려가는 배우가 되기까지, 그는 “힘들어서 못해먹겠네” 하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연기할 기회만 주어지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고 기도하던 순간을 아직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이제는 더 촉촉해진 감성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연기가 진화하길 슛 들어가기 직전까지 고민하는 배우 이범수가 ‘시체’와 함께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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