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생애 마지막 세계 투어가 될 거예요
2012-03-29
글 : 김도훈

-드디어! 미스 제인 버킨. 혹시 통화가 안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파리는 지나치게 이른 시각이죠?
=너무 미안해요. 여긴 지금 아침 10시예요. 1층에 있는 부엌에 잠시 내려가 있느라 2층 방에서 전화벨이 울리는 걸 못 들었어요.

-파리의 집에 계신 건가요.
=네, 물론이죠. 파리에서만 40여년을 살아왔어요.

-항상 파리에서만 머무르시나요. 모국인 영국에도 집이 있을 것 같은데.
=아뇨. 없어요. 저는 영국이란 나라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답니다.

-이번 한국에서의 공연은 무려 8년 만이에요. 다시 한국에서 공연을 하게 된 계기가 뭔가요.
=왜냐하면 이번 공연은 지난 <아라베스크> 공연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멋질 테니까요. 그래서 꼭 한국에서도 공연을 하고 싶었어요. 일본인 피아니스트 노부(노부유키 나카지마-편집자)를 비롯한 일본인 오케스트라팀과 함께 만들어낼 이번 공연은 아주 이국적으로 들릴 거예요. 물론 바로 옆 동네의 한국 사람들에게는 좀더 익숙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말이에요.

-일본인 세션과 함께 공연을 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일본 3·11 지진과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 모든 재앙을 TV로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어요. 곧바로 비행기표를 사서 일본으로 날아가 현지의 일본인 프로듀서에게 피해자들을 위해 미니 콘서트를 열고 싶다고 했어요. 정말 좋아하더라고요. 다른 외국인들이 모두 일본을 탈출하는 와중에 나는 완전히 반대로 거슬러온 거니까요. (웃음) 그래서 노부를 비롯한 현지 세션들과 작은 공연을 했는데, 내 에이전트가 곧 미국에서 세르주 갱스부르 사망 20주년을 기념하는 6번의 콘서트를 해야 하는 걸 기억하냐고 하더라고요. 아아아. 전 완전히 잊고 있던 상태였거든요. (웃음) 이런 상황에서 거대한 할리우드볼(LA에 있는 1만7천석의 야외 콘서트홀-편집자)에서 세르주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아아 난 못해! (웃음)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도쿄에서 만난 친구들, 내가 한번도 함께 공연해본 적 없는 악기를 사용하는 일본인 뮤지션들과 함께 세르주의 노래를 재해석해서 부르면 어떨까? 그렇다면 세르주의 20주기를 그리면서도 일본을 도울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시작된 거예요.

-한번도 공연에 올려보지 않은 악기라니, 일본인 세션들은 어떤 악기를 사용해서 공연을 할 예정인가요.
=트롬본, 트럼펫, 바이올린, 드럼 등 이전의 제 공연과는 완전히 다른 셋업이에요. 게다가 이번 공연은 세르주의 옛날 노래들을 부르는 제 생애 마지막 공연이 될 것 같아요. 또한 제 생애 마지막 전세계 투어가 될 거예요. 참, 저 이번에 영화를 좀 구해야 하는데….

-한국영화 말씀이시죠?
=얼마 전에 이자벨(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편집자)과 잠시 이야기를 했는데 홍상수라는 감독과 영화를 찍었더라고요. 아, 오해는 말아요. 제가 이자벨처럼 한국 감독과 영화를 찍고 싶다는 건 아니에요. 전 연기를 하기엔 이제 너무 늙어서. (웃음) 그저 좋은 영화를 구해서 보고 싶어요. 홍상수, 김기덕, 박찬욱의 영화들을 권하던데, 당신이라면 누구의 어떤 영화를 저에게 권해주시겠어요?

-아무래도 당신은 프랑스인의 마음을 가진 영국인이니 홍상수 영화가 어떨까요. 뭐랄까, 프랑스 사람들은 종종 홍상수를 에릭 로메르와 비교하기도 하니까요.
=제가 들은 이야기도 바로 그거예요! 에릭 로메르!

-한국에 오시면 제가 DVD를 몇편 구해서 보내드리도록 할게요.
=그런데 어떤 영화가 좋아요? 프랑스에서 추천받은 영화는 <하하하>와 <해변의 여인>인데….

-두 영화 모두 근사해요. 개인적으로는 <해변의 여인>을 아주 사랑하는데, 그 DVD는 꼭 구해드리도록 할게요. 그런데 아까 영화에 출연하기는 너무 늙었다고 하셨는데, 연출은 계속하실 생각인가요. 당신의 연출 데뷔작인 <박스들>을 칸영화제에서 본 기억이 있어요. 아주 인상적이고 시적인 영화였죠.
=물론이에요. 새로운 영화를 만들려고 계획 중이에요. 아직 제목은 정해지지 않았는데, 나이든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예요. 차 한잔도 딸에게 부탁해야 하고, 딸에게 휠체어를 밀어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없어서 이젠 딸에게 기대야 하는 여인의 이야기예요. 늙는다는 것의 슬픔에 관한 영화가 될 거예요. 그리고 제 어머니에게 바치는 영화이기도 하고요.

내 딸들은 나의 명성을 완전히 덮어버릴 정도로 훌륭하죠

첫 연출작인 <박스들>(2007).

-감독 데뷔작이었던 <박스들>도 꽤 자전적인 영화였습니다(<박스들>은 세명의 다른 남편에게 낳은 세딸을 키워온 여자의 이야기다.-편집자).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한 영화이기도 했고요.
=맞아요. <박스들>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죠. 딸로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말하고 싶었어요. “엄마는 제가 예쁘다고 생각하나요? 제가 당신이 원하는 대로 성장했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묻는 영화였고, 그건 실제로 제가 마흔살이 넘어 런던으로 돌아가 엄마에게 물어본 것들이었어요. 저는 인터뷰에서 언제나 아버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했고, 그게 어머니에게는 상처가 됐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박스들>을 만들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박스들>을 봐줬으면 했는데, 최근에는 젊은 세대가 인터넷으로 그 영화를 다시 발굴해서 보면서 제2의 삶을 얻게 됐죠. 기쁜 일이에요.

-그러고 보면 엄마와 딸의 관계는 당신이 80년대 이후 만들어내거나 출연한 영화들의 공통적인 화두인 것 같아요. 당신이 15살 소년과 사랑에 빠지는 30대 중반의 이혼녀를 연기한 아녜스 바르다의 <아무도 모르게>(Le Petit amour, 1988)에도 엄마와 딸의 관계가 보이죠. 심지어 어린 샬롯 갱스부르도 출연했고요.
=그 영화는 직접 각본을 쓰기도 했죠. 내가 15살 소년과 사랑에 빠지는 영화에 아녜스 바르다의 아들 매튜를 출연시키겠다고 하니까 아녜스가 그랬어요. “만약 네가 샬롯을 출연시킨다면 내 아들을 출연시키지.” (웃음) 그래서 샬롯도 출연시키게 됐는데, 그 당시 샬롯은 사춘기라 매일매일 엄청나게 짜증과 우울을 발산했어요. (웃음) 그런데 영화를 찍다보니 나와 매튜의 호텔방 러브신이 없어진 거예요. 아녜스에게 따졌더니 “매튜와는 절대 안돼. 만약 이게 불만이라면 네가 직접 감독을 하도록 해!”라더군요. (웃음) “각본가는 감독에게 결국 배신당할 수밖에 없어. 배신당하기 싫다면 앞으로는 네가 직접 연출을 해봐”라고. 그래서 첫 TV영화인 <Oh pardon! Tu dormais>와 장편 <박스들>을 연출한 거예요. 앞으로는 코미디 각본도 써보고 싶어요. 빌리 와일더와 셜리 매클레인의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당신은 한국에서 세르주 갱스부르의 뮤즈이자 샹송 가수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로제 바댕이나 자크 리베트의 영화에 출연한 본격적인 배우이기도 해요. 85년작 <더스트>로는 베니스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고요. 딸인 샬롯 갱스부르가 <안티크라이스트>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때는 감회가 아주 남달랐을 겁니다.
=샬롯이 상을 받을 때 저도 울었어요. 샬롯은 12살에 배우를 시작했고, 이미 14살에는 세자르영화제에서 신인상을 받았어요. 이후에 샬롯은 첫 번째 할리우드영화 <21그램>을 찍었고, 밥 딜런 영화를 만들었고(<아임 낫 데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멋진 영화 <트리>를 만들었죠. 프랑코 제피렐리의 <제인 에어>(1996)에서는 또 얼마나 훌륭했던지.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프랑스 영화계는 샬롯을 원하지 않았어요. 결국 그녀가 칸을 통해 프랑스로부터 인정받은 건 덴마크 감독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에서였죠. <안티크라이스트>에서의 샬롯은 위험하고 섹시하고 쇼킹하고, 아름다웠어요. <멜랑콜리아>로 다른 소녀가 여우주연상을 받긴 했지만 거기서의 샬롯의 연기도 최고였죠(여기서 ‘다른 소녀’는 커스틴 던스트다.-편집자). 다른 딸인 루 드와이옹도 최근에 자작곡으로 채워진 데뷔앨범 녹음을 끝냈어요. 그녀는 마치 패티 스미스 같은 목소리를 갖고 있어요. 그동안이 샬롯의 시간이었다면 이젠 루의 시간도 올 거예요. 케이트(영화음악가 존 배리와의 사이에 낳은 첫딸-편집자) 역시 성공적인 사진작가로 일하고 있어요. 나 같은 엄마들은 모든 딸이 동등하게 성공하길 바라죠. (웃음)

-세딸들이 당신과 세 남편의 유산을 이어가는 셈이네요.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의 딸도 배우를 했지만 엄마처럼 훌륭해지진 못했죠(바네사 레드그레이브의 딸이자 리암 니슨의 부인이었던 나타샤 리처드슨은 지난 2009년 스키 사고로 사망했다.-편집자). 카트린 드뇌브의 딸도 배우지만 엄마보다 위대해지진 못할 거예요. 그러나 내 딸들은 나의 명성을 완전히 덮어버릴 정도로 훌륭해졌어요.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아무도 모르게>(1988).

-특히 샬롯은 아주 어린 나이에 연예계에 데뷔했어요. 당신 역시 원했던 일인가요.
=그럼요. 아역배우는 아주 좋은 시작이에요. 샬롯은 <사랑할 때와 이별할 때>(Paroles et Musique, 1984)에서 카트린 드뇌브의 딸 역을 연기하면서 데뷔했는데, 썩 괜찮은 시작이었죠. 당시 제작자와 감독이 카트린의 딸 역할을 맡을 소녀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는 샬롯에게 “너도 해보고 싶지 않니?”라고 추천을 한 게 저였죠. 샬롯은 자크 드와이옹의 <이자벨의 유혹>(La tentation d'Isabelle, 1985)에도 출연하고 싶어 했는데 거긴 딸 역할이 아니라 아들 역할의 아역배우를 찾는다더라고요. 캐스팅 디렉터가 집에 놀러왔기에 제가 그랬죠. “역할을 여자애로 바꾸면 안될까? 괜찮다고? 그럼 샬롯 한번 볼래?” (웃음) 같은 해 샬롯은 클로드 밀레의 <귀여운 반항아>로 성공을 거뒀죠. 클로드 밀레는 지금 죽어가고 있어요. 샬롯은 그에 게 큰 빚을 졌죠. 그런데 아까도 말했지만 그 이후에는 프랑스 영화계가 샬롯을 별로 찾질 않았어요. 샬롯에게 영어를 배워서 미국으로 건너가 더 큰 일을 해보라고 조언했어요. 그래서 샬롯은 스물한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데이비드 마멧의 연극 <올리아나>(Oleanna)를 했죠. 지금은 첫아이를 키우느라 연기를 잠깐 쉬고 있지만 샬롯은 진짜 타고난 배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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