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형식을 파괴하고 서사를 해체하는
2012-05-01
글 : 강병진
글 : 장영엽 (편집장)
글 : 김성훈
전주국제영화제 세번째 관람 포인트: 낯선영화

출산의 세기 Century of Birthing

라브 디아즈 | 2011년 | 360분 | 필리핀 | 시네마 스케이프
두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영화감독 호머의 이야기고, 또 다른 하나는 “세상에서 유일한 건 집의 사랑뿐”이라는 신앙을 가진 이교도 집단에 속한 여자의 이야기다. 몇년째 무소식인 호머는 영화제 프로그래머로부터 영화를 빨리 완성하라는 독촉을 받는다. 그러나 호머는 “대체 시네마가 무엇인가. 아직도 시네마의 의미를 찾고 있다”라며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끊임없이 찾는다. 한편, 여자가 이교도로부터 탈출하면서 이교도 내부는 발칵 뒤집어진다. 이같은 방식으로 <출산의 세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각각 전개된다. 우리가 익히알고 있는 영화라는 매체는 이렇다. 약 2시간 동안 주인공이 어떤 사건을 겪으며 변화하는 내용이 발단, 전개, 절정, 결말의 순서에 따라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나 라브 디아즈 감독은 전형적인 서사 전개는 물론이고, 영화라는 매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체한다. 그래서 영화 속 두 이야기가 어떻게 되냐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 있다. 6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을 견뎌내야 하는 건 당연한 소리다.

타부 Tabu

미겔 고미스 | 2012년 | 100분 | 포르투갈, 독일 | 시네마 스케이프
F. M. 무르나우의 영화와 동명 제목을 가진 <타부>는 다큐멘터리와 러브스토리를 결합한 정조 또한 무르나우의 작품을 닮아 있다. 이야기는 ‘실낙원’(Lost Paradise)과 ‘낙원’(Paradise)으로 나뉜다. ‘실낙원’의 무대는 리스본이다. 도박중독자인 노파, 그녀를 돌보는 여자, 그리고 그들의 이웃 여자가 주인공이다. 노파는 죽어가면서 한 남자의 이름을 남긴다. 2부인 낙원에서 그 남자는 과거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그녀를 만났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 특이할 것 없는 이야기지만, <타부>는 종잡을 수 없는 형식의 힘을 지닌 영화다. 1부가 세 여자의 기이한 일상을 그린 드라마라면, 2부에서는 흑백영화 시절의 뉴스릴 같은 영상에 내레이션을 입힌다. 멜로드라마와 슬랩스틱 개그, 악어를 비롯한 수많은 동물들이 한데 엮인 2부는 영화의 역사에 대한 탐구처럼 보일 정도. 혹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를 연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복잡다양한 형식만큼이나 영화가 지닌 감정도 다양하다. 62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유령들린 집 Haunted House

마르틴 아르놀트 | 2011년 | 4분 | 오스트리아 | 영화보다 낯선
‘기성 영화’라는 질료를 자르고, 빻고, 담금질해 새로운 ‘원형’을 만드는 사람들. 파운드 푸티지 필름을 연출하는 감독들은 영화계의 연금술사라고 부를 만하다. 오스트리아의 실험영화작가 마르틴 아르놀트도 이중 하나다. 그는 수십년간 파운드 푸티지 필름을 제작하는 데 몰두했고, 전복적이며 참신한 연출력으로 명성을 얻었다. 할리우드 고전영화를 해체하고 재편집하는 작업으로 잘 알려진 아르놀트의 관심은 최근 미국적 꿈과 환상의 이상향인 월트 디즈니 만화에 머물러 있다. <유령들린 집>은 1940년대 디즈니 만화 속 일부 장면을 차용한 작업이다. 음산한 집의 문과 창, 바닥이 술래잡기하듯 나타났다 사라지고 기괴한 사운드 역시 끊길 듯 끊기지 않을 듯 계속된다. 디즈니의 원작에선 결코 느끼지 못했을 불균질하고 그로테스크한 정서를 지닌 작품이다. 이 단편과 함께 상영되는- 구피와 미키마우스가 등장한다- <연구개> <셀프 컨트롤>도 눈여겨볼 만하다.

우화 Bestiaire

드니 코테 | 2012년 | 72분 | 캐나다, 프랑스 | 시네마 스케이프
학에게 스프 그릇을 내밀고, 여우에게 신 포도를 먹게 하며 교훈을 되새기는 이야기들을 우리는 ‘우화’라고 부른다. 조물주가 있다면, 얼마나 오만해 보이겠는가. 인간 이외의 동물을 의인화해 그들의 생태학으로부터 인간사회의 교훈을 찾는 행태가. 인간의 시선을 일체 배제한 채 건조하고 담백한 시선으로 인간과 동물을 조명하는 <우화>는, 비인칭적인 시선의 낯선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영화다. 이 작품은 인간, 사슴, 물소, 하이에나, 얼룩말, 타조, 코뿔소를 동등한 방식으로 바라본다. 물소가 입을 오물거리며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볼때, 그 영상을 보는 관객은 도리어 물소에게 관찰당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동물원을 무리지어 관람하는 사람들이나 사육장에서 떼를 지어 이동하는 동물들이나, 드니 코테의 카메라 안에선 각기 다른 종류의 생명체일 뿐이다. 자연과 문명의 경계, 영화에서 동물과 인간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해 도발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다큐멘터리다.

안더스, 몰루시아 Differently, Molussia

니콜라 레 | 2011년 | 81분 | 프랑스 | 영화보다 낯선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가 좋은 평가를 받으려면? 원작의 매력을 충분히 유지하면서도 감독만의 비전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교과서적인 대답일 것이다. 사회 철학자 귄터 안더스의 <몰루시안 카타콤>(1931)이 원작인 <안더스, 몰루시아>는 연출자의 ‘직관’에 무게를 두는 작품이다. 프랑스 감독 니콜라 레는 독일어를 아는 친구에게 <몰루시안 카타콤>의 챕터를 무작위로 선택해 읽어달라고 한 뒤, 그에게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9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16mm영화를 만들어냈다.

재미있는 점은 이 아홉편의 짧은 영화가 어떤 순서로 배치되든 완결성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한국 관객을 위해 상영순서를 재배치한 프리미어 버전이 상영된다. 프랑스의 숲과 산업화된 장소를 오가며 촬영된 이 영화는, 자본주의 속 파시즘에 대한 소설의 텍스트와 사색적인 이미지, 감독의 직관적인 연출이 한데 어우러지며 기묘하고 낯선 화학작용을 이루어낸다.

서신교환: 메카스-게린 Correspondence: Jonas Mekas - J. L. Guerin

호세 루이스 게린, 조나스 메카스 | 2011년 | 스페인, 미국 | 시네마 스케이프
<서신교환: 메카스-게린>은 제목처럼 극영화, 다큐멘터리, 실험영화 등 다양한 경계를 오가는 작품을 만든 스페인의 호세 루이스 게린 감독과 미국 실험영화를 대표하는 조나스 메카스 감독이 2009년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카메라로 쓴 편지’를 주고받은 작품이다. 두 사람이 쓴 편지는 서로의 작업에 대한 존경으로 가득하다. “나는 나의 삶에 반응하고, 영화 역시 그것을 다루는 매체이다”라는 메카스의 원칙을 실천하기 위해 게린은 뤼미에르 형제가 그랬듯 카메라를 들고 파리 시내로 나가고, ‘에세이 작업을 주로 한’ 게린을 위해 메카스는 작업실에서 파티하고, 춤추고, 필름 작업하는 등 자신의 사적일상을 일일이 담는다.

이런 방식으로 여러 날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은 진정한 공동작업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두 사람이 작업한 영상물을 단순히 이어붙인 방식 혹은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 오마주를 바치는 방식이 아닌 서로의 작업에 대해 반응하는 진짜 ‘공동작업’ 말이다. 그 점에서 영화는 두 창작자의 서로에 대한 연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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