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세계가 주목한,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2012-05-01
글 : 장영엽 (편집장)
글 : 강병진
글 : 김성훈
전주국제영화제 첫 번째 관람 포인트: 필견작품

드라이레벤 Dreileben

크리스티안 펫졸트, 도미닉 그라프, 크리스토프 호흐호이슬러 | 2011년 | 270분 | 독일 | 불면의 밤
지금 현재 유럽에서 가장 문화적으로 뜨거운 곳은 베를린이다. 모든 장르의 예술인들이 모여들어 거대한 화학작용을 이뤄내는 이곳의 열기는 독일 영화계에도 스며들었다. 이른바 ‘베를린파’라고 불리며, 나치와 통일 등 선배 감독들이 벗어날 수 없었던 거시적인 주제에서 벗어나 독일인들의 삶에 맞닿아 있는 흥미로운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이 있다. <드라이레벤>은 이러한 ‘베를린파’ 감독 3명이 의기투합해 만든 옴니버스영화다. 제목대로 각기 다른 ‘세명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등장인물과 플롯을 서로 공유하기도 하는 이 작품은 대중적으로 즐길 수 있는 장르영화다. 크리스티안 펫졸트의 <비츠 빙 데드>는 성공을 위해 사랑스런 연인 대신 의사의 딸을 선택하는 의사 지망생 남자의 이야기다. 도미닉 그라프의 <돈 팔로 미>에선 첫 영화의 연인들을 스쳐 지나간 심리학자가 살인마를 추적하며, 크리스토프 호흐호이슬러의 <원 미닛 오브 다크니스>는 그 살인마의 도주 행각을 다룬다. 애상적이었다가 신경증적이고 불길한 정서를 거쳐 장르적인 쾌감을 폭발하는 마지막 추격신까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영화.

비밀의 문 Twilight Portrait

안젤리나 니코노바 | 2011년 | 105분 | 러시아 | 국제경쟁
아동심리상담사인 마리나의 구두 뒷굽이 빠진다. 택시는 잡히지 않고 핸드백마저 소매치기를 당한다. 지갑도 휴대폰도 없이 맨발로 거리를 걷던 그녀에게 한 무리의 남자들이 호의를 베푼다. 그러나 마리나는 그들에게 강간을 당한다. 그날 이후의 또 어느 날, 우연히 그들 중 한 남자를 발견한 마리나는 깨진 맥주병을 들고 그의 뒤를 쫓는다.

<비밀의 문>은 마리나의 복수극이다. 강간을 당한 여자의 복수라는 설정에서 하드고어의 쾌감을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 속의 복수는 쉽게 이해되거나 응원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자행된다. (자세한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 자기 파괴, 혹은 마조히즘이 아니라면 그녀의 행동은 위선적인 종교 활동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사랑을 선언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납득이 불가능한 그녀의 행동에 단서가 되는 건, <비밀의 문>이 묘사하는 러시아의 풍경이다.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들, 일을 하지 않으려 할 뿐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는 경찰들, 아내의 상처에 귀기울이지 않는 남편, 환자의 고통을 헤아리지 않는 의사. <비밀의 문>은 그들처럼 아무것도 바꾸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논쟁의 씨앗을 던지는 영화다. 지난해 러시아 영화계를 뒤흔들어놓은 작품이다.

나나 Nana

발레리 마사 디앙 | 2011년 | 68분 | 프랑스 | 시네마 스케이프
<나나>는 아이의 본질에 대한 실험보고서다. 영화가 시작하면 이제 갓 4살 된 여자아이인 나나가 돼지가 도축당하는 광경을 보고 있다. 나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숲속에서 덫을 놓아보기도 하고, 새끼 돼지들과 놀기도 한다. 곧 농장을 떠나고 싶었던 나나의 엄마가 딸을 데리고 오두막으로 들어간다. 엄마는 나나와 함께 땔감을 만들고, 이불을 말리고, 식사를 한다. 그리고 어느 날, 엄마가 떠나버린다. 이 오두막에는 4살짜리 아이 혼자 남는다. 이제 나나는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나나>에는 나나를 맡은 아역배우의 연기가 없다. 단지 실제 도축당하는 돼지를 보고, 덫을 놓아봤던 아이만이 있을 뿐이다. 사진작가 출신인 발레리 마사디앙 감독이 세운 원칙은 절대 아이를 돕지 않을 것과 끝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 혼자인 나나는 울거나 엄마를 찾지 않는다. 알아서 먹고, 책을 읽고, 땔감을 모으고, 이불을 말린다. 심지어 덫에 잡힌 토끼를 처리하는 것도 자신이 보았던 방식 그대로다. 거의 모든 장면이 롱테이크로 촬영된 <나나>의 리듬과 구조는 이 아이를 지켜보는 관객에게 묘한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아이의 감각만으로 묘사되는 삶과 죽음은 어른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슬프고, 날카롭다. 해외비평가들 사이에서는 2011년 최고의 데뷔작으로 화제가 된 작품이다.

사우다지 Saudade

도미타 가쓰야 | 2011년 | 167분 | 일본 | 월드시네마
경기침체와 각종 재해를 겪으며 일본인들의 마음속 마그마가 터진 것일까. 지난해 낭트영화제 최우수작품상, 로카르노영화제 비평가상을 수상하며 일본 영화계의 화제작으로 떠오른 <사우다지>는 일본사회의 어두운 에너지와 분노를 여과없이 분출하는 영화다. 고후시(도쿄의 외곽 지역으로 감독의 고향이기도 하다) 쇼핑몰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일본 노동자들, 경기활황 시절 물밀듯이 일본에 입국했으나 이제는 설 곳이 없는 브라질 이민자들, 호스티스로 일하며 새로운 꿈을 꾸는 타이 여자들이 우연한 계기로 서로 얽혀든다. 영화의 제목인 ‘사우다지’(스페인어로 ‘고독, 향수’라는 뜻)의 의미대로 등장인물들은 현재의 자리에서 고독감을 느끼며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해 막연한 향수를 느끼지만, 이곳에도 저 너머의 어딘가에도 희망은 없다. 불친절하게 끊기는 컷, 자연광으로 담아낸 날것 그대로의 영상, 이민자들에 대한 분노가 녹아든 과격한 일본 힙합음악이 불균질한 조화를 이룬다. 일본 독립영화계의 악동으로 평가받는 도미타 가쓰야 감독의 전작 <구름 위에서> <국도 20호선> 또한 월드시네마 부문에서 만나볼 수 있다.

컬러 휠 The Color Wheel

알렉스 로스 페리 | 2011년 | 38분 | 미국 | 월드시네마
미국 인디영화계의 장르 중 하나인 멈블코어(Mum-blecore)를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비전문배우, 즉흥적이고 웅얼거리는 대사, 초저예산, 특별한 사건 없이 상황으로만 전개되는 서사 등.” 알렉스 로스 페리 감독의 <컬러 휠> 역시 멈블코어 장르의 특징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영화다.

언제나 이별은 정리를 부른다. JR은 교수인 닐과 헤어진다. 자신의 물건을 가지러 가기 위해 JR은 친동생 콜린과 함께 닐의 집으로 향한다. 이 짧은 여정 동안 JR과 콜린 남매는 지난 10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쌓인 갈등을 조금씩 드러내고,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감정이 형성된다. 그렇다고 극영화에서 흔히 볼 법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이 영화에 기대하면 안된다. 속상한 마음을 드러내거나 서로에 대한 불만을 지적할 때 남매는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게 중얼거린다. 별거 아닌 문제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때로는 세상은 아무렇지 않은 일에 기분이 좋고, 상하는 법이다. 이같은 세상사의 단면을 <컬러 휠>은 고스란히 보여준다.

태양계 Solar System

토마스 하이제 | 2011년 | 100분 | 독일 |월드시네마
산, 푸른 하늘, 살랑살랑 부는 바람, 천둥이 치는 밤,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농부, 젖소를 방목하는 소년들….

<태양계>는 남미의 어느 시골 마을 풍경을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사건은 물론이고 인물, 대사, 음악, 자막 등 전형적인 서사를 전개할 만한 어떤 요소도 이 영화에는 없다. 겨울에서 봄 그리고 여름을 지나는 계절의 변화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자연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내셔널지오그래픽>과 다른 점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 트래킹 숏. 기차에 탄 듯 카메라는 물 좋고, 공기 맑은 시골을 지나 부수고 다시 세우는 도시의 개발 풍경으로 옮겨간다. 인간의 손을 탄 도시는 확실히 지금까지 본 아름다운 시골과 대비된다. <태양계>는 현재 사라져가고 있는 자연과 문화를 기록한 보고서라 할 만하다. 그 메시지는 오늘날 한국에도 유효하다. 1988년부터 2008년까지의 독일의 뉴스 클립을 재구성한 <기억의 아카이브>(2009)를 만든 다큐멘터리 작가 토마스 하이제가 남미로 날아가 찍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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