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당신의 3일은 어떤가요?
2012-05-17
글 : 김중혁 (작가)
<다큐멘터리 3일>을 보며 코끝이 찡해지는 순간들

총선이 있던 4월11일에 홍대 근처에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고양시에서 일찌감치 투표를 마치고 볼일을 보러 나간 것이었는데, 모임이 저녁 술자리까지 이어졌다. 한 클럽에서는 ‘우리 모두 모여서 총선 개표 방송을 보아요’라는(설마 지기야 하겠어, 싶은 마음의) 긍정적인 문구를 내걸고 조촐한 행사를 만들었다. 나도 그 자리에 가게 됐다. 분위기는 무거웠다. 무거울 수밖에 없지, 우리 모두 이제는 선거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됐지만 투표함 뚜껑을 막 열었을 때는 우리 머리 뚜껑도 함께 열린 상태여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울어, 말아? 홍대를 포함한 마포 구역을 지역 기반으로 활동하는 고소 전문 후보가 참담한 득표율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에 환호성을 지르기도 하고, 몇몇 지역구에서 예상외의 선전을 하는 후보들을 보며 응원의 박수를 보내기도 했지만 한숨을 쉴 때가 더 많았다. 트위터에서는 진보신당이 여당이고 녹색당이 제1야당이었는데, 새누리당 이야기는 욕밖에 없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이게 뭐냐며 모두들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트위터의 그 많은 친구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이며, 저 이상한 결과는 어떻게 나온 것이냐며 모두 눈을 의심했다.

심상정을 비롯한 몇몇 후보들이 살떨리는 각축전을 벌이지 않았다면 진작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것이다. 술이나 마시러 가자며 일어나려는데, 아, 내 고향 김천의 선거 현황이 화면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잠깐, 이것만 보고 나가야 하는데 떠밀려 계단을 올라가다가, 아, 나는 그 놀라운 수치를 보고야 말았다. 83.5%. 내 고향 김천에서 야당 국회의원이 선거 대혁명을 일으켰을 리 만무하니, 그렇다면, 저 수치는…, 아니나 다를까, 새누리당 국회의원의 득표율이었다(83.5%는 최종 득표율이고, 내가 텔레비전을 보았을 때는 득표율이 더 높았던 걸로 기억한다. 83.5%는 결국 전국 최고 득표율이 됐고). 나는 83.5라는 숫자를 한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당선된 의원을 비난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다. 워낙 여권이 강세인 지역이었지만 83.5%는 이해가 되지 않는 숫자였다. 나는 그 숫자를 보다가 어머니와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래, 어머니와 아버지를 잊고 있었네. 오늘, 김천에서 투표하셨겠구나.

포맷의 승리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은 넓고 별일이 많다. 홍대에서 함께 술을 마셨던 친구들은 우리가 응원하는 정당이 당연히 선거에서 이길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람들은 트위터 밖에도, 컴퓨터 밖에도 많았다. 그 평범한 사실을 자주 잊는다. 평범해서 잊게 되는 건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다가 그런 깨달음이 퍼뜩 떠오를 때가 많다. 내가 뭘 잊고 있었는지,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이 무엇인지. 요즘 가장 즐겨 보는 프로그램 <다큐멘터리 3일>(이하 <다큐 3일>)에도 그런 ‘퍼뜩’ 하는 순간이 자주 나온다.

<다큐 3일>은 ‘포맷’의 승리다. 어떤 삶이든 3일만, 72시간만 졸졸 따라다녀보면 그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는, 야심차고 건방진 기획인데 프로그램을 보다보면 그 기획에 설득력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삶과 인생은 반복이고, 기껏 변주돼봐야 3일의 패턴 속에서 반복되는 것이다. 잔인하고 섬뜩한 진실이다.

방송의 제목 리스트만 봐도 프로그램의 성격을 알 수 있다. ‘그들만의 여행-환경미화원 3일’, ‘생존의 방법-대구 곱창골목’, ‘엑스트라, 그들이 사는 세상-드라마 촬영장 3일’, ‘공존의 방법-성남 기름골목’ 등 이른바 ‘선택과 집중’을 통해 좁은 지역에서의 지속적인 삶을 보여주는데, (제작진에는 미안한 얘기지만) 프로그램을 날로 먹을 수 있는, 참으로 좋은 기획이다. 얼마나 할 게 많을까. 얼마나 찍고 싶은 3일이 많을까. 물론 알맞은 소재 선정에 고충이 따를 테고, 사전 대본 없이 ‘완전 리얼’로 카메라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찍어야 하니 민감한 문제가 많겠지만 이 정도로 딱 떨어지는 기획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소설가의 3일은 고작 10분?

좋은 기획은 파급력이 크다. 아마 내 생각엔 프로그램을 본 사람들 모두 ‘자신만의 3일’을 한번쯤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주인공이 된다면, 내 삶의 3일을 찍는다면 어떨까. 나도 생각해봤다. 만약 찍게 된다면 제목은 ‘3일을 찍어도 분량이 모자라요-소설가의 3일’. 소설가 마을이 있어서 함께 소통하는 장면을 찍기도 힘들고, 누군가를 만나는 일도 많지 않고, 작업도 ‘액션’이 적으니 참으로 심심한 프로그램이 될 것이다. 술 마시는 장면만 자주 나오려나. 3일 찍어도 한 10분이면 방송 끝나겠지.

소설가를 촬영할 순 없겠지만 소설가에게 이보다 더 좋은 프로그램이 없다. 소설 속의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생활’과 ‘반복’이 필요한데, <다큐 3일>에는 수많은 생활과 생활에 녹아든 캐릭터가 무수하게 등장하니, 이런 산삼밭이 또 없다. 세상엔 이렇게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었고, 그 힘으로 세계를 움직이고 있구나 생각하면 가끔 콧날이 찡할 때도 있다(솔직히, 자주 울었다). 개표 방송을 보다가 어머니, 아버지를 떠올렸던 것처럼 <다큐 3일>을 보면서 자주 어머니, 아버지를 떠올렸다.

반복을 인정하고 즐거움을 찾는 일

프로그램에 등장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결국 인생이란 반복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다음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일이라는 걸 (나만 뒤늦게) 깨달았다(다들 진작에 알고 있었던 거야!). 때때로, 삶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건 아직 반복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투표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투표 이야기로 끝내자면,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다큐 3일>에 등장하는 저 사람들, 자신의 삶이 반복되는 건 상관없지만 자식들에게 자신의 반복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야 할 것이다. 저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서,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는 일은 막아야 할 것이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74회 '인생 만물상, 고물상'

인생의 한계선 아래에 있는 사람들

주옥같은 에피소드가 많지만 최근의 개인적인 관심사 때문에 ‘인생 만물상-고물상 72시간’을 재미있게 보았다. 고물을 주워다 팔고 돈 몇천원을 받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고물을 팔아서 번 돈으로 기부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2500원을 벌어 끼니를 때울 라면을 사는 사람도 있었다. 73살 안막내 할머니를 보다 울컥했다. “허리는 꼬부라지고 다리는 힘도 없고, 안 죽으려면 부지런히 해야죠”라며 구형 폴더폰처럼 접힌 허리를 펴면서 “아이고, 아버지, 아버지”라는 신음소리를 내뱉는데, 울컥하고 말았다. 뒤이은 고물상 사장님의 말이 프로그램을 요약한다. “인생을 알려면 어느 한계선이 아니라 그 밑을 봐야 해요. 밑을. 우린 항상 위만 보면서 살잖아요. 인생이 무엇인가. 여기 있어보면 그냥 눈물이 나올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