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오디션 권하는 사회
2012-05-17
글 : 고재열 (시사IN 기자)
온갖 오디션 프로그램 속에서 <나는 가수다>를 인정하는 이유

기억하자. <나는 꼼수다> 열풍 전에 <나는 가수다> 열풍이 있었다. 청출어람 청어람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명백한 것은 <일밤-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가 원전이고 <나는 꼼수다>(<나꼼수>)는 패러디물이라는 것이다. 시간이 좀 되어서 혹은 <나꼼수> 열풍이 워낙 거세 <나꼼수>가 오리지널이고, <나가수>가 파생 상품이라 헷갈릴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나가수>가 처음 방송된 건 2011년 3월6일이고, <나꼼수>가 처음 업로드된 건 그해 4월27일이다.

<나가수>가 방송되자 논쟁이 일었다. 아무리 오디션 열풍이 거세기로서니 중견 가수들까지 오디션 무대에 세우느냐는 것이었다. 몇몇 대중 가수는 이런 프로그램은 뮤지션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고춧가루를 뿌렸고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동료를 자존심이 없는 뮤지션으로 몰아세웠다. 음악이 어떻게 평가의 대상이 되느냐는 고담준론을 펼치기도 했다. 그 때문에 프로그램에 출연한 대중 가수들은 졸지에 한없이 불쌍한 뮤지션이 되어버렸다.

나는 <나가수>에 출연하는 가수들을 비난하는 가수들이 오히려 가증스러웠다. 가수가 연예오락 프로그램에 나가서 웃음을 파는 일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이 경연에 나가서 인생을 걸고 노래하는 것을 우습게 바라보는 모습이 우스웠다. 대중 가수는 대중의 사랑을 먹고사는 존재다. 대중 앞에 맨몸으로 서기를 거부하는 것은 대중 가수의 도리가 아니다. 오히려 대중 앞에 민낯으로 나서기를 거부하는 그들이 거만한 것 아닌가.

가수들의 패자부활전?

아이돌 위주의 음악시장 판도까지 바꿔버린 <나가수>를 나는 ‘가수들의 패자부활전’ 혹은 ‘중견 가수 재활 프로젝트’로 해석했다. <나가수>는 중견 가수들에게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검투사로 돌아온 막시무스에게 원형경기장이 갖는 의미와 같았다. 로마의 북부군 총사령관이었던 막시무스가 노예로 전락한 뒤 창 하나 방패 하나 들고 원형경기장에서 밑바닥부터 올라왔듯 그들 역시 <나가수> 무대에서 국민에게 평가받았다. <나가수>가 없었으면 소셜테이너로 찍혀 방송에서 퇴출된 YB(윤도현 밴드)는 계속 집회장을 전전하는 거리의 가수로 살아야 했을 것이다. 많은 시청자가 일곱 차례의 경연을 모두 성공적으로 마치고 ‘명예졸업생’이 된 박정현·김범수·자우림(김윤아)·윤민수·김경호와 같은 가수들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임재범과 인순이의 카리스마도 빛을 보지 못하고 그들 역시 불운한 가수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무대였다. <나가수>에는 가수가 노래 부를 때 눈물을 흘리는 관객의 모습이 자주 나온다. 그 모습을 보면서 ‘왜 저래? 그 정도로 감동적인 것 같지는 않은데’라고 생각하는 시청자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불혹을 넘긴 가수들이 500명의 청중평가단 앞에서 실존을 걸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을 직접 본다면 충분히 감동할 수 있지 않을까? 노래에 담긴 그들의 눈물까지 들린다면 말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은 88만원 세대의 우울한 자화상

중견 가수들이 인생을 걸고 실존을 걸고 싸우는 ‘필살기 오디션’이었던 <나가수>에 비해 가수 지망생들의 이런저런 오디션은 너무나 싱거웠다. <나가수>가 진검으로 싸우는 결투라면 이런 오디션은 목검으로 싸우는 연습경기 같았다. 그런데 떨어졌다고 인생의 낙오자처럼 운다. 오디션은 그저 오디션일 뿐이다. 패밀리 레스토랑 브랜드 숫자만큼 많은 다양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있는데 한번 떨어졌다고 무엇이 그리 대수인가?

기업 면접 한번 떨어졌다고 해서 인생이 나락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극적 효과를 노린 편집 때문에 오디션의 의미가 평가절상되면서 현대의 원형경기장이 되었다. 88만원 세대 노예들은 오디션 원형경기장에서 박 터지게 싸우고, 기성세대 관객은 TV로 구경하고 ARS로 응원 함성을 보내고, 마지막으로 연예인 황족들은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합격, 불합격을 결정짓는다.

오디션 프로그램은 88만원 세대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약자에 대한 예의’가 없는 사회, ‘강자만 할 말 다 하는 세상’의 알레고리다.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의 시선으로 기성세대가 지금 88만원 세대를 바라보고 있는 것 아닐까? ‘왜 세상이 거지 같아?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 네가 찌질해서 그 모양 그 꼴인 거지. 벗어나고 싶어? 그럼 발버둥쳐? 우리도 다 그렇게 컸어.’ 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실컷 노래를 잘하고도 죄인처럼 서 있는 출연자의 모습이 영 불편했다. 그들은 자신의 음악적 표현에 대해서 설명할 기회도 얻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충고를 들어야만 했다. 심사위원석의 가수들은 그들과 음악적 토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압도하며 훈수를 두었다. 심사위원석과 무대 사이에는 완전한 것과 불안전한 것을 가르는 깊고 넓은 강이 흘렀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심판을 보며 음악의 신처럼 군림하며 훈수를 두는 가수들의 모습이 낯설었다. ‘내가 기자 지망생들을 앞에 두고 저렇게 자신있게 지적질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 10년, 20년 했다고 해서 음악의 신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일요일이 좋다-K팝 스타>의 박진영이 자신의 지적대로 노래를 불렀다면 그는 아마 한류 스타를 넘어선 은하계 최고 스타가 되었을 것이다. 법원에서 표절 판결을 받은 부적격 심사위원인 그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영 마뜩잖았다.

공정에 대한 열망

오디션 프로그램의 창궐로 대한민국은 ‘오디션 권하는 사회’가 되었다. 가수를 넘어서 아나운서와 기자까지 오디션 방식으로 뽑더니 급기야 국회의원 선발에까지 도입되었다. 오디션에 대한 이런 이상 열기는 ‘공정 사회’를 내걸고 시종일관 공정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온 이명박 정권에 대한 실망감이 공정에 대한 열망을 낳은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왕 오디션을 할 양이면 방송사 사장을 오디션으로 뽑았으면 좋겠다. 낙하산 사장님들은 좀 물러나 주시고 말이다. 그러면 최소한 <나가수> 시즌2보다는 시청률이 높을 것 같은데….

<나가수>의 결정적 장면 김건모의 재도전

정의 구현에 대한 기대

<나가수>의 결정적 장면은 바로 김영희 PD가 ‘김건모 재도전’을 결정하는 장면이었다. 이 결정으로 김건모는 국민 찌질이가 되었고, 이를 부추긴 김제동은 쓸데없이 오지랖만 넓은 연예인이 되었고, 성질을 부린 이소라는 절대음감에서 절대 비호감으로 추락했다. 결정적으로 <나가수>의 창업 공신인 김 PD는 공정 사회를 해치고 민주주의의 원칙을 훼손한 역적의 누명을 쓰고 프로그램을 떠나야 했다.

김건모 재도전 사태를 계기로 다양한 논쟁이 제기되었다. 무슨 오락 프로그램에 그렇게 엄격한 룰을 적용하느냐, 정치인보다 연예인에게 더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우리 사회의 기형적 모습을 보여준다 등등…. 그러나 그것 역시 <나가수>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였다. 공정함을 느낄 수 없는 공정 사회에서 <나가수>에서만큼은 정의가 구현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시청자의 기대가 그런 역풍을 불게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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