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나도 짝을 갖고 싶다
2012-05-17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짝>을 보며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것들

2011년 새해 벽두, <짝>의 첫 본방을 우연히 봤다. SBS 스페셜이었다. 다른 지상파의 ‘스페셜’들처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대표선수였으니 내 안의 첫 반응은 ‘참으로 별걸 다 한다’였다. 또한 흥미를 떨어뜨린 건 실험자들이었다. 비싼 차를 타고 제각기 등장하는 남녀들은 예상대로 너무 멋졌다. ‘저런 친구들이면 굳이 이런 곳이 아니어도 짝을 잘 찾을 텐데’라는 느낌이 다큐적 호기심을 식혔다. 연예인도 아닌 (연애) 선수들의 경기를 굳이 지켜봐야 하나. 곧 채널을 돌렸다. 그런데 나는 사악한 시청자가 아닌가. 모태솔로 편이 아주 나중에 기획된 게 순리처럼 보이듯, 짝 찾기 힘들겠다 싶은 분위기의 남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면 채널링은 더 빨라졌을 거다. 석달 뒤 정규 방송으로 편성되자 동시간대 프로그램을 가뿐히 제치고 나의 애정 목록에 올라섰다.

애정 획득은 정공법으로

<짝>을 보며 가장 의아했던 건 ‘저들은 대체 무슨 맘으로 출연을 결심한 걸까’였다. 그 밖에는 ‘방송하지 않는 채로 유료 애정촌 사업을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같은 거였다. 방영 초기, 회사에서 여자 동료들에게 ‘<짝> 봤어?’라고 말을 던졌다가 괜한 자괴감에 빠졌다. 본 사람도 없었고, 뭔지 되묻는 사람도 없었다. 노총각이니 별걸 다 재밌게 본다, 정도의 속반응이 느껴졌다. 그 뒤로 가끔 이야기했다. 내가 즐겨보는 프로그램은 <다큐멘터리 3일>과 <TV동물농장>이야, 이번주 <TV동물농장>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알아? 사고로 사랑을 잃은 개가 식음을 전폐하고 매일 수십리를 걸어 옛정의 흔적을 찾아가더라고, 서열에서 한참 밀리는 수곰이 사랑하는 암컷의 눈에 띄려고 어찌나 봉돌리기를 열심히 연마했는지 팔등에 털이 흔적도 없더라니까…. 사람보다 나은 동물들의 애정행각에 나는 진심으로 감동했고, 열심히 떠벌렸다.

이런 나는 좀 경악스럽다. 페이크 다큐멘터리라 할 야동 역시 즐겨 보는 나의 태도와 뭐가 다를까. 동족의 애정행각을 지켜보며 좋아하고 심지어 흥분하는 동물이 인간 말고 또 있나? 인간은 그걸 국가별로 포장해서 상품으로 제조하고 FTA 훨씬 이전부터 무관세로 유통해오지 않았나. 그런데 나는 인간 야동을 넘어 동물들의 행태까지 즐겨 보며 ‘사람보다 낫다’고 감탄하고 있다니.

<남자는 힘이다>라는 아주 훌륭한 헬스책이 있는데 그 저자가 강조하는 원칙 중에 ‘뽈노 이론’이 있다. 아무리 멋진 포르노라도 반복(시청)하면 효용이 급감하듯 근육의 힘을 키우는 운동방법에도 변화를 줘야 한다는 거다. <짝>은 6박7일이 지나면 반드시 배우를, 아니 출연자를 교체한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얼굴에 빠져든다. 포르노의 효용은 흥미(흥분)와 교훈이다. 교훈이라 함은 배우고 때로 익힐 만한 것이 있지 않겠는가인데, <짝>의 시청 동기와 정확히 겹친다. 저 남자의 구애법이라든가 저 여자의 반응 방식을 보다 보면 나의 실전에 행여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하는 심리. 그런데 포르노가 아무리 묘기를 보여줘도 실전에서 가장 좋은 건 정상위다. 촉각, 시각, 언어적으로 집중효과가 크고 무한한 변주가 가능하다. <짝>에서도 거듭 확인되는 애정 획득법은 잔머리가 아니라 정공법이다.

<건축학개론>을 능가하는 기승전결

출연자들을 포르노 배우로 전락시키는 거 아니냐는 반발이 느껴진다. 본론이다. <짝>이 전하는 진리인 정공법은 훈계가 아니라 내러티브적 화술로 전달된다. 1만개의 신에서 골라 구축했다는 <건축학개론>을 당연히 즐감했는데, <짝> 25기 ‘유후인 편’의 기승전결과 디테일은 훨씬 큰 감흥이었다. <짝> 관람법으로 본방 사수가 아니라 하나의 기수를 한번에 이어서 보는 다운로드 방식을 추천하는데, 이것은 내러티브적 감상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영화와 달리 <짝>의 배우들은 대본이나 감독 없이 시공간적으로 제한된 멍석 위에서 즉흥연기를 펼쳐야 한다. 여기서 마술이 일어난다. 한 영화에서 단역 또는 조역이 갑자기 주인공으로 바뀌는 경우는 없다. <짝>에서는 비일비재하다. 초반에 눈에 띄지 않던 배우가 중반부터 갑자기 주인공으로 올라서고, 자기 소개 전후까지 주목받던 배우의 존재감은 시간이 흐르면서 흔적없이 증발된다. 이런 편집을 유도하는 건 배우의 디테일(출연자의 진심에 따른 행위)이다.

도시락을 들고 선 출연자 앞을 호감어린 상대방이 그냥 스쳐갈 때의 미묘한 표정은 언제 봐도 명배우의 감성연기 뺨친다. 설레는 전희다. 1호 남자와 1호 여자는 초반부터 짝이 될 것 같고, 계속 붙어다닌다. 카메라가 따라다니지만 지루하게 반복해서 보여줄 필요가 없다. 그런데 1호 여자가 2호 남자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위기가 시작된다. 영화에서 잘 쓰이지 않는 배우의 내레이션은 여기서 인터뷰 형식의 주석으로 반드시 붙는다. 1호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흔들리는 마음을 카메라에 털어놓는다. 지켜보는 나는 그녀의 갈등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1호 남자가 여자의 변화를 눈치채고 초조해한다. 배반감에 외면하거나 더욱 거센 공략을 택한다. 편집 리듬도 빨라진다. 절정이다. 그리고 <TV동물농장>에서나 보던 감동스런, 또는 절망스런 선택으로 막을 내린다. 예컨대, 로케이션까지 훌륭한 ‘유후인 편’은 네명의 주연과 맛깔스런 조연들이 어우러져 크고 작은 반전을 거듭하며 완성도 높은 멜로를 이뤄냈다. 대비되는 두 캐릭터로 연고전 구도를 만들더니, 제3의 인물이 끼어들면서 갈등 구조가 완벽히 재편된다. 제1, 제2의 내러티브에서 거듭 살아남은 순정남은 끝까지 놀라운 선택과 행위로 쿨한 최민수 스타일의 조연에게서 눈물까지 뽑아낸다. 여주인공은 섬세한 지휘자 역할을 완벽하게 해낸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들이 추상화한 구체성으로 쉽게 다가온다면, <짝>은 육체적 실제감과 감성의 구체성으로 많은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왜 출연하는 걸까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출연자는 무슨 맘으로 <짝>에 출연해 자신의 사심을, 자신의 이면을 낱낱이 노출하는가? 이론적으로 따지면, 지구애정촌의 70억 인구 중 절반인 35억명을 상대로 한 35억 가지의 연애 가능성을 누구나 가진다. 그러나 불가능하다는 걸 누구나 안다. 대신 7일간의 감정적 경험은 현실이라면 7년 정도는 돼야 견줄 만해 보이는 세기의 강도다. 휴대폰에 여자 500명의 번호가 들어 있고, 우울하면 여자랑 꼭 통화해야 한다는 한 남자가 세 번째 출연하고 나서 말했다. “여기는 들어올 때와 나갈 때 (사람이) 달라진다. 완전히 새사람이 된다.” 출연할 만하다.

꼭 보고싶은 에피소드 '짝 있는 짝, 그들은 새로운 짝을 원하는가' 편

대박성 특집 제안합니다!!!

윗글에서 직간접으로 노출한 시청자, 출연자, 방송사 각자의 이해를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특집을 보고 싶다. ‘짝 있는 짝, 그들은 새로운 짝을 원하는가’ 편이다. 이미 짝이 있는 사람들로만 애정촌을 채우는 거다. 애인이든, 약혼자든, 기혼자든 제한은 없되 기존 짝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기혼자는 아이 없는 가정에 국한한다). 가족에게 전화해서 지금 상황을 알리듯 기존 짝에게 전화한다. “자기야, 역시 자기밖에 없어”라든가 “자기야… 나중에 얘기해줄게” 같은 대화가 상상된다. 사랑이 더욱 굳어지거나 새 사랑을 찾거나다. 냉혹한 현실이다. 사악하지 않은 시청자의 비난이 예상되나 SBS라면 돌파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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