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를 하려고 소파에 자리를 잡자마자 박한별은 신발을 벗고 양반다리를 했다. 다소곳함, 섹시함, 도도함의 범주를 넘어서는 좌식법이었다. 이내 박한별은 말했다. “버릇없… 나요?” 털털하고 솔직하고 귀여운 박한별의 일면을 엿본 순간이었다. 신기하게도 박한별은 일상에서의 풀어진 모습을 작품에서 보여준 적이 거의 없다. <여고괴담 세번째 이야기: 여우계단> <숙명> <요가학원>을 거친 그녀는 늘 새장에 갇힌 관상용 새의 인상을 풍겼다. 물론 그 새는 창공을 날게 될 날을 고대했다. “데뷔하고 인지도는 높아졌는데 연기 못한다는 소리를 엄청 들었잖아요. 저도 제가 하고 싶은 거, 제가 잘할 수 있는 거 하고 싶었어요. 예를 들면 <환상의 커플>의 나상실 같은 역할. 제가 연기한 오유경보다 나상실이 제 성격에 더 잘 맞거든요. 그런데 늘 청순하고 차분한 역할만 들어왔어요. 그땐 진짜 불행했어요.” 어느 순간 박한별은 쓸데없는 고민으로 자신을 몰아세우는 게 백해무익하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곤 행복하게 사는 법을 터득한다. “욕심도 없고 독하지도 않아요. 지인들은 이런 성격으로 어떻게 연예계 생활을 계속하냐고 신기해해요. (웃음) 작품을 고를 때도 이미지는 신경쓰지 않아요. 그때그때 작품이 마음에 들면 해요.” <두개의 달>도 오로지 작품이 마음에 들어 선택했다.
<마이 블랙 미니드레스> 이후 박한별은 자신이 “차갑고 도도하고 기센 이미지”로 바뀐 것 같다고 했다. 러브콜 받는 작품의 반 이상이 스릴러나 공포물의 차가운 캐릭터였다. <두개의 달> 역시 공포영화지만, 박한별은 작품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두개의 달> 시나리오를 받아들었다. “한 시간 만에, 한번도 흩트러지지 않고 집중해서 쭉 읽어나갔어요.” 외딴집에 영문도 모른 채 갇힌 세 남녀의 이야기라는 독특한 설정이 박한별의 호기심을 건드렸다. 작품과의 교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녀는 고민하지 않고 <두개의 달>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그녀가 연기하는 소희라는 인물은 난해하다. 아니, 그녀로선 난감한 일이었다. “소희는 굉장히 애매모호한 인물이에요. 단 한 신도 쉽게, 명확하게 연기한 적이 없어요.” 그녀가 말한 ‘애매모호함’이 바로 소희의 키워드다. 소희는 공포소설을 쓰는 작가이자 귀신을 보는 영매다. 소희는 인정과 석호가 집을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칠 때 그들을 집 안에 붙잡아두려고 애쓴다. 옛 기억을 떠올리다 발작을 일으키는 인정에겐 생뚱맞게도 “기억해야 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해야 해”라고 외치기도 한다. 박한별은 소희의 수상한 행동을 수상쩍게 연기해야 하는 임무를 떠안았다. 슛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고민은 계속됐다. “두 가지 버전으로 찍은 신이 많아요. 요런 말투 하나 저런 말투 하나, 요런 표정 하나 저런 표정 하나. 테이크를 여러 번 가는 게 체력적으로는 힘든데 마음은 편했어요.”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영화에서 박한별은 귀신들을 잠재우는 주문도 왼다. “(한숨을 쉬며) 진짜 막막했죠. 다른 사람들도 막막하게 생각하는데 저는 어땠겠어요.” 촬영 전 영매들을 만나기도 했고 그들을 다룬 다큐멘터리도 봤지만 실제로 주문을 외우는 영매는 없다. “그 장면이 중요한 장면인데, 혹시나 오그라들면 어떡하나, 유치하면 어떡하나 너무 걱정이에요.” 결과적으로 그녀의 걱정은 기우였다. 박한별은 연기의 강약 조절에 성공한다. 구르고 넘어지는 게 일이어서 항상 무릎엔 멍이 들어 있었고, 먼지 가득한 공간에서 강행군으로 촬영을 이어가느라 매일 피부도 뒤집혔지만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고도 남을 만큼 <두개의 달>의 박한별은 신선하다.
“대중에게 잊혀지는 건 무섭지 않아요. 그런데 같이 일하는 영화계, 방송계 관계자들에게 잊혀지는 건 무서워요. 이도저도 아니어서 버려지는 패가 되는 게 정말 무서운 일인 것 같아요.” 꿈과 계획 같은 건 없다면서도 그녀는 언젠가 따뜻한 작품을 꼭 한번 찍어보고 싶다고 했다. 한 가지 더, 평생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간직한 채 살고 싶다는 바람도 전했다. 데뷔 십년. 더디긴 했지만 박한별은 드디어 새장의 문을 열고 나왔다. 한결 자유롭고 평화로워진 박한별의 마음이 연기에도 묻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