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영화계는 도대체 어떤 곳인가, 궁금했다. 영화제를 통해서만 필리핀의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라브 디아즈, 라야 마틴, 키들랏 타히믹 등 이 시대 영화의 기존 문법을 해체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식을 갈구하고 또 그러한 실험을 인정받는 작가는 모두 필리핀에 있었다. 존 토레스 감독도 그중 한명이다. <사랑에 관한 어떤 독백> <살라트> <한밤중의 구체적인 것들> 같은 단편과 <토도 토도 테로스> <나의 어린 시절> <후렴은 노래 속의 혁명처럼 일어난다> 등의 장편에서 존 토레스는 필리핀에 살고 있는 예술가이자, 누군가의 아들이자,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로서 자신을 투영해온 작가다. 제12회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이 전작전을 마련해 그를 서울로 초대했다. 가장 주목받는 필리핀 감독 중 한 사람인 그에게 필리핀 영화계의 정체를 물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당신의 영화 가운데 몇편을 보니 더 궁금했다. 필리핀의 영화계는 어떤 곳이기에 이토록 실험적인 영화가 많이 나오는 건가.
=일단 디지털 기술이 도입됐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이전에는 감독이 되려면 위계질서가 있는 스튜디오에서 어시스트를 거쳐야 했다. 디지털이 영화 만들기에 민주화를 가져온 것이다. 지역적 특징이 있다면 필리핀 사람들이 평소 시스템에 규제당하던 것을 영화로 표출하려는 의지가 강한 것 같다. 사실 필리핀의 영화계가 그런 ‘미친 짓’을 장려하는 게 있다. (웃음) 가장 중요한 건, 영화인들이 서로 돕는다는 거다. 필리핀의 오래된 문화 가운데 ‘바야니한’(Bayanihan)이라는 게 있다. ‘함께 일한다’는 뜻이다. 서로 내 영화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화에도 출연하는 게 그런 이유다.
-당신의 실험은 어떻게 시작됐나. 역시 규제에서 벗어나고픈 생각 때문이었나.
=어릴 때부터 수줍음이 많았다. 그래서 사람들과 가깝게 있기보다는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는 쪽이었다. 어느 날 카메라가 생기면서 멀리서도 그들을 가깝게 볼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저들이 지금 어떤 대화를 하는지,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상상할 수 있었다.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 건, 키들랏 타히믹의 <향기 어린 악몽>을 본 이후였다. 무척 큰 충격을 받았고 메인스트림에서 볼 수 없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처음 단편을 만들 때는 어떤 고민을 했었나.
=그때는 아무런 대본이 없이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푸티지(영상)만 찍었다. 일종의 시네마 에세이, 혹은 시네마 다이어리 같은 작품들이다. 나름대로 필리핀의 정치적 관계와 문제들을 담고 싶었다. 아무래도 돈이 없었고, 시나리오작가도 없으니까 일단 찍고 나중에 픽션을 더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넘나드는 방식이 가능해졌다.
-작업 과정이 궁금하다. <토도 토도 테로스>는 일상적으로 찍은 영상을 재구성한 느낌이다. 그런가 하면 최근작인 <후렴은 노래 속의 혁명처럼 일어난다>는 처음부터 어떤 대상을 정해놓고 촬영한 것 같았다.
=영화 속 영상의 70%는 일상적으로 그 순간 영감을 받아서 찍은 영상들이다. 나중에 편집을 하면서 내 영감과 비교할 때 부족한 게 있다면 다시 카메라를 들고 나간다. 그렇게 의도를 가지고 찍은 영상이 30% 정도다. <후렴은 노래 속의 혁명처럼 일어난다>는 그에 더해 자막으로 픽션을 더하는 과정이 있었던 영화다. 필리핀의 어느 마을에 가서 찍었는데, 내가 모르는 언어를 쓰고 있더라.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를 번역하는 대신에 그들의 대화가 이렇지 않을까 상상해서 영어 자막을 입혔다. 사실상 그들의 목소리 자체가 영화의 음악이 됐던 거다.
-당신의 작품에는 자신이 지닌 여러 가지 모습이 투영된다. 필리핀 사람이자 예술가, 한 여자를 사랑한 남자 등등 말이다.
=처음에는 내가 부딪히고 고민하는 이야기에서 시작했다. 나의 가족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결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정치나 사회문제를 반영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나도 나의 영화세계를 넓혀가려 한다.
-자신의 작품을 불법 DVD 배급업자에게 넘겨버렸다고 들었다.
=내 영화를 더 많은 사람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식으로 DVD를 배급하는 사람들은 내 영화를 DVD로 만들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불법업자들도 내 영화가 상업적으로 충분히 어필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다음 작품에서는 어떤 형식을 실험할 것인가.
=이스마엘 베르날이란 필리핀의 거장 감독이 있다. 그에게 헌정하는 의미의 영화를 준비 중이다. 필모그래피가 약 40편에 이르는데, 40개의 영화 제목을 기반으로 한 상상으로 1편의 영화를 만드는 거다. 그리고 아무도 본 적이 없었던 베르날의 영화가 있는데, 그 작품도 다른 작품의 제목에 근거해서 만들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