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그 남자의 죄가 아니다
2012-09-18
글 : 송효정 (영화평론가)
전성기의 열정을 다시 보여주는 영화 <피에타>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복수, 엄마와 아들, 신체훼손과 강제추심, 근친(으로 추정되는) 섹스, 죄책감 없는 잔혹함. <피에타>의 모티브들을 단순 나열해보니 1990년대 후반 이후 한국영화의 모티브들과 동어반복적이다. 김기덕의 18번째 영화 <피에타>는 이 모든 한국영화의 컨벤션들을 모두 껴안고 있다. 게다가 청계천이라는, 한국사회에서는 정치적 맥락을 지닐 수밖에 없는 민감한 공간을 제시했다. 이렇게 나열하다 보니 떠오른 것인데 그간의 김기덕 영화에 대해 논평하는 방식에는 몇 가지 무성의함이 있는 듯하다. 첫째, 위처럼 영화가 소재로 삼은 모티브들로 영화의 주제를 단순 환원하여 설명하는 방식. 이는 기존의 김기덕 영화가 매춘과 원조교제, 현대사회의 소외와 불통에 대한 폭력적 외화라고 진부하게 평가하는 것만큼 의미없다. 둘째, 감독 당신은 이러한 의도로 보이고 싶겠지만 사실 그 저변에는 무의식적으로 비윤리적이고도 남근적인 마초 성향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는 유형. 행동으로 찍은 영화를 인식으로 재단하는 유형이다. 셋째, 국내 관객 동원에는 실패했지만, 해외영화제에서 인정받은 감독이기 때문에 그는 무조건 훌륭하다는 추수적 심리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는 인정욕구가 강한 김기덕 감독에게도 득될 것이 없다. 반대로 그의 영화가 해외영화제용 영화로 훌륭하다는 판단도 무성의하다. 해외영화제에서 인정받는 일은 물론 의미있는 일이지만, 그 보상을 대가로 한국영화의 맥락 속에서 김기덕의 영화를 은연중 배제하는 방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피에타>를 계기로 다시금 활동적으로 영화를 만들며 관객과 좀더 가까워지려는 김기덕 감독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고백하자면 나는 초창기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중요하고 아름답다고 머리로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 그의 영화를 좋아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이는 개인적 선호도의 문제다. 하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과 <사마리아> 이후 김기덕의 영화가 중요하며 의미있는 지점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비몽>에서 약간의 매너리즘에 빠진 듯 보였지만, 여전히 이 영화가 <숨>이나 <시간>을 이어 ‘용서와 재생’에 관한 미학적 노선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리랑>의 진정성은 나를 심하게 동요시켰다. <피에타>는 김기덕 감독이 다시 심기일전하여 전성기의 열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아리랑>과 <아멘> 이후 너무 관객과 동떨어진 초월적 영화를 찍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다시금 그는 <피에타>를 통해 상처받은 짐승의 숨겨진 발톱 같은 무기를 드러냈다.

욕망대로 행동하는 영화

어쩔 수 없이 <피에타>는 봉준호 감독의 <마더>나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 같은 영화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영화에서 엄마나 아빠는 자식의 복수를 위해 악마가 되지만, 스스로의 도덕적 딜레마에 빠진다. 그리고 그들을 악마로 만든 것은 가족제도의 강렬한 속성이기도 한 동시에 동시대 윤리의 비정상성이기도 하다. 김기덕 영화의 잔혹함과 선정성은 생활세계의 무변화성에 대한 낙담, 이 지독한 구조가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에 대한 신경증적 증상과는 다소 달리 보인다. 그의 영화는 매너리즘에서 양산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최근 사이코패스가 등장했던 반사회적 잔혹 스릴러와 경우가 다르다. 그의 영화는 삶의 권태를 느낄 정도의 무기력조차 허용되지 않는 삶의 조건에 대한 직관에서 출발한다. 그의 영화에는 우리 모두를 소환해 피해자로 동원시키며, 영화 속 폭력의 가해자에 동일시하게 만드는 ‘호소와 동원의 메커니즘’이 등장하지 않는다. 지난 10여년의 영화는 절차의 공정함이나 관계의 호혜적 배려가 존재하지 않는 한국사회의 잔혹함을 폭력적 윤리로 관객에게 전가시켰다. 국가와 사회의 권위가 정당치 못하고 모두가 피해자이기 때문에 복수는 우리의 것이다. 모두의 손이 피로 물들었으니 어쩔 수 없다. 어찌 보면 이러한 동원과 호소의 메커니즘보다 자학과 자기 연민 속에서 관능과 본능의 피비린내 나는 세계를 보여주었던 초창기 김기덕 영화의 세계가 보다 더 윤리적일지 모르겠다.

한편 김기덕의 영화는 행동하는 영화다. 그는 비유하지 않고 욕망대로 행동한다. 증오하면 죽이고 협박 없이 훼손하며 예고 없이 자행한다. 그의 영화에서 욕망은 언어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바로 행동으로 외화된다. 그의 영화에는 대사가 거의 없거나 심지어 주인공의 언어가 외국어인 영화도 있다. 언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동이 중요한 것이다. 그 회로가 단순하다. 이러한 명료성이 김기덕 영화의 매혹의 근거이기도 하며, 그렇기에 그의 영화를 인식으로 판단하는 것은 때로 공정치 않아 보인다.

속죄와 복수의 다성성

영화가 시작되면 거의 폐허에 가까운 건물 잔해들이 늘어선 좁은 골목의 청계천이 등장한다. 주인공 강도와 그가 빚을 추심하러 다니는 금속노동자의 일터다. 이 남루한 삶의 터전마저도 곧 사라질 것이며, 그들은 청계천에서 쫓겨날 운명이다. 하지만 자본에 동정과 유예란 없다. 채권자는 빚 대신 채무자의 신체를 훼손해 보험 보상을 받는다. 강도는 채권자의 하수인, 즉 자본의 말단에 있는 대리인이다. 그 말단에게 자기 의지가 있을까? 강도에겐 돈을 받을 의지가 없어 보인다. 그에게 의지란 육식동물처럼 생고기를 도륙해 먹는 정도의 최소한도의 생존의지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본은 물리적 공간을 점유하고 있지 않으며 추상적인 차원에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워런 버핏의 자산이 1초에 얼마씩 증가하는가나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불어나는 부채의 액수는 일상적 사고의 범위에서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최상층에서 이 자본은 유혹적이고 달콤하며 향락적이며 관용적이다. 돈이면 무엇이든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의 시스템은 말단으로 갈수록 점증하여 난폭해지며 구체적이 된다. 가령 영화에 등장하듯 청계천 금속노동자가 구리를 가공하는 비용 200원은 얼마나 구체적인가? 자본의 말단에 놓인 자들에게 최후의 자본은 자신의 신체다. 피와 살을 으깨 빚을 갚고, 혹은 살기 위해 스스로의 피와 살을 으깬다. 그리고 불구자가 되어 생계를 더이상 유지하기 힘든 악무한 속으로 빠져든다.

어느 날 강도(이정진)의 앞에 ‘엄마라고 주장하는 여자’(조민수, 편의상 ‘엄마’라 지칭하겠다)가 나타난다. 신체의 일부를 기계에 끼워넣거나 건물에서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청계천 금속노동자들을 ‘만족할 만한 보상이 나올 정도의 불구’로 만드는 강도에게 채무자들은 저주를 퍼붓는다. 하지만 엄마는 너를 이렇게 만든 것이 바로 ‘나’라고 한다. 너의 죄가 아니다, 내가 너를 버려서 네가 고독하고 잔혹하게 자란 것이다, 모든 것은 엄마 때문이라는 것이다. 엄마의 사죄는 강도가 냉혈하게 자행하는 폭력의 폭주를 막는다. 하지만 엄마는 그의 진짜 엄마가 아니며, 강도에 의해 자살한 자신의 진짜 아들의 복수를 위해 찾아온 사람이다. 엄마는 두 가지 유형의 복수를 자행한다. 심리적 복수는 강도에게로, 물리적 복수는 자본으로 향한다. 평생 고독했던 강도에게 엄마의 따뜻함을 안겨준 뒤, 그를 고독하고 쓸쓸하게 홀로 남긴 채 그의 눈앞에서 죽는 것이 잔혹한 심리적 복수가 된다. 자신이 당한 고통을 그대로 돌려주는 원초적 방식의 복수다. 한편 물리적 복수는 사채업자에게 향한다. 굵은 자물쇠통으로 엄마가 복수하는 장면은 비록 영화의 디제시스상 등장하지는 않지만 매우 강렬하게 암시된다. 이 영화의 진정성은 속죄와 복수의 다성성에 놓여 있다. 엄마는 진심으로 세상의 모든 냉혈함을 대신해 강도에게 사죄한 뒤 복수한다. 너의 죄가 아니며 너를 이렇게 만든 것은 우리지만 너를 용서할 수 없다. 죽음 앞에 선 엄마를 본 강도는 엄마는 죄가 없다며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애절하게 사죄한다. 영화는 결국 속죄의 대자비, 이 사회의 슬픔과 비애를 분노한 자들을 위해 속죄하는 행위로 해소되고 강도는 죄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

김기덕과 장정일

인정을 갈구하는 끝없는 갈증, 거칠고 야생적이며 경계를 넘나드는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 그리고 입지전적인 내력의 김기덕을 볼 때 종종 장정일이 떠오른다. 국졸의 학력과 청계천에서의 노동, 해병대 생활과 독학으로 배워 세계적 영화감독이 된 김기덕은 마찬가지로 국졸의 학력과 여호와의 증인 신도 경험, 병역면제와 작가로서 유명세를 치른 장정일과 오명과 논쟁을 이끌고 다녔다는 점에서 묘하게 겹친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 예술적 열정과 진정성으로 인해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 그들은 자학과 가학, 연민과 비애의 행로를 겪어낸 열정의 작가들이다. 장정일의 시 <슬픔>의 마지막 구절로 이 두 예술가에 대한, 그리고 영화 <피에타>에 대한 헌사를 바친다. “자비를… 자비를… 자비를…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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