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픽사가 달라졌어요?
2012-09-20
글 : 강병진
제작공장인 픽사 스튜디오에서 미리 본 <메리다와 마법의 숲>

어둠이 깔리자 별들로 반짝이던 하늘에는 별똥별이 날아다녔다. 지난 8월27일, <메리다와 마법의 숲>을 보러 찾아간 픽사 스튜디오 내 상영관의 천장 풍경이다. 픽사의 관계자는 “종종 이곳에 초청되는 픽사 직원들의 아이들은 이 순간 다 함께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친다”고 말했다. 퀵보드를 타고 이동하는 직원들, 어느 때나 마음껏 놀 수 있는 각종 게임기구들, 역시 언제나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는 케이터링 등으로 알려진 픽사의 정체가 달리 보였다. 이들은 자유롭고 편한 걸 추구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재밌는 걸 원하는 게 분명했다. 스튜디오의 구석구석에서 재미있으려고 만들어놓은 것들이 눈에 띄었다. 남자화장실 표지를 알리는 ‘우디’의 실루엣, 그리고 누군가 그 옆에 연필로 그려넣은 <라따뚜이>의 생쥐 ‘레미’. 공교롭게도 픽사를 찾았던 그 주에는 <메리다와 마법의 숲>에 참여한 직원들이 회사에서 조그만 선물을 받는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한국이었다면 봉투에 금일봉을 담아주었을지 모르지만 이들은 영화 속에 스치듯 등장했던 곰 얼굴이 새겨진 항아리를 선물로 받았다. 픽사의 아카이빙 담당 직원이 알려준 바에 따르면 재미를 추구하는 픽사의 전통은 이미 <다섯개의 토이 스토리>와 <룩소 주니어>를 만들던 시절부터 이어져온 듯했다. 그때는 한 컴퓨터가 렌더링이 끝나면 담당자가 호른을 불었고, 컴퓨터마다 동물 이름을 하나씩 정해서 동물 울음소리를 내기도 했다고. “공정이 어느 단계까지 왔는지를 알리는 목적도 있었지만, 워낙 일이 힘드니까 조금이라도 재미있게 일하자는 뜻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픽사란 회사에 대한 환상의 본질은 그처럼 언제나 재미와 유머를 잃지 않으려는 섬세한 노력일 것이다.

최초로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별들이 사라지고 별똥별마저 자취를 감추자 <메리다와 마법의 숲>이 시작됐다. 픽사의 13번째 장편영화인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픽사 최초로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이다. 무대는 11세기경의 스코틀랜드. 왕국의 공주인 메리다(켈리 맥도널드)는 어린 시절부터 활쏘기와 승마에 심취해온 소녀다. 다혈질에 호남형인 아빠 퍼거스 왕(빌리 코놀리)은 딸의 호기를 어여삐 여기지만, 왕비인 엘리노(에마 톰슨)는 천방지축인 딸이 못마땅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 엘리노는 메리다에게도 자신의 기준을 강조한다. 먹을 때나, 말할 때나, 걸어다닐 때나 공주로서의 위엄을 강조하는 엄마의 말들이 메리다에게 잔소리로 들리는 건 당연한 일. 그러던 어느 날, 세 귀족이 자신들의 아들과 메리다의 결혼을 위해 왕국에 도착한다. 메리다는 자신의 신랑이 되고자 경합을 벌인 이들의 자존심을 긁어놓고, 이 일로 엄마와 크게 싸운다. 성을 뛰쳐나온 메리다는 숲속에서 마녀를 만나 소원을 빈다. “엄마가 내 이야기를 듣도록 바꿔주세요.” 하지만 메리다의 소원 때문에 엄마는 곰으로 변해버린다. 과거 모르두라는 이름의 곰에게 한쪽 다리를 잃었던 퍼거스 왕과 그의 전사들은 성 안에 침입한 곰을 잡기 위해 달려든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이때부터 엄마를 인간으로 되돌려놓으려는 메리다의 모험을 그린다.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영향도 곳곳에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이라는 특징 외에도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픽사의 필모그래피에서 여러 가지의 ‘최초’ 기록을 갖고 있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픽사 역사상 최초의 ‘공주’ 이야기이자 최초의 시대극이다. <이집트 왕자>를 연출했던 브렌다 채프먼은 이 작품에 공동감독으로 참여해 픽사 최초의 여성감독으로 기록됐다. 그리고 작고한 스티브 잡스에게 헌정된 최초의 픽사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엔딩 크레딧 직전 “우리의 동료이자 멘토이고 친구였던 스티브 잡스와의 추억에 바친다”는 자막이 삽입됐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대중적인 이름이기도 하지만, 극중에서 귀족 중 한 사람의 이름이 ‘매킨토시’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잡스의 골수팬으로 보이는 이들은 극중에서 메리다가 사과를 베어먹는 장면이 반복되는 것도 잡스에 대한 헌정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그처럼 수많은 최초를 기록한 만큼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여러 면에서 픽사의 이전 필모그래피와는 다른 색깔을 띠고 있다. 이전의 작품이 소외된 이들의 우정과 연대를 강조했다면,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 출발해 가족간의 아름다운 균형에 방점을 찍는다. 전체 속의 개인의 위치에 대해 생각할 것을 다독이는 태도 또한 의외로 보인다.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영향이 짙게 담겨 있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픽사는 <토이 스토리3>에서 토토로 인형을 등장시켜 지브리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관객은 메리다의 이야기에서 돼지로 변한 엄마와 아빠를 구하려는 센의 모험과 숲속의 정령과 교감하며 세상의 파괴를 막으려 했던 원령 공주의 사투를 연상할 법하다. 뿐만 아니라 마녀의 외모에서 마녀 유바바와 늙어버린 소피를 떠올릴 것이다. 메리다에게 길을 안내하는 도깨비불의 모습 역시 고개를 리며 아시타카에게 길을 안내해주던 정령과 닮아 있다.

현실적인 질감과 움직임 살려내

<메리다와 마법의 숲>에서 픽사의 가장 큰 도전과제는 ‘인간’ 그리고 ‘시대극’이다. 픽사는 이미 <업>에서 인간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바 있지만, <업>은 칼과 러셀의 신체를 3등분으로 캐리커처화해 애니메이션다운 표현을 구현했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업>과 달리 현실적인 질감과 움직임에 공을 들인 애니메이션이다. 픽사의 시뮬레이션 슈퍼바이저인 클라우디아 청은 “이번 프로젝트는 ‘털’로 시작해서 ‘털’로 끝났다”고 말했다. <몬스터 주식회사>의 설리를 통해 애니메이션 사상 가장 자연스러운 털의 움직임을 묘사했던 픽사는 <메리다와 마법의 숲>에서 그보다도 더 현실적인 털을 고민했다. 메리다의 머리카락의 경우 약 11만1천개에 달하는 머리카락을 일일이 그려넣었고, 이를 다시 머리카락 뿌리부분부터 끝까지 색깔과 움직임이 시시각각 변하는 상태를 만들어야 했다고. 극중에서 메리다의 애마인 앵거스의 털도 그에 못지않은 노력이 필요했다. “앵거스의 경우는 레이어만 8개다. 꼬리, 얼굴, 다리, 턱밑에 난 털까지 따로 구현해야 했다.” 메리다가 앵거스를 타고 숲속을 달리며 활을 쏘는 장면은 한 단계 진보한 픽사의 기술이 선사하는 매혹의 대표적인 이미지다. 두 캐릭터의 머리카락과 털, 숲속의 나뭇가지와 잎까지 출렁이는 운동감은 사실적일 뿐만 아니라 신비롭다. 아트 디렉터인 티아 크래터는 “제작진이 직접 스코틀랜드에 가서 이끼와 고사리 등을 만져보고 잔디에 누워가면서 실제적인 색감과 질감을 구현하려 했다”고 말했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털뿐만 아니라 ‘옷감’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도 기술적인 혁신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제작진은 실제로 11세기 무렵 스코틀랜드에서 쓰였을 법한 옷감을 주차장으로 가져가 “망치로 때리고 발로 밟아가면서” 질감을 확인해 컴퓨터 속 모델에게 입혀보고 움직이게 하면서 주름이 잡히는 곡선 하나하나까지 구현하려 했다. 메리다의 아빠인 퍼거스 왕의 의상이 대표적인 예다. 울, 면, 곰가죽 등 총 8겹의 옷을 입고 있는 그의 움직임에는 “옷감과 옷감이 서로 스치면서 나타나는 질감까지” 표현돼 있다. 다시 한번 느낀 바이지만, 픽사의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때, 더 놀랍다.

쓸쓸함은 어디로… 메리다는 너무 행복해

많은 변화가 엿보이지만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여전히 그해에 가장 아름다운 영화 중 한편을 만드는 픽사의 작품이다. 다만 이전의 작품들을 사랑해온 관객에게는 픽사 고유의 정서를 다시 돌아볼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혼자 체스를 두던 <제리의 게임>의 제리부터 주인에게 버려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던 <토이 스토리>의 장난감들, <벅스 라이프>의 떠돌이 곤충들, 세상으로부터 잊혀진 <인크레더블>의 슈퍼히어로, 쓰레기장을 홀로 지킨 <월•Ⓔ>, 그리고 아내를 잃고 혼자만의 여행을 준비했던 <업>의 칼 등 픽사가 창조한 캐릭터들은 그들의 외로움과 고독감을 드러낼 때 관객을 전율시켰다. 그러나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그러한 정서와 반대지점에서 출발한다. 부모와 동생들을 가진 데다, 왕국의 공주인 메리다는 외롭지 않고 버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활을 쏘는 메리다의 표정은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그녀의 모험에서 픽사의 전작을 통해 경험한 감정적인 울림이 전해지지 않는 건 아쉬운 점이다. 아마도 <메리다와 마법의 숲>이 세운 또 다른 최초의 기록은 비주류가 아닌 주류의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는 점일 수도.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오는 9월27일, 한국에서 개봉될 예정이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 앞에 만나는 단편 <라루나>는 어떤 작품?

바다 한가운데에 낡은 배 한척이 떠 있다. 소년과 아빠, 할아버지 등 부자 3대는 배를 타고 머나먼 바다를 항해 중이다. 아빠와 할아버지는 오늘 처음으로 소년에게 가업의 비밀을 알려주고 그를 일에 동참시킬 예정이다. 소년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기대감이 한가득이다. 배가 멈추고 잠시 뒤, 거대한 달이 수평선 위로 떠오른다. 아빠는 배 위에 매우 긴 사다리를 설치하고 소년에게 올라가라고 손짓한다. 사다리의 끝에 오른 소년은 신기하게도 달에 도착한다.

<라루나>(la luna)는 <카>와 <업>에서 스토리보드 작가로 참여했던 엔리코 카사로사 감독의 연출 데뷔작이다. 이탈리아 출신인 그는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고향을 떠났던 어린 시절, 그리고 항상 투닥거리기 바빴던 아빠와 할아버지의 모습을 바탕으로 <라루나>를 만들었다. 단편 속에서 아빠와 할아버지는 소년에게 자신이 일하던 방식을 강요한다. 소년의 딜레마는 그들의 방식과 전통 사이에서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시 왕국의 전통과 가족관계 사이에서 갈등하는 메리다의 고민과도 통하는 지점이다. 이들의 가업이 대체 무엇인지는 직접 확인하도록 하자. 성장통을 겪는 소년의 이야기를 우화로 묘사하기에 적합한 신비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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