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랄하고 자빠졌네.” 한마디의 욕이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을 각인시켰다. 극본을 쓴 박상연 작가는 방영 뒤 인터뷰에서 “사극은 금기를 깨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역사는 사실 스포일러 아닌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려면 그 안에서 점점 금기를 깰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이제는 왕에게 욕까지 시키게 된 거다. 다음에는 영화가 되었든, 드라마가 되었든 더 센 게 나올 것이다.” 그로부터 약 10개월이 지났고,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의 왕은 그의 말처럼 더 센 욕을 입에 담았다. “이런 X같은….” <뿌리 깊은 나무>의 ‘지랄’과 <광해>의 ‘X’는 모두 세상을 바라보는 백성의 단어다. 차이가 있다면 세종에게 ‘지랄’은 백성의 마음을 읽는 키워드이고, <광해>의 X는 왕이 분노를 못 이겨 터트린 비명이라는 점이다. 보는 이에게 전하는 느낌도 조금은 다르다. 전자의 욕이 쾌감을 전했다면, 후자의 욕은 왕이 나와 다르지 않은 인간이라는 친근감의 매개다. 물론 <광해> 속 왕의 본질은 왕의 자리를 잠시 대신하고 있는 천민이다. 하지만 왕과 똑같이 생긴 그가 곤룡포를 입고 터트리는 욕은 천민의 입방정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왕과 닮은 남자를 내세운 이 영화는 진짜와 가짜의 구별이 무색한 상태까지 그에게 왕의 역할을 대신하게 만들고 있다.
<뿌리 깊은 나무> 이후 달라졌다
<광해> 이전, 약 1년 동안 많은 사극이 있었고 많은 왕이 있었다. 언제나 있던 사극이지만 <뿌리 깊은 나무> 이후, 그리고 대선을 앞둔 2012년에 와서 기존의 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경향이 거세지는 건 흥미로운 움직임이다.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은 피비린내 나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려던 세자였고, 즉위 이후에는 아버지와 같은 폭군이 될까 두려워하는 왕이었다. 세종 다음에는 훤이었다. 아예 기록의 역사와 무관한 왕인 <해를 품은 달>의 이훤은 정조와 세종의 이미지를 빌려와 섞어낸 캐릭터인 데다, 달콤한 로맨티스트다. 이훤이 “이 정도나 되는” 자신의 외모를 스스로 상찬하거나, 다시 만난 연인에게 왜 처음부터 자신을 몰라봤냐며 투정을 부리는 등의 모습은 그가 왕이 아니었다면 평범한 트렌디 드라마의 한 대목처럼 보였을 것이다. <광해>와 비슷한 설정을 가진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세종 또한 왕이 되고 싶지 않았으나, 왕이 될 수밖에 없는 인물로 등장한다.
농도와 온도는 다르지만, <후궁: 제왕의 첩>의 성원대군도 이러한 흐름에 놓여 있을 것이다. 역시 가상의 왕인 그는 어머니와 여인에게 인정받는 왕이 되고 싶어 하지만, 사실상 연모하는 여인의 소지품을 훔쳐보는 소년이고, 엄마에게 뺨을 맞는 불쌍한 아들이다. 중전과의 합방마저 어머니와 신하들에게 공개해야만 하는 그가 자각한 왕의 처지는 곧 ‘씨돼지’였다. <더 킹: 투 하츠>의 이재하나 <옥탑방 왕세자>의 이각 또한 같은 선상에 놓고 볼 수 있다(조선의 왕인 이각도 현대에 와서는 달달한 음식에 매료돼 요구르트에 환장했다).
이어 도착한 <광해>의 하선은 이러한 트렌드의 결정판으로 보인다. 영화의 오프닝은 진짜 왕이 우아한 자세로 앉아 복식을 갖추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편전을 지키게 된 하선이 변을 볼 때도 궁녀들의 시중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당황하는 모습과 대비된다. <광해>가 드러내는 왕의 실체란 그처럼 용변 뒤처리도 해줘야 하고, 누군가는 굶어서라도 배불리 먹여야 하는 민폐 캐릭터다. 이들은 모두 왕이라는 캐릭터를 두텁게 둘러싸던 이미지를 부숴버리려는 의지를 공유하고 있다. 껍질을 깨고 나온 것은 배고프면 먹고, 마려우면 싸고, 화가 나면 욕하고, 거창한 대의보다 목숨을 잇는 게 우선인 한명의 인간이다.
정치가가 아닌 한명의 인간으로
인간의 모습을 지닌 왕을 향한 2012년의 갈망은 한때 붐이 일었던 정조의 재조명과는 달리 보인다. <한성별곡-正> <이산> <정조암살미스터리 8일> 속의 정조는 암살의 위기에 직면하거나 좌절의 아픔을 겪거나, 왕이 될 때까지 끊임없는 미션에 시달려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들이 전한 카타르시스는 백성을 위한 성군이 되고자 겪는 치열한 고통 자체에서 비롯됐다.
그에 반해 2012년의 왕은 승리의 아이콘이다. 세종은 끝내 한글을 반포한다. 이훤은 반대파를 숙청하고 사랑을 찾았으며 <더 킹…>의 이재하는 사랑뿐만 아니라 왕의 권위와 국가의 안보까지 회복했다. 실제 광해군은 폐위된 왕이었지만, <광해>의 하선 또한 나름대로 승리의 결론을 갖는다. 백성과의 교감은 승리를 향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다.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은 문자를 읽지 못해 병을 예방하지 못한 백성들의 처지에서 한글을 떠올리고, <광해>의 하선은 어린 궁녀의 기구한 사연에 이입해 시키는 대로만 한다는 규율을 어긴다. 무엇보다 이들이 범인과 다를 바 없는 선택의 기로에서 결국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정치적 게임을 돌파하는 순간, 쾌감을 전했다는 사실이 중요해 보인다.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은 아들을 납치한 밀본을 향해 욕으로 답한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명나라 사신 앞에서 조선의 자존심을 드높이는 세종의 모습에 방점을 찍는다.
<광해>의 하선 또한 참다참다 사대주의에 물든 신하들을 쏘아붙인다. 그들이 정치가가 아닌 인간 본연의 분노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들이 왕이 아닌 한명의 인간으로 재조립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중은 잠시나마 위로를 받는다
사극은 현실정치의 국면에 따라 전성과 쇠락을 오르내린다. 그리고 사극 속의 왕은 지도자에 대한 당시 대중의 열망을 투영하기 마련이다. 문민정부 말기에 대중은 <용의 눈물>에서 유동근이 연기했던 이방원의 카리스마에 열광했다. 지난 2000년, IMF의 혼란이 정리되던 시기에는 외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에 몰입했다. 그리고 지금의 왕들은 정치적이지 않은 정치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환기시킨다. 반대의 상황을 상상하는 것도 가능하다. 현실정치의 비루함을 뚫고나올 대안은 없고, 그나마 기대를 건 이들마저 정치적 이해관계만을 가늠하는 상황에서 쌓인 짜증과 스트레스가 2012년의 왕을 통해 터져나온 건 아닐까? <뿌리 깊은 나무> 이후에 등장한 <해를 품은 달>의 이훤이나 <더 킹…>의 이재하, <옥탑방 왕세자>의 이각이 이상적인 군주의 상을 넘어 아예 판타지의 대상으로 그려진 점 또한 주목해야 할 경향으로 보인다. 같은 맥락에서 배우 이병헌이 <광해>의 하선을 통해 과거 드라마에서 보여준 유쾌하고 건강하고 정감 넘치며 때로는 장난스러운 남자로 복귀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말하자면 <광해>는 대중이 가장 좋아했던 이병헌의 모습을 닮은 왕을 보여주는 영화인 셈이다.
지금 대중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믿지도 않을 왕의 모습을 통해 잠시나마 위로를 받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과연 대선이 지나간 2013년의 우리는 어떤 왕에게 어떤 열망을 담고 있을까. 무엇도 확신할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이상적인 왕에 대한 열망은 현실정치에 대한 불만과 정비례한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