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그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2012-09-27
글 : 송경원
영화와 드라마가 사랑한 조선의 왕들 & 그들에게 한수 배우는 대선 전략

백성이 사랑한 왕이 있고 역사가 사랑한 왕이 있는가 하면 이야기가 사랑한 왕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꼭 같으리란 보장은 없는 법. 500년에 걸친 조선 왕조는 27명의 왕을 배출했지만 실제 이야기로 다뤄진 왕은 몇명 되지 않는다. 사극이 사랑한 왕이 누구인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작품 속 왕들의 다양한 면을 살펴보자.

세종
성군의 모습 뒤에 가려진 ‘지랄’ 같은 이도의 모습

역사 속에서 드라마란 음지의 주름 사이에서 피는 법이거늘 조선 역사상 가장 밝고 화려한 태평성대에 무슨 흥미로운 드라마가 있겠는가. 최인현 감독의 1978년작 <세종대왕>을 보면 단박에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세종대왕의 업적을 교조적으로 나열하는 이 영화 이후 무려 30년 넘는 세월 동안 아버지 태종이나 아들 단종을 위한 조연에 만족해야만 했던 세종이지만 최근 팩션의 폭이 넓어지며 조금씩 다른 얼굴을 선보이는 중이다.

문치의 군주로 익히 알려진 세종의 또 다른 꿈을 그린 <신기전>(2008)에서는 자주국방을 염원한 강성군주의 면모를 드러냈다. 같은 해 드라마 <대왕세종>은 ‘세종대왕 이야기는 재미없을 것’이란 선입견을 깨고 세종을 전면에 내세운다. 본격 정치드라마를 표방한 <대왕세종>은 ‘바른 정치’에 대한 표본을 제시하며 대왕세종이 아닌 번민하고 분노하는 인간 이도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여준다. 덕분에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인격적으로도 훌륭할 것이라는 착각 혹은 그래야 한다는 강박을 벗어던질 수 있었던 세종대왕은 현재 다양한 지점에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이젠 제법 알려진 육식 사랑은 물론, 신하들에겐 악마 같은 임금이었으며 60년 태평성대의 그늘에는 아들을 30년간이나 세자노릇시킨 실패한 아버지의 초상이 뒤따르기도 한다. 완전무결한 성군에게서 인간의 얼굴이 발견될 때마다 그는 점점 매력적으로 변해간다.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2012) 속 철부지 왕자의 모험이나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2011)의 맛깔스런 ‘지랄’을 더 보고 싶은 이유다.

- 대선주자들에게 -
“아래에 있는 뭇 백성은 약해 보이지만 힘으로 겁줄 수 없는 것이요, 지극히 어리석어 보이지만 지혜로 속일 수 없다.”

연산
광기와 폭력, 그 속엔 불안한 영혼이 웅크리고

그는 준비된 임금이었다. 적장자였고, 12년간 세자 교육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왕으로 기록되지 못했다. 폐위 뒤 ‘군’의 묘호가 내려진 조선의 첫 번째 임금. 연산군에겐 차라리 ‘폭군 연산’이란 칭호가 더 익숙하다. 폭군 이미지는 신상옥 감독의 <연산군> 연작(<연산군: 장한사모 편>(1961), <폭군 연산: 복수•쾌거편>(1962))을 통해 대중의 뇌리에 각인된다. 연달아 개봉된 이 두 영화는 당시 30만명이라는 경이적인 수치의 흥행기록을 세우며 잔인한 성품에 주색잡기에 혈안이 된 연산의 이미지를 완성시켰다.

한편 신영균의 연산이 전형적인 마초였다면, 임권택은 좀더 깊은 비애를 지닌 연산을 그려내며 캐릭터의 폭을 넓혔다. <연산일기>(1987)의 유인촌은 미남자 특유의 고운 선을 바탕으로 섬세하고 불안한 연산의 내면을 표현했다. 비로소 광기의 참혹한 결과가 아닌 그 이유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에도 한동안 <장녹수>(1995), <왕과 비>(1998) 등 드라마에서는 여전히 폭군의 이미지를 벗어날 수 없었지만 2005년 영화 <왕의 남자>를 통해 한층 깊이있는 정서적 흔들림을 보여주며 대중에게 인간 연산의 아픔을 설득시켰다. 무릇 권력은 의지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권력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사람으로 하여금 권력을 부리고 지키고 휘두르도록 명령한다. 애초에 연산이 일으킨 수많은 사화들 또한 처음에는 왕권 강화를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그 속엔 권력의 무게에 짓눌려 망가져가는 인간 연산의 얼굴이 있다.

- 대선주자들에게 -
“입만 열면 아니 된다, 아니 된다. 대체 되는 게 뭐가 있단 말이오?”

광해
이 불운한 임금을 이야기하라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 했던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광해는 조선의 희망이었다. 피난길에 오른 선조를 대신하여 조정을 이끌며 흩어진 정규군을 규합하고 의병들을 독려한 광해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신 것이었다. 하지만 왕보다 빛난 그의 인기는 부왕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켰고 서출이었던 그는 정실 인목대비에게서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세자의 지위마저 위협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뒤에도 끊임없이 불안에 시달려야 했으며 백성을 생각한 실리정치를 폈음에도 명분을 중시한 사대부들에 밀려 끝내 패륜이란 낙인을 달고 폐위된 불운한 임금이다.

2003년 드라마 <왕의 여자>는 그간 조연이나 배경에 불과했던 광해군을 처음으로 전면에 내세우며 새로운 발굴을 시도했다. 그러나 전과 같은 궁중암투와 치정극에서 벗어나지 못한 구성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그에 비해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의 상상력은 지극히 온당하면서도 참신하다.

살펴보면 광해군만큼 격동적인 삶을 산 왕도 드물지만, 신기하게도 그를 다룬 작품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은 아마도 임진왜란, 병자호란 같은 격동의 시대를 다룬 드라마들이 요구했던 건 이기적이고 무능하여 마음껏 원망할 수 있는 사악한 위정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실패한 영웅인 광해는 선조라는 독보적인 악역에 가려 주목받지 못한 경우라고나 할까. 덕분에 광해는 아직까지 미지의 영역이었고, 그래서 광해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 대선주자들에게 –
“그대들이 죽고 못 사는 사대의 예보다 내 나라, 내 백성이 백 갑절은 소중하오!”

정조
이야기가 넘쳐나는 격변의 시대

可可可(가가가). 정조가 쓴 편지의 한 구절이다. 오늘날로 치면 ‘ㅋㅋㅋ’로 읽을 수 있을까. 역사에 만약이란 의미없지만 많은 사가들은 정조의 급작스런 죽음이 없었다면 조선의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 것이라 말한다. 드라마 <정조암살미스터리 8일>(2007)처럼 정조 암살을 둘러싼 야사와 추측이 난무하는 것도 비명에 간 성군에 대한 아쉬움의 발로일 것이다. 대개 정조는 위기를 극복한 끈기와 인내, 그리고 백성을 살피는 어진 임금으로 묘사되곤 하는데, 정조의 본명을 내건 드라마 <이산>(2007)에서 정조의 모습은 멋지고 가슴 따뜻한 임금 그 자체다. 영화로는 <망부석>(1963), <십년세도>(1964) 등이 있었지만 아마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영원한 제국>(1995)에서 안성기가 분한 강건한 이미지의 정조일 것이다. 실제 정조는 상당한 다혈질이기도 했다. 신하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심한 폭언과 욕설을 쓰는 건 예사였고 “놈들이 한 짓에 화가 나 밤새 편지를 쓰느라 거의 5경이 지났다. 내 성품도 별나다 하겠으니 우스운 일이다”라고 자평하기도 했다고 한다.

영•정조 시기는 유난히 인기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조선왕조 오백년>(1988)부터 <목민심서>(2000), <어사 박문수>(2002), <홍국영>(2002) 등 수많은 드라마의 무대가 된 활력과 가능성의 시대, 그 중심에는 개혁 군주 정조가 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과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정적, 의문이 남는 죽음과 끝내 이루지 못한 개혁까지 그의 인생은 실로 풍성한 드라마의 장이다. 격변의 시대에 어울릴 좀더 활달하고 솔직한 모습의 정조대왕을 기다려보는 것도 즐겁지 않을까.

- 대선주자들에게 -
“강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를 부축하며 탕탕평평하는 땅의 이치를 좇아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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