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시스템의 차이를 극복하는 것도 연출자의 몫
2012-10-04
글 : 주성철
사진 : 최성열
박찬욱 감독이 말하는 신작 <스토커> Stoker

감독 박찬욱 / 각본 웬트워스 밀러 / 촬영 정정훈 / 편집 니콜라스 디 토스 / 음악 클린트 멘셀 출연 니콜 키드먼, 미아 와시코스카, 매튜 굿, 더모트 멀로니, 앨든 에런레이치, 루카스 틸, 재키 위버 / 미국 배급 폭스 서치라이트 / 개봉 2013년 3월

<스토커>의 이야기는 이렇다. 인디아 스토커(미아 와시코스카)의 아버지(더모트 멀로니)가 죽고, 장례를 치르고 있는 인디아의 집에 찰리(매튜 굿)라는 삼촌이 찾아온다. 어머니 이블린 스토커(니콜 키드먼)와 함께 살아가던 집에 삼촌이 찾아오면서 설명하기 힘든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디아는 삼촌의 존재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그렇게 모든 일은 ‘집’에서 벌어진다. 마치 그의 이전작 <쓰리, 몬스터>(2004)에서 느꼈던 폐소공포증의 또 다른 버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스토커>가 조금 더 음산하고 또한 풍부하며 그 관계는 명료하지 않다. 공간 구성부터 그의 영화들 중 가장 ‘미니멀’하리라는 추측은 다른 더 많은 것들을 숨기기 위한 맥거핀일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까지 공개된 정보가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다. 현재 최종 편집까지 모든 작업이 완료된 <스토커>는 내년 3월 개봉예정이다. 완성시점과 비교하자면 다소 기나긴 기다림이 주어진 상태. 7월 귀국해 다음 작품을 구상 중인 박찬욱 감독을 만났다. 스즈키 세이준의 오랜 팬인 그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닛카쓰 창립 100주년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에서 <살인의 낙인>(1967)을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스토커> 작업을 마무리하고 7월에 한국에 돌아온 이후 곧장 멕시코 과나후아토국제영화제로 떠났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가 샘 페킨파의 <가르시아>(1974)다. 영화에서 주인공 베니(워런 오츠)와 그의 여자친구 엘리타(이셀라 베가)가 도시 전체에 지하터널이 있는 신비스러운 곳이라며 가고 싶어 하던 곳이 바로 과나후아토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큰 은광으로도 유명했는데 지하터널은 물론이고 콤파니아성당, 산디에고성당 등 문화적으로 가치있는 건축물도 많고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미드나이트 야외상영을 공동묘지에서 하거나(웃음), 아방가르드 게이 레즈비언 포르노 영화들까지 소화하는 등 영화제 자체도 흥미롭다. 지난해에는 주빈국이 한국이었다. 이전부터 초청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었는데 늘 스케줄이 맞지 않아 가지 못했다. 올해도 초청장이 왔는데 <가르시아>의 원제목인 <알프레도 가르시아의 목을 가져와라>를 살짝 바꿔서 이메일 제목이 ‘찬욱박의 목을 가져와라’더라. 안 갈 수가 없없다. (웃음)

-크랭크업하던 날의 소감은 어땠나.
=마지막 촬영날 시간이 부족해서 스탭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 시간을 좀더 연장했다. 그것도 한계가 와서 시간을 더 초과하게 됐는데, 사실 할리우드에서는 그럴 때 스탭들이 일손을 멈추고 그냥 현장을 떠나버려도 아무 말 못한다. 그런데 직접 촬영에 참여하는 스탭들이나 그 장면과 딱히 관계되지 않는 스탭들까지 마지막 촬영종료 축하를 하기 위해 다 남아줬다. 너무 고맙고 감동했다.

-폭스 스튜디오에서 외국인 촬영감독을 어떻게 승인했을까.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비영어권 감독들을 데려오는 일이 워낙 흔하니까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는데, 그들도 감독 혼자만 달랑 오면 얼마나 외로울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게다가 무명의 스탭을 승인해준 게 아니라 정정훈 촬영감독이면 나랑 계속 작업했던 사람이니 부담도 없을 거다. 가령 미술감독 같은 스탭이면 현지에서 재료를 구하는 문제부터해서 현지 적응 자체가 굉장히 힘들 수 있는데, 카메라 기종이나 장비는 어딜 가나 다를 게 없으니 큰 지장도 없다. <설국열차>의 홍경표 촬영감독도 봉준호 감독과 여러 작품을 했고 <라스트 스탠드>의 김지용 촬영감독도 워낙 영어를 잘하니까 의사소통에 무리가 없을 테고.

<제인 에어>(2011)의 미아 와시코스카. 할리우드에서 클래식한 매력을 뿜어내는 흔치 않은 젊은 배우다.

-혹시 <스토커>의 시나리오를 쓴 <프리즌 브레이크>의 ‘스코필드’ 웬트워스 밀러를 만난 적 있나.
=‘석호필’은 프리 프로덕션 초기에 작품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딱 한번 만났다. 초창기에 언론 보도가 나온 것처럼 직접 출연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 머물던 김지운 감독은, 지난번 <인류멸망보고서> 홍보차 잠시 내한했을 때 할리우드에서의 작업이 힘들다는 얘기를 무척 많이 했다.
=김지운 감독은 나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내 앞에서 힘들다는 얘기, 입도 뻥긋하면 안된다. (웃음) 촬영 중에는 거의 여유롭게 식사를 한 적이 없을 정도로 빠듯했다. 스튜디오의 경우 담당 임원 3명이 매일의 모든 테이크를 다 체크한다. 스튜디오 간부들도 로버트 알트먼이 <플레이어>(1992)에서 희화화했던 것처럼 미녀들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스포츠카를 운전하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전문적인 지식과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지적하고 요구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 옳은 얘기만 하는 건 아니고 감독하고 취향 차이는 있을 수 있으니까 그럴 때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처음에는 스튜디오의 그런 요구들이 한국에서 하던 것과는 사뭇 달라서 좀 당황하기도 했다. 그런데 시스템의 차이를 극복하는 것도 연출자의 몫이니까 결국에는 좋은 접점을 찾았다. 과정상의 어려움은 세계 어디서나 있는 일인 것 같다.

-힘든 와중에도 ‘이래서 할리우드구나!’ 하는 쾌감을 느껴본 적은.
=아무래도 꿈의 스탭들과 함께했던 경험이지 않을까 싶다. 가령 <쿤둔>(1997), <디 아워스>(2002) 등에 참여했던 현대음악계의 살아 있는 전설인 필립 글래스나 세계적인 사진작가 마리 엘렌 마크가 스페셜 포토로 참여한 것? <스토커>의 음악감독은 <블랙스완>(2010) 등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모든 작품을 함께한 클린트 멘셀인데, 필립 글래스의 경우 영화에서 배우가 직접 연주하는 2곡을 작곡했다. 그 곡은 크랭크인하기 전에 완료돼야 하는 것이기에 필립 글래스하고는 촬영 전부터 여러 번 만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 양반은 뉴욕에 살고 나는 내슈빌에서 영화를 찍으니까 스카이프로 영상통화를 하며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 하는 요구들을 했다. 때론 번복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도 그는 또 알았다고 하면서 정말 멋지고 신사적으로 대해줬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속으로 ‘저런 거장에게 이런 소리를 해도 되나’ 하는 생각도 했다. (웃음) 나중에는 좀 미안한 마음에 “제가 너무 요구가 많죠?” 그랬는데, 전혀 아니라고 하면서 “연출자로서 분명한 의도를 갖고 얘기하는 거라면 어떤 요구라도 환영”이라고 했다. 그냥 거장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

-<실크우드>(1983), <빅 피쉬>(2003), <바벨>(2006) 등에 스틸 작가로 참여하기도 했지만 마리 엘렌 마크는 사진집 <인디언 서커스> 등 매그넘의 유명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스탭들을 정하는 시점에서, 마리 엘렌 마크는 ‘설마’,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막 던져본 이름이었다. 그랬더니 “그래요?” 그러면서 한번 연락해보겠다는 거다. 역시 할리우드는 이런 게 가능하구나, 했다. (웃음) 놀랍게도 하고 싶다는 대답이 왔다. <스토커>의 경우 그녀가 현장에 1주일 정도 머물며 ‘특별사진촬영’으로 참여했다. 그 이미지들은 역시나 훌륭했고 포스터로도 사용된다. 현장에서 그녀가 정정훈에게 가서 “여기 광량이 좀 부족한데 라이트 조금만 더 해주면 안되나요?” 그런 식으로 굽실거리며 얘기하는 모습을 보니까 살짝 ‘이게 뭐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웃음) 나한테 와서는 미아가 옆모습이 예쁘다고 그쪽으로 많이 찍으면 좋을 것 같다고 얘기해서, 나하고 생각이 같기에 “그러잖아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랬지. 신기했다. 그리고 나랑 같은 마미야7 기종을 쓰기에 카메라 얘기도 많이 나눴는데, 어떤 렌즈가 좋다고 추천해주며 자기가 거래하는 카메라숍에서 사다주기도 했다. (웃음)

<디 아더스>(2001)의 니콜 키드먼. “테스트 촬영 때도 열과 성을 다해 연기한다”는 게 박찬욱 감독의 얘기다.

-편집이 무척 중요한 영화라는 얘기를 했었는데, 편집을 맡은 니콜라스 디 토스가 누구인지 궁금하다.
=편집감독을 결정할 때도 스카이프 영상전화로 면접을 봤는데, 닉 디 토스는 필모그래피만 볼 때 나와 잘 맞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일단 면접하는 그의 뒤로 고양이가 슥 지나가기에 고양이 키우는 사람이라는 것이 일단 마음에 들었고(웃음), 이름이 특이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앙드레 아들이에요?’ 그랬더니 맞다고 해서 정말 깜짝 놀랐다. 내가 좋아하는 감독들 중 정말 과소평가받은 사람이 앙드레 디 토스인데 바로 그의 아들이었다. 거의 그 두 가지 이유로 뽑은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터미네이터3> <다이 하드4.0> 같은 대규모 예산의 오락 장르영화들만 해온 친구라 처음에는 조금 안 맞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바로 그가 <스토커>를 원한 이유였다. 그런 몸집 큰 영화들만 해오던 중 작고 새로운 영화를 해보고 싶었던 거다. 아무튼 함께 의견을 조율해나가면서 빠르게 조화를 이뤘다. 이후 긴 미국 체류기간 동안 제일 든든한 친구가 됐다. 이번에 <스토커>를 촬영하면서 진짜 인간적으로 깊이 친해진 사람을 고르라면 바로 그다.

-닉 디 토스와는 사적으로도 자주 만났을 것 같다. 아버지 얘기를 더 듣기 위해서라도. (웃음)
=앙드레 디 토스는 정말 과소평가받은 감독 중 하나다. <De Toth on De Toth>라는 책도 나와 있던데 역시 마틴 스코시즈가 서문을 썼더라. 사진을 보면 대머리에 애꾸눈의 포스가 정말 대단하다. 커크 더글러스와 절친이었는데 <인디언 파이터> (1955) 촬영 도중에는 의견충돌이 생기자 팔굽혀펴기로 승부를 가린 적도 있다. 심지어 감독이 이겼다. (웃음) 감독이지만 카레이서이자 비행기 조종사이기도 했던 희대의 풍운아였다. 그리고 래리 코헨이 아버지 영화의 제작부 출신이었다더라.

-그럼 혹시 래리 코헨과도 만났나.
=래리 코헨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같이 밥 먹자고 해서 만난 적도 있다. B무비를 만들며 힘들게 사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옛 할리우드 스타가 살던 집에서 살고 있을 정도로 부자라고 하더라. 직접 제작해 판권을 자기가 다 관리하니 수익이 어마어마한 거다. 게다가 리메이크 판권 수익도 상당한데 최근에는 니콜라스 윈딩 레픈이 <매니악 캅>(1988)에 관심을 보이며 리메이크하기로 했단다. 그에게 내가 또 히치콕을 좋아한다고 말하니까 그가 60년대 아주 젊었을 적 못 나가던 시나리오작가일 때 히치콕을 만난 얘기도 들려줬다. 뉴욕의 한 호텔에서 스토리를 하나 팔려고 만났고 피칭을 했는데, 굉장히 재밌어하면서 자기가 하겠다며 스튜디오에서 계약하기로 하고 다시 만나기로 했다더라. 자기는 ‘드디어 내 인생에 꽃이 피는구나’ 하고 좋아하며 찾아갔는데, 처음 보는 스튜디오 중역이 나와서 ‘감독님 마음이 바뀌어서 안 하기로 했다’며 집에 가라고 했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스토리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들을 다루고 있어서 스튜디오가 반대했던 거였다. 그래서 내가 ‘그럼 그 이야기는 어떻게 됐나요?’ 하고 물었더니 몇년 뒤에 다른 데 팔아서 다른 감독이 영화화했다고 하더라. 마침 그 영화 DVD가 있기에 사서 봤더니 정말 연출도 못했고 연기도 이상한데 리메이크 욕심이 날 정도로 이야기가 기가 막히더라.

-배우들 얘기를 하자면 역시 니콜 키드먼이 가장 궁금하다.
=니콜 키드먼은 굉장히 열성적이다. 실제 촬영할 때 대역배우들이 서 있는 자리에 표시를 해두는데, 조명 세팅이 끝나면 대역이 빠지고 실제 배우가 거기 들어간다. 그럴 때마다 니콜은 호출하기 전부터 거기 와 있다. 그럴 때가 정말 자주 있었다. 그러면 아무래도 후배들이 긴장할 수밖에 없다. 또 그녀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테스트 촬영 때인데 그땐 보통 어떤 필름을 쓸까, 어떤 필터를 쓸까, 조명 컨셉은 어떻게 잡을까, 하면서 미술팀이나 의상팀까지 아울러 시각적 컨셉을 확인하는 단계다. 그러면 배우는 의상과 메이크업을 끝내고 카메라 앞에서 촬영감독이 ‘자, 정면이오, 옆면이오’ 그러면 정면으로 몇초, 측면으로 몇초 그렇게 찍으면서 준비를 한다. 대개 분위기도 어수선하고 주변 스탭들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그때도, 니콜은 마치 카메라가 돌아가는 것처럼 열과 성을 다해서 연기한다. 그래서 니콜이 테스트 촬영을 할 때 숙연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웃음) 그렇게 함께 작업하며 느낀 건, 그들의 시선에서 보자면, 예술영화를 만드는 아시아의 한 감독을 자기가 잘 대해주고 보호해주고 좋은 결과물이 나오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한 사람 같았다. (웃음) 그리고 할리우드에서는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보통 리허설을 안 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내가 “나는 영어도 서툴고 낯선 작업환경이라 오차도 있을 수 있고 현장에서 머뭇거리는 게 싫으니 미리 캐릭터 해석 등에 대해 토론하고 싶다. 굳이 리허설이라기보다는 서로 대화를 나누며 내가 왜 이렇게 대사를 썼고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고 하는 얘기들을 나누고, 또 배우의 얘기나 접근법에 대해서도 들어보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감독님이 말한 그런 이유라면 좋다’며 흔쾌히 받아들여줬다. 나중에 그런 시간들이 정말 좋았다고 얘기해줬다. 여러모로 클래식한 대배우의 풍모를 느꼈다.

<매치 포인트>(2005)의 매튜 굿. <스토커>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로, <스토커>의 가장 큰 ‘발견’일지도.

-니콜의 딸로 나오는 미아 와시코스카는 요즘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배우 중 하나다. 어쩌면 <스토커>의 가장 핵심적인 캐릭터 같기도 하고.
=미아는 부모님 모두 대학교수에 사진작가들이다. 예술적 소양이 보통 이상이다. 게다가 폴란드 사람으로서 유럽적 마인드가 있다. 여느 할리우드 스타들과는 좀 다르다. 평소에도 그저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고 사람들도 잘 못 알아본다. 너무 지나치게 그러는 것도 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얘기를 나누다보면 배우라는 걸 잊어버린다. (웃음) 물론 영화에 대한 애착이 대단해서 시나리오나 자신의 캐릭터에 대해 메모해둔 노트를 보면 여백이 없을 정도로 포스트잇까지 군데군데 붙여서 정말 빽빽하게 써놓았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별 티를 안 내서 ‘메모는 왜 한 거지? 뭘 쓴 거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궁금했다. (웃음) 나중에 편집하면서 보면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다 섬세하고 다르게 표현됐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였고 <제인 에어>에서는 제인 에어였다가 <마담 보바리>에서는 또 엠마 보바리로 나오니 요즘에 이처럼 클래식한 매력을 발산하는 어린 배우가 어디 있을까 싶다.

-그 두 모녀와 함께 <스토커>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배우가 바로 매튜 굿이다. 그의 새로운 면모를 보지 않을까 싶다.
=삼촌으로 나오는 매튜 굿이야말로 진짜 ‘발견’이 될 것 같다. 남자가 봐도 매력적일 정도로 번듯하고 품위있는 영국 배우의 풍모가 있는데 자기 파괴적인 유머도 잘 구사한다. (웃음) 깜짝깜짝 놀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술도 잘 마셔서 촬영 내내 마치 한국 남자배우와 지내는 듯한 기분이 들어 좋았다. (웃음) 그외 또 언급하고 싶은 배우들은, 먼저 재키 위버인데 <박쥐>나 <도둑들>의 김해숙 여사가 생각날 정도로 너무 좋았다. 정정훈이 제일 귀여워했던 배우다. 아버지로 나온 더모트 멀로니나 코폴라의 <테트로>(2009)에 나왔던 앨든 에런레이치, 그리고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2011)에 나온 루카스 틸도 아주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인상적인 조연들이 많은데 캐스팅 디렉터의 추천 덕분이다. 사실 한국은 배우들의 리스트가 그리 크지 않지만 영어권은 미국은 물론, 영국, 호주, 캐나다까지 무수히 많은 배우들을 다 꿸 수 없으니 캐스팅 디렉터의 안목이 무척 중요하더라.

-<스토커>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는 분위기다. 성격과 스타일, 과연 어떤 영화일지 너무 궁금하다.
=등급은 일찌감치 R등급을 받았고, 현재 포스터나 예고편 시안 정도는 나온 상태다. 일단 방송용 트레일러가 미국 시간으로 9월19일 오후 7시에 연예정보프로그램인 <엔터테인먼트 투나이트>에 처음으로 공개됐고, 이후 포스터는 24일에 yahoo.com, 정식 트레일러는 26일 애플 사이트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개봉과 관련한 작품 컨셉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사이콜로지컬 스릴러’로 정리하자고 마케팅팀에 얘기했다. 거기에 하나 더 붙이자면 미아가 연기하는 소녀 인디아 스토커의 성장 이야기가 무척 중요하다. 원래 각본에서 더 나아가 각색, 연출, 편집 그 모든 과정이 조금 더 그쪽으로 포커싱됐다고 보면 된다. 덧붙여 <스토커>는 편집의 묘미가 굉장한 중요한 영화였고 거기서 발생하는 효과가 크다. 구체적으로 뭐라 말하기는 힘든데 나중에 영화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스토커>의 핵심 무대는 또 하나의 캐릭터라 부를 만한 음산한 집이다. 당신이 참여했던 옴니버스영화 <쓰리, 몬스터>의 대저택이 연상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방인 감독으로서 다루게 될 시대나 지역적 배경 역시 궁금했다.
=‘대저택’이라고 하기엔 좀 작다. 물론 애초에 원했던 건 마치 <다크 나이트>의 브루스 웨인이 사는 저택처럼 거의 성을 방불케 하는 집이었다. 그래서 크고 오래되고 아름다우면서도 묘한 분위기가 풍겨나는 그런 저택을 찾았다. 하지만 그런 규모로 내 미적 기준을 만족시키는 집을 찾기가 힘들었고, 내슈빌에서 그 ‘크기’에 대한 집착을 포기해도 좋을 만큼 마음에 쏙 드는 집을 운 좋게 찾았고 즐겁게 찍었다. 그리고 시대나 지역을 가늠하기 힘든 이야기이긴 하다. 영화에 휴대폰이 나오기도 하고 자세히 보면 어느 주에서 벌어지는 일인지도 짐작할 수도 있는데, 언뜻 봐서는 50년대 같기도 하고 요즘 같기도 하고 또 동부인지 서부인지 잘 파악하기 힘들다. 그런 모호한 요소들이 의미있는 작용을 한다.

-최근 <버라이어티>가 당신이 갱스터 무비 <코르시카72>의 연출을 맡았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전에는 서부극 <더 브리건즈 오브 래틀버지>(The Brigands of Rattleborge)가 유력한 차기작으로 물망에 오르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 두 작품이 유력하게 오가고 있는 건 맞다. 알다시피 전에 <액스>를 준비하다가 연기된 것처럼, 이런저런 조건이 안 맞아서 미뤄지고 엎어지는 일은 워낙 흔하다. 그 서부극 역시 사실 오래전부터 오간 프로젝트다. 공교롭게도 그쪽에서 준비가 됐을 때 내가 <박쥐>를 해야 했고, 또 내가 <박쥐>를 끝냈을 때는 다른 감독이 거기 합류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쫓다가 딱 만나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웃음)

<애니멀 킹덤>(2010)의 재키 위버. 이 작품으로 지난해 오스카 최우수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새로운 시스템 속에서 발견할 박찬욱의 핵심
김지운과 봉준호가 기대하는 <스토커>

박찬욱 감독은 항상 나보다 한두 걸음 앞서 가는 사람이라, 또 이 사람이 무엇으로 놀라게 해줄지 어떻게 즐겁게 해줄지 마냥 궁금하기만 하다. 그의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에 앉아 있으면 조금은 조바심내고 들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박찬욱의 이름은 그런 것이다. 그게 아무한테나 일어나는 일이겠는가? 나는 그의 영화를 동등한 감독의 입장에서 보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영화 팬으로서 지켜본다. 그의 첫 번째 영어영화인 <스토커>가 그 어떤 영화보다 나에게 더 각별한 이유는, 내가 여기서 영화를 만들며 느꼈던 모든 고통과 희열을 그도 함께하고 했었고, 그것이 스크린위에 옮겨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난 <스토커>를 보면서 <라스트 스탠드>를 볼 것이며 박찬욱을 보면서 김지운을 보게 될 것 같다.
김지운

<스토커>가 핵심 무대인 하나의 저택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니 그 밀도가 무척 궁금하다. 아마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 중 가장 미니멀한 세계일 것 같은데, 그만큼 등장인물에 대한 집중력이 엄청날 것이고 바로 거기에서 그의 연출 ‘신공’이 빛을 발할 것 같다. 한 사람이 새로운 세계나 환경, 그리고 시스템 속에서 뭔가 그 사람의 핵심을 보여주기 마련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라 <스토커>는 바로 그런 묘미가 있을 것 같다.
봉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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